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리더의 화룡점정
'당신의 최애 리더는 누구?'
직장에서 '워너비'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내게도 있었다. 하지만 MBTI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사람의 성향은 제 각각이다. 누군가를 쉽게 동경할 수는 있지만, 그 사람처럼 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자신의 성향에 맞는, '최적의 나'를 만드는 게 더 쉽고 특별한 일 아닐까.
사회초년생 시절 첫 팀장의 카리스마에 반했다. 멋졌다. 롤모델로 삼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유리 멘탈인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범위라는 걸 깨달았다. 싫은 소리도 못 하고 화도 제대로 못 내는 성격. 냉철하면서도 츤데레 같은 리더를 꿈꿨지만, 다시 태어나야 이룰 수 있는 꿈일 뿐이었다.
냉철함에 있어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무시무시한 첫 팀장, 내 결혼식장에 추리닝을 입고 등장한 두 번째 팀장, 나이트에 환장한 팀장, 팀원들 경조사를 무시하던 팀장, 로봇 같아 거북스러운 팀장, 다혈질의 츤데레 팀장, 사내정치의 희생량으로 잘린 팀장, 회사에 올인하다 세상을 등진 팀장, 게으르고 답답해 환장할 뻔한 팀장, 자기 잘난 맛에 사는 팀장을 거쳤다. (개인적으로 느꼈던 감정의 나열이다.) 팀원 개개인 맞춤형 리더는 없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리더의 성향도 모두 다르다. 만인을 만족시키는 팀장은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 부하직원의 입맛에 조금만 안 맞아도 한 순간에 별로인 리더로 낙인찍히기는 게 현실이다.
일반적으로 업무 능력과 리더십 등 기본 역량 평가를 거친 후 팀장이 된다. 여러모로 검증된 후 리더 자리에 오른다. 자질과 능력 없어 보이는 상사도 그 자리가 처음이라 잠시 갈팡질팡하는 것이지 루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회사에서 기회를 주고 나머지는 개개인의 몫으로 둔다. 돌변해 팀원들을 달달 볶든 감정에 호소하든 욕을 하든 저마다의 필살기를 발휘해 자리 지키기 전쟁을 치른다. 괴로움과 버거움에 항복하고 자리에서 내려오는 경우도 있고, 적성을 찾아 안착하는 사람도 있다.
서두에 나열한 팀장들 중 두 명은 대표이사 자리까지 올랐다. 능력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팀장은 따로 있다. 실력뿐만 아니라 따듯한 심성까지 지닌 사람이었다. 직장인들의 단골 레퍼토리인 '나를 가장 괴롭힌 사람이 제일 기억에 남아'가 아니었다. 따듯했던 상사가 가장 생각이 난다.
팀장은 직장에서 더윗사람이 부리기 쉬우라고 만들어 놓은 자리다. 눈코 뜰 새 없이 일해야 하는 건 당연하고, 잘해야 하는 것은 숙명이다. 일거수일투족 평가받기에 자존심을 슬쩍 치우고, 타인의 시선, 더불어 가정까지 등한시하기도 한다. 이런 와중에 따듯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을까.
밤 10시경에 팀장에게 전화가 왔다. 당연히 회사 일이 터진 줄 알았다. 술 취한 목소리였다. 첫마디가 "어머니 괜찮으세요?"였다. 항암 치료 후 엄마 검사 결과를 들으러 간 날이다. 좋지 않은 결과에 팀장은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며 위로를 건넸다. 다음 날 출근했더니 "제가 어제 차장님한테 전화했던데……"라고 했다. 무슨 대화를 나눈지 기억 못 하는 거 같았다. "네"라고만 대답했다. 기억을 하든 못하든 그 순간의 마음만으로 충분했다.
몇 개월이 지난 어느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앞자리에 앉은 팀장이 다른 팀 팀장과 통화 중이었다.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상대 팀장 목소리가 커서 대화 내용이 밖으로 흘러나왔다. 거침없는 말과 비아냥이 한참을 이어졌다. 팀장은 끝까지 평정심을 유지했다. 헛웃음을 지으며 정중하게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타이밍에 맞춰 퇴근 인사를 했다. 안 좋은 표정을 이내 고치고 "어머니 때문에 고생 많으시죠? 뭐라 말을 못 하겠네요"라고 말했다. "팀장님이 더 고생하시는 거 같은데요?"라는 어색한 말을 남기고 나왔다.
몇 년 전 엄마가 큰 수술을 받아 휴가를 낸 적 있다. 당시 팀장은 복귀 첫날 자리에 앉기도 전에 불러 밀린 일을 운운하며 달달 볶기 시작했다. 어머니 괜찮으시냐는 말 한마디 묻지 않았다. 정으로 돌아가는 조직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지만, 무심한 냉랭함에 서운했다.
말 한마디가 퍼뜨리는 힘이 있다. 리더는 기본적으로 회사 일을 잘해야 한다. 더불어 남다른 리더십, 책임감, 통찰력, 실행력, 도전 정신, 도덕성과 유연한 사고방식 등을 요구받고 끊임없이 평가받는다. 하지만 어느 조직에도 '따뜻한 마음'은 리더의 요건으로 두지 않는다. 조직에서 그다지 필요하지 않기 때문에 발휘하느냐 마느냐 역시 리더의 선택이다.
요즘에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지만, 폐렴에 걸렸을 때 고지식한 상사 눈치에 입원도 못 하고 치료받은 적 있다. 아픈 죄인이었던 서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대학교 후배 부모님이 코로나에 걸려 함께 살던 후배가 자가격리에 들어갔다. 후배가 말했다. "격리 기간 내내 업무 연락만 오지, 어머니 어떠신지 아무도 안 물어보더라고요. 서운했어요." 어쩌면 완벽한 리더의 화룡점정은 따듯함이 아닐까. 각박한 세상, 차가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직장인들에게 잠시 잠깐이라도 위로를 전하는 가슴 따듯한 선배가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