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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작가 Oct 18. 2020

#19. 당신은 왜 신을 믿나요?

신앙은 세상의 지식을 초월하나 세상의 지식을 무시하지 않는다

이스라엘 예루살렘, 2016


  대체 그들은 왜 신을 믿는 것일까?


  신을 믿거나 안 믿거나 한 번쯤은 스스로에게 질문해본 적이 있을거다. 나는 기독교 모태신앙으로 자랐다. 하지만, 신이라는 존재를 본격적으로 믿기 시작한 것은 18살 때부터이다. 그 전에는 몸만 교회에 있었지, 사실상 무신론자와 다를 바 없었다. 


  이 자리를 빌어, 내가 어떻게 신앙을 갖게 됐는지에 대해서 구구절절 말할 생각은 없다. 단지, 신앙의 본질에 대해서, 위의 사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다.


  최소한 문과 기준으로, 학문의 최고봉은 철학이다. 철학은 모든 학문의 핵심인, 인간 그 자체를 다루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교는 이론적으로는 그 철학 위에 존재한다. 인간을 넘어, 신의 가르침을 다루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배우는 곳을 신학이라고 한다.


  신학과 종교는 세상의 그 어떤 지식도 함부로 넘볼 수 없는 영역을 다룬다. 즉, 표면적으로, 종교와 신학은 세상의 지식을 초월해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머리로 이해가 가능한 영역을, 우리는 신의 영역이라고 절대 이야기할 수 없을테니까. 만일, 인간이 신의 영역을 모두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면, 우리는 더이상 '신' 이라고 부르는 그를 신이라고 명할 명분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신을 단순히, 인간과는 동등하지만 다른 존재로 보지 않는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다. 한 인간이 어떤 목적으로 종교를 믿는 것과 상관없이,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선함' 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존재한다. 물론 그 선함이란, 신의 기준에서 선함이라, 때로는 인간의 눈으로 보았을 때, '악함' 으로 느껴질 때도 있다. 자신을 칼로 찌르려는 사람에게, 정당방위로 공격할 것을 악하다고 이야기 할 수 없듯이, 굳이 신의 기준이 아니더라도, 인간세계에서는 악함으로 느껴지는 선함도 분명히 존재한다. 우리에게 와 닿을 수 있는 언어로는 '사랑의 매' 정도가 되겠다.


  문제는, 그러한 종교의 특성을 아주 교묘히 이용하는 사람들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십자군 전쟁을 일으켰고, 알라의 뜻이라며 이슬람극단세력들은 죄없는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도 했다. 그저 권력자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자기기준에서 '선' 을 이야기 하면, 다른 이들의 '선'은 '악' 일 수 밖에 없다는 저급한 논리로 역사는 그렇게 흘러왔다.



  

  이스라엘 예루살렘은 그렇게 자신들이 선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들의 전쟁화약고다. 구교와 신교의 성지이면서, 유대교의 성지이기도 하고, 이슬람의 성지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결국 하나의 신을 섬기는 종교이면서, 서로가 자기의 신의 이름을 내세우며 수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


  선함과 사랑과 평화를 가르치는 종교집단이 '성지' 를 위해서 가장 선하지 않은 방법으로, 남을 미워하고 저주하며, 평화를 적극적으로 깨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아니면, 그들이 믿고 있는 신앙의 방식이 절대적으로 잘못되었거나.


  위의 사진은 이스라엘 예루살렘에 있는 통곡의 벽의 모습을 담은 사진이다.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영토이지만, 예루살렘의 중심, 성전이 있는 올드시티는 세상에서 가장 특이한 지역이다. 올드시티를 반으로 나누었을 때, 왼쪽은 유대인들이 다닐 수 있지만, 통곡의 벽 오른쪽은 WESTBANK 지역이라고 해서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더불어, 이슬람을 믿는 이들만이 이곳을 다닐 수 있다. 이스라엘의 영토이지만, 성전이 있는 WESTBANK는 이슬람의 손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나라인데, 유대인은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땅이다.


  그래서 유대교를 믿는 랍비와 신도들은 통곡의 벽 앞에서, 벽 너머에 있는 성전을 회복하기 위해, 벽에 얼굴을 대고 통곡하는 심정으로 기도를 올린다. 저 벽 너머의 땅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성전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이스라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 입장이 백번 맞는 거 같지만, 반대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또 그렇지가 않다. 수천년간 터를 잡고 살아온 팔레인스타인들이, 갑자기 옛날 자기땅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의 고향을 뺏아 가려고 하는데, 어느 누가 좋아하겠는가.




  나는 예수를 믿고 사랑하며, 그의 가르침을 따르며 살고 싶은 사람이다. 하지만, 한국교회를 다니면서 이상한 모습들을 많이 겪어왔다. 특별히, 직분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뜻을 내세우며, 세상의 기준을 함부로 이야기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특정 정치인을 무조건 지지해야한다는 궤변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뜻만 갖다 붙이면, 세상의 기준 따위는 모두 무시하고 함부로 밀어부쳐도 되었다. 하나님의 뜻이라며, 남의 종교사원에서 소리 질러 기도하다가, 쫓겨나는 와중에도, 일반인들도 담기 힘든 욕을 해대기도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신의 신앙에 대해 전혀 이해가 없이 다른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걸까?


  신앙은 세상의 지식을 초월할 수 있으나, 세상의 지식을 절대로 무시하지 않는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드리라고. 하나님의 것이 위대하기 때문에,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줄 필요없다는 식으로 말씀하지 않으셨다. 그저 예수가 아닌, 자신이 바르게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확신 자체를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망령되이 일컫으며, 자기 옳은 소견대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일 뿐이다.


  만일 예수께서, 신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을 무시해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 설파를 하신 존재였더라면, 과연 신이라는 분이 굳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을 이유가 있었을까? 성경을 잘 읽어보면, 죄를 미워하라고 하셨지, 세상을 비난하지 않으셨고, 모두가 무시하고 경멸하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던 자가 바로 예수였다.


  예수를 바르게 믿으면, 세상과는 구별되게 살아가되, 절대 세상을 무시할 수가 없다.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향해 욕설을 내뱉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다. 예수는 그렇게 가르친 적이 단 한 번 도 없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의 가르침은 개인을 향한다. 세상 그 어떤 가르침도, 자신보다 지식이 부족하거나,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을 가볍게 여기라고 말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는 한없이 엄격하면서도, 이웃에게는 관대하고 사랑해야하는 것이 모든 종교의 공통된 가르침이다.


  사실 종교 그 자체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종교의 가르침 자체를 오해하거나, 악용해서 자신의 이권을 챙기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 때문에 종교의 본질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정작 종교의 가르침이 절실하게 필요할 때는, 이미 신뢰를 너무나도 많이 잃은 상태라 회복이 너무나도 어렵다.


  통곡의 벽은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게 해달라고 울부짓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타락함과 부패함을 회개하는 장소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땅에 사랑은 절대 존재할 수 없다. 영원히 미움과 저주만이 가득한 땅이 될 것이다.

  

  그곳이 아니더라도,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의 통곡의 벽이 있다. 그곳에서 빼앗긴 자신의 이권을 되찾기 위해서 울부짓는 사람이 될 것인지, 빼앗긴 이유를 생각해보며 자신을 반성하는 사람이 될지는 각 개인의 선택이다. 다시 한 번, 그들에게 물어보고 싶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도 질문해보자.


대체 나는 왜 신을 믿는 것일까?

  자신의 의로움을 증명하기 위해서, 자신의 정당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신을 믿고 있지는 않는가? 계속 뭔가를 쥐려는 마음이, 신이 주신 가르침의 본질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어떻게 존재해야할까.


사진 / 글 이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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