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요즘 글쓰기 과정을 공부하고 있다. 수업 중 깻잎, 또는 패딩 논쟁이 쓸 내용 거리로 등장했다. 모둠으로 둘러앉아 1단계 - 계획하기, 2단계 - 쓸거리 생성하기를 공부할 때, 아이들(중2 여학생)이 깻잎이나 패딩까지 거론하며 글쓰기 주제로 삼을 만큼 이 논쟁에 관심이(요즘 핫한 논쟁이다 보니) 많았고 서로 의견을 나누는 것을 즐거워했다.
공동 글짓기 작업이라 쓸 내용 조직하기 - 3단계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짜임을 짜고 있을 때 바로 문제의 '밸브 논쟁'이 등장했다. 4단계 - 글짓기, 5단계 - 고쳐쓰기 시간을 잠시 미룰 정도로 뜨거운 논쟁 거리가 생긴 것이다. 어차피 대부분 남자 친구가 없는 처지라 깻잎이나 패딩 논쟁은 남의 일이지만 ㅎ ㅎ 매일 학교 화장실을 쓰는 우리(학생+교사)에게 밸브 논쟁은 무심하게 지나칠 수 없는 일이었다.
밸브 논쟁
'밸브 논쟁'의 '밸브'는 화장실 변기 밸브(레버?)를 말한다. 새 학기가 시작되고도 한참 동안 화장실 사용 문제가 발생하여 아이들을 지도했지만 여전히 청소하시는 분의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용변 후 물을 내리지 않거나, 휴지를 아무 데다 버리는 일이 자주 발생했는데, 급기야 큰 사고(굳이 세세히 언급하고 싶지 않은)를 치고 말았다.
학교 시설이 오래되어 시스템상의 문제(노후, 누수 등)도 있지만, 이 번만은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학년부장인 나는 마이크를 잡고 방송으로 학년 전체에 상식적인 화장실 사용 방법과 예의에 대해 지도를 해야만 했다. 많은 아이들이 비상식적인 행동에 놀라며 어찌 그런 일이 벌어졌을까 의아해했지만, 이미 화장실은 그런 모습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 후였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밸브 논쟁이 생긴 것이다.
화변기 말고 양변기 밸브를 손으로 내리냐? 발로 내리냐? 에 이어 당연히 손으로 내리는 것 아니에요? 아니 어떻게 손으로 내려요? 더럽게, 라는 것이 충돌한 것이다.
밸브를 손으로 내리는 줄만 알았던 나는 아이들 말에 놀라 교무실에서 공감을 얻으려다 더욱 놀라고 말았다. 교사들 중에서도 발로 물을 내리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아이들은 아이들이니까, 라는 생각에 머물다가 나와 같은 어른도 그렇다니 더욱 눈이 동그래지고 말았다.
앉으면 허리춤까지 오는 밸브를 다리를 높이 들어 내린다고? 다른 사람이 신발로 내린 것을 나는 손으로 잡아왔단 말인가? 물론 공중화장실 관련 이야기다.
♡ 다른 사람들이 발로 내리니 어쩔 수 없어요. ♡ 그래도 저는 휴지로 감싼 후 발로 내려요. ♡ 찜찜하고 더러운 생각에 도저히 손으로 내릴 수 없어요.
다름과 틀림
당연히 나와 같은 방식일 거란 믿음이 흔들리자 여러 가지 궁금증이 몰려왔다. 나의 확신이 다른 이에게는 통하지 않을 때, 나와 다르다고 틀린 것은 아니지만, 내가 믿었던 것이 무너질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뜻밖의 상황을 마주하자 잠시 혼란에 빠졌다.
화변기 사용 후에는 발로 물을 내린다.
공동 화장실 변기 밸브를 손으로 내리는 사람이 내 주위에는 다수를 차지하나 여전히 충격적이다. (바닥에 납작 붙인 화변기 밸브를 손으로 내리는 것만큼이나...) 그 사실을 안 이후에도 밸브로 발이 쉽게 올라가지 않는다. 대신 손을 더 꼼꼼히 씻을 수밖에.
펼쳐보면 서로 다른 많은 것들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을 것이다. 상식이라고 불려 온 것들의 제 각각 다른 모습! 일반적인 것에 대한 개개인의 다른 정의! 일반적이라 생각한 것이 (타인에게는) 일반적이지 않을 때의 당혹감!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편리하고 세련되게 꾸며진 고속버스 휴게소 화장실에서 본, '화장실이 그 나라의 문화를 드러낸다'는 내용의 문구가 떠오른다. ('인간의 역사는 곧 화장실의 역사'라고 빅토르 위고가 말했다고 한다.) 위생, 청결, 안전, 매너, 배려, 라는 단어가 가득해야 할, 본인의 흔적을 남기지 않아야 할 공간이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화장실' 캠페인은 외국에서도 인정할 만큼 발전하여 화장실 선진 문화를 이루었다고 한다. 유치원 시절에 이미 끝냈어야 할 화장실 사용 지도를 하는 것도 아쉽고, 더 들어가 밸브 논쟁을 치르는 것도 씁쓸하다.
내 손이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면, 남의 손도 마찬가지 아닐까? 내 발이 닿는 곳에 남의 손이 닿으면 어쩌지, 라는 걱정쯤은 해야 하지 않을까?
아이들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대화를 통해 논쟁의 합의점을 잘 이끌어 글을 완성할 수 있을까?
우리는 여전히 제 각각의 삶의 방식을 고수해 나갈 것이다. 그러나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명분은 지켜야 하지 않을까? 그런 명분이 유지되어야만 각각의 다채로운 삶의 모습이 개성으로 살아날 것이다. 다름과 틀림은 얼핏 한 끗 차이로 보이나 그 깊이는 가늠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은 언제든 돌아보고 수정할 수 있어야 '우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 수업 시간 4단계 - 글짓기 시간이 기다려진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중심 생각, 주제가 무엇으로 표현될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