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살이 10일 즈음됐을 때(글 쓰는 지금 13일 차), 문득 스스로에게 궁금해졌다.
왜 하필 제주야?
꼭 제주도에서만 여행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한 달 꼬박 제주도에만 있을 이유도 딱히 없었는데, 깊은 고민도 하지 않고 무려 퇴사 두 달 전에 제주 한 달 살기를 확정해버렸다. 제주 살이를 시작하는 첫날, 숙소 사장님도 의아하다는 듯이 물어봤다. 보통, 한 달씩이나 숙소를 예약하면 이것저것 많이 물어보는데 손님은 너무 쿨하게 아무 질문 없이 예약해서 놀라웠다며. 나는 숙소를 지인에게 추천받아서 따로 여쭤볼 게 없었다고 했지만, 사실은 그냥 이것저것 재고 따지기가 너무 지겨웠다.(물론, 살짝 추천받은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각종 설명 하나도 안 듣고 그냥 이름만 들은 거)
숙소를 예약하던 날, 정말 충동적으로 예약했다. 막연하게 제주도 한 달 살이를 해보고 싶다고만 생각하다가 퇴사를 결심하고 나니 이때가 아니면 언제 또 해보겠나 싶었다. 매번 깊이 재고 따지고 고민만 하다가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고 또 후회하는 게 싫어서, 에어비앤비 이곳저곳을 알아보다 30분 만에 예약해버렸다. 그리고 비행기표도 뚝딱. 그때의 나는 무슨 마음이었을까.
되돌아보면, 내 인생 자체가 후회의 연속이었다. 고민만 하다가 좋은 기회, 시간들 다 놓치고 얼마 되지도 않는 관계 속에서도 버거워하면서 스트레스받고, 맨날 호구처럼 남 생각해주다가 뒤통수 세게 맞고. 당장 나 혼자 잘 살기도 힘든데 맨날 뭘 그렇게 남들 오지게 챙겨주느라 정신없었을까. 한껏 남들 위로해주고 남한테 퍼줄 시간에 내 감정이나 제대로 챙길 것이지. 왜 항상 같은 패턴일까. 이래서 나 같은 사람은 연애도 하면 안 된다. 지금 같은 상태면 나한테 전혀 득 될 게 없으니까. 이쯤 되면 '나이스 가이 콤플렉스' 따위는 버릴 때도 됐을 텐데. 그거 관계에 있어서 전혀 도움 따위 되지 않는다는 걸, 이쯤 되면 뼈저리게 깨달을 때도 됐는데.
지난 3년 동안 내가 어떤 사람이었나 생각해보니 나도 참 어지간히 예민한 사람이더라. 나는 같이 일할 때 극도로 예민하고 감정적인 사람을 싫어했는데 내가 딱 그런 유형이었다. 말로는 '불만, 화나는 거 다 얘기하세요!', 해놓고 정작 내가 제일 못했다. 특히, 리더가 싫은 소리를 못해서 맨날 혼자 끙끙대며 살았으니 탈이 안 날 리가 있나. 싫은 소리 못하니 속에 화가 쌓이고 그 감정은 넘쳐서 주위 분위기로 퍼진다. 마치 악취가 공기 중에 퍼지는 것처럼. 그래서 내가 가끔은 미드 '뉴스룸' 스탭들이 부러웠다. 화를 너무 잘 내서. 난 아직도 화내는 법을 모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화내는 게 너무 서툴다. 혼자서만 부들부들. (이런 말 하면 예전 상담 선생님은 항상 화내는 '방법'따윈 없다고 하셨다. 그냥 화내면 된다고 너무 쉽게 말씀하셨지.. 그래서 맨날 나보고 찌질이라ㄱ....)
여하튼, 그래서 제주도 한 달 살기를 지르던 당시 내 마음을 유추해보면 대충 '3년 동안 마음고생했는데 내가 이 정도도 못해!' 였던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직장인들의 지름 1장이 시작된다.) 스스로에 대한 보상. 그리고 사춘기의 연장선으로 여전히 나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들이 필요했다. 특히, 퇴사 직전에는 내 취향에 대해서 더 깊이 알아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수록 무색무취의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아서 너무 서글펐다. 스스로의 취향도 잘 모르면서 어떻게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으며 나아가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까. 요즘 사람들은 얕은 콘텐츠에 대해 금방 눈치채고 외면하는 세상인데. 내가 좋아하는 건 대체 뭘까.
갑작스러운 퇴사와 제주 살이, 한편으로는 철없는 결정일 수도 있었는데 주위에서 충분히 응원받고 지지받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사람들로부터 깊이 공감받는다는 건 언제나 행복하고 복 받은 일이다. 그만큼 공감은 관계에 있어서 중요한 거니까.
남은 2주 동안 맘껏 멍-때리고 글 쓰고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