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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락 한방현숙 Mar 02. 2024

우리 모두 가야 할 길이고 짊어질 일인 것을!

월간에세이 3월호

월간에세이 2024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1987년 창간된 '월간에세이' 책이 참 예쁘다, 부드럽다, 책장 넘김이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퇴근 후 집에 다다르기 전, 오늘은 핸들을 왼쪽으로 꼭 꺾으리라, 다짐 아닌 다짐을 해 보지만... 여지없이 오른쪽으로 꺾어 우리 집 주차장에 이른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들어서면서도 어깨를 짓누르는 부담감과 때로는 자책감에 마음이 버겁기만 하다. 오늘은 꼭 들르리라 반찬까지 들고 출근했으면서도 발길을 쉬이 돌리지 못하고, 큰마음을 먹어야만 가게 되니 참 어렵다.

 토요일에 가리라 마음을 추스르고 저녁 집안일을 하다, 강아지와 산책길에 나서면 헛웃음마저 나온다. 반려견과의 산책은 1시간이 넘어도 괜찮으면서 고작 20여 분 거리의 방문을 이리 힘들어하다니... 서글프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때로는 귀찮기도 한 감정이 여러 겹으로 나를 에워싸 심사가 복잡해진다.


 그곳, 아주 가까운 거리 그곳에는... 시부모님이 사신다. 아흔을 바라보는 두 분이! 평생 서울에서 사시던 시부모님이 우리 집 인근으로 이사 온 지 7~8년이 흘렀다. 80대 초반이던 아버님이 운전으로 경제 활동을 할 만큼, 어머님은 깔끔하신 성격대로 집안을 잘 보살필 만큼 건강하던 그때가 두 분에게는 이사 후 맞이한 황금기가 아니었을까? 찰나로 느껴지는 그때가 그저 아쉽기만 하다.

 김치며 반찬까지 보내주시던 어머님, 총기가 밝아 건강하시던 아버님은.... 지금 어디로 가셨을까? 가끔 아리송한 말씀을 하시던 어머니, 평생 고집이라고는 모르시던 분이 특정 옷에 집착하고, 억지를 부릴 때 이상하다 생각했는데 그 모든 행동이 치매 초기 증상임을 알게 되었다. 외국에 사는 조카가 왔다 갔다, 집에 화분이 없어졌다, 하시더니 어느 날부터는 세탁기 사용법을 헛갈려하셨다. 선명한 과거 기억으로 사시느라 같은 말을 무한 반복하셨다. 어머님이 진단을 받고 치매약을 드시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아버님도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걸음걸이가 서툴고, 물건을 하루 내내 찾으시고 무엇보다 약을 챙겨 드시지 못했다.


 두 분의 젊음을 기억하기에, 저러실 분이 아님을 알기에 마음이 아파오고, 저 모습이 곧 다가올 내 모습이기에 처량해진다. 부모님을 걱정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으나 생활에 쫓겨, 거리에 밀려 마음만 앞서고 어쩔 도리 없는 자식들의 사정도 답답하다. 그저 자주 찾아뵙고, 끼니를 챙기고, 전화 통화 횟수를 늘리는 것이 최선인 지금, 앞으로 더 나빠질 일만 생각나니 걱정이 태산이다.

 저녁에 찌개를 끓이며 식사를 준비할 때 언제나 두 분을 떠올린다. 주말이나 휴일에는 남편 손에 먹거리를 들려 보내기도 하지만 드시는 양이 예전만 못하다. 같은 공간에 머물며 나누는 사소한 대화, 눈에 보일 때 드시는 음식, TV에서 들려오는 요즘 세상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들이 노인에게 얼마나 큰 기쁨과 의지가 될까?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퇴근 후 그냥 지친 몸을 어쩌지 못한다. 당장 뾰족한 방법이 없다. 아니 집으로 모실 용기가 생기지 않으니 그저 머물러 있을 뿐이다.


 남편이 그렇게 하자고 나서지도, 시부모님이 함께 살고 싶다고 제안하지도 않았지만 내 마음은 여전히 무겁다. 큰아들 집 곁으로 이사를 권유한 사람이 아들이 아닌 정작 며느리, 나였기 때문일까? 딸이 아닌 며느리가 어쩜 그리 고마운 선택을 했을까,라는 주위 칭찬에 대한 찔림에서 오는 것일까? 딸이 아닌 며느리의 한계일까? 연로한 두 분을 가까이 모셔 놓고 살뜰히 보살피지 못한다는 자책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며칠을 들르지 못하면 심지어 방임한 느낌까지 들어 마음은 무거워질 때로 무거워지는데도 발길은 쉬이 향하지 않는다.


 결혼 후 남들처럼 살아오면서 섭섭한 일도, 아픈 일도 많았지만 두 분과의 추억 속에는 대부분 따스한 장면이 많다. 온화하고 다정한 두 분의 성정처럼! 흔하디 흔한 고부간의 갈등 이야기에서 조금이라도 자유롭다면 그것은 까칠한 나를 품어 낸 시부모님의 부드러움 덕분이라 생각하며 지내 온 지... 어느덧 30년이 되었다. 어머님이 지금의 꼭 내 나이였을 때 두 분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관계는 익을 대로 익어 모녀와 고부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진한 곰국이 되었다.

 오빠를 잃고 슬픔에 빠진 20대 어린 나에게 아버님은 '네 걱정에 어젯밤 잠을 이루지 못했다'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고, 아들 생일을 축하하러 오신 어머님은 몇 만 원을 손에 얹어 주시며 '사돈 영전에 꽃 한 송이라도 올려드려라'며 남편과 한 날인, 돌아가신 엄마의 생일을 챙겨 주셨다. 시부모님의 따뜻한 한 마디에 원가족을 모두 잃은 슬픔, 평생을 괴롭히는 편두통 등을 이겨낼 용기를 얻었고, 때로는 어둠 속의 두려움과 일상의 고단함을 물리칠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온화한 말투와 선한 마음으로 헤아리고 품어주시는 그 미소가 나를 웃게 하였다. 나를 따스하게 아껴주고, 사랑해 주시는 분들이 마음의 거리뿐만 아니라 물리적 거리까지 좁힌 것이다. 나를 인간적으로 애정하셨던 그분들이기에 며느리로서의 고민이 시작되었으리라.


 12년 간 투병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엄마를 생각한다. 미안함과 후회가 크지만 봉양과 간병이 절대 쉽지 않음을 알기에, 앞으로 거동과 식사가 더 힘들어질 시부모님의 앞날을 떠올리기에 가엾고 짠한 마음이 가득하다. 그분들의 모습이 곧 다가올 나의 모습이며 그래서 인생의 슬픔과 무상함을 더 느끼기에 마주하기가 겁난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시부모님의 노쇠함과 생로병사의 끝을 지켜보는 일이 수고롭고 두렵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우리 모두 가야 할 길이고, 누구라도 짊어질 일인 것을. 내일은 꼭 들러 얼굴 뵈리라 생각하며 노인용 영양식품을 주문하고, 냉동실에서 얼린 사골 육수를 꺼낸다. 아프고 두렵고 걱정되는 큰일이지만 오늘 할 수 있는 최선을 찾으며 하루를 보내고 맞이할 수밖에! 시부모님이 천천히 늙으시기를, 좀 더 많이 웃으시고 마음에 평화가 깃들기를 기원하오늘의 마음을 다독인다.

 '이해경' 화가님의 그림 덕분에 내 글이 예쁘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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