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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Z Jan 04. 2019

[발리] 여행 준비 #1

[#1. 발리 여행'은' 기획하기로 마음먹은 계기]

#Prologue


와우. 1월 1일 이다. 설레는 마음을 담아 1월 23일(D-22)에 떠나는 발리 여행을 기획해보자.


이제서라도.




#1


나는 여행 계획을 잘 세우는 편이 아니다. 계획이 없는 여행지의 시간과 공간에서 아직 만나보지 않은 이야기를 찾는데 집중하고 싶다. 하지만 여행을 준비하다 정신을 퍼뜩 차려보면 '이건 꼭, 여기는 꼭, 면세점 꼭' 같은 to do/go/buy list에 잠식당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여행을 가고 싶었던 본질적인 이유는 까마득히 잊은 채, 보이지 않지만 그 어떤 규율과 규제에 갇힌 여행을 계획하고 있기에. 타인의 경험을 그대로 따라하려는 맹목성에 지극히 자연스럽고 너무나 당연하게 물드는 스스로를 믿지 못해서 계획을 세우지 않았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할 때는, 계획을 세우고 촘촘히 일정 관리하며 주어진 시간에 최선을 다해서 빈틈없이 하려고 하지만, 내 개인적인 삶의 영역에 있어서는 굳이 그러지 않았다. 계획 한다고 그대로 다 되는 것도 아니라며 체념했고, 흘러가는대로 사는 것도 내 운명이라며 합리화했다. 무엇보다 (주 52시간 근무제도 시행 전까지는) 모든 에너지를 회사에 쏟고 밤에 집으로 돌아오면 손구락 하나 까딱 할 체력도, 마음의 여력도 없었기 때문이다.




#2


그렇게 내 삶을 계획하지도 않고, 모든 에너지를 다 쏟아내야 잠에 드는 나의 일상을 정리하지도 않고 지냈다. 회사 - 운동 - 집 - 또는 피아노 학원 / 동호회 모임 / 친구들 약속 / 회식 / 데이트(가끔) - 들로 연명하는 하루살이의 삶 X 365일. 그렇게 지내다가.. 조짐은 있었지만 정말 예기치 않은 타이밍에, 크리스마스 5일 전에 남자친구와 헤어지게 되었다. 원하지는 않았지만, 혼자 있고, 혼자 버티고, 혼자 생각하고, 혼자 잘 지내야만 하는 시간이 생겼다.




한껏 추워진 마음으로 관계를 정리하는 고요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움을 완전히 떨쳐내고자, 혹시나 내가 술먹고 전화할까 싶어 헤어질 수 밖에 없었던 근본 원인 찾기에 몰두했다. 나와 상대방의 애착유형을 분석해서 어느정도 납득할만한 답을 찾아내고, 상자마다 정갈한 마음으로 추억과 눈물을 고이 담아 정리했다. 그러다 시간이 풍족해서, 자연스레 나의 2018년도 정리해보려고 했더니 막막했다.




왜 나의 2018년은 나에게 아무런 느낌도, 성찰도 시사하지 못할까. 흘러가는 크로노스(Chronos)의 시간 속에 나를 방치한 것이 속상했다. 정말 많은 일들이 나에게 닥쳐왔는데. 회사에서 업무 성과도 좋았는데. 추워도 더워도 무언가 배우러 열심히 였는데. 그 와중에 소개팅도 연애도 열심히 했는데. 돌아보니 뚜렷한 방향성이나 목표 설정이 비어있어서 손에 쥐면 모두 흘려버리는 모래알 같은 일상들이었다. 일이 닥치면 그냥 쳐내고 숨 돌리고 다른 일을 쳐냈다. 그래서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나보다. 기계적인 활동으로 일상을 꾸렸더니, 남는 것은 마모된 기계뿐.




#3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정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내 일상과 삶에 대해서. 끊어내는 정리가 아니라, 성찰하고 한 걸음 내딛을 수 있는 정리를. 정리와 계획, 그리고 기획은 맞닿아 있다. 이삿짐이든 눈에 보이지 않는 일상이든 정리된 후에는 덩어리를 보관할 분류된 공간이 필요하다. 공간을 분류할 때는 이름과 순서를 부여하면 좋다. 이것이 계획이다. 공간의 이름은 색 분류여도 좋고, 공간의 의미를 자신의 관점으로 훌륭하게 풀어낸 철학자들, 혹은 지덕체라는 고전적 분류법 이어도 좋다. 서재는 소크라테스나 데카르트, 침실은 에리히 프롬, 이런식으로. 그 이름을 무엇으로 할지, 어떤 테마로 방향을 잡을지 고민하는 것, 그것이 기획이다.




#4


이번 여행에서는 시계를 가급적 보지 않아도 충만할 수 있는, 아무도 정형화 할 수 없는 시간을 보내고 싶다. 체험(서핑, 요가, 명상)과 경험, 사람과 음식, 공기와 바람, 음악과 글귀로 가득한 카이로스(Kairos)의 시간을 보내고 그 순간을 오랫동안 간직하는 것이 이번 여행의 목표이다. 목적은 조금 더 넓고 여유있는 마음을 되찾아 와서 다른 사람을 더 품어줄 수 있는 자아로 성장하는 것 하나. 그리고 2019년의 365일을 알알이 간직할 수 있도록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테마를 기획하는것 둘.


여행지에서 느끼고 반응하는 찰나의 순간들로 여행의 목적을 이루어가는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생성된 이야기가 조금 더 특별한 구석이 있다고 이미지화 하고 그 기억을 끄집어낼 수 있는 앵커를 만든다. 음악, 서적, 글귀, 내음, 향기, 물건, 사진, 글 등으로. 그 특별한 구석이 장기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에게는 꽤 도움이 되니까. 능동적으로 추억을 끄집어내려면 무엇이든 연결고리가 필요하다. 그래서 그 때 그 여행을 소환할 수 있는 나만의 앵커를 알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Epilogue


숨이 차오르면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내 마음의 여유, 번잡하게 매몰되는 삶에서 스스로 치유하고 온전하게 살아가려는 의지, 2019년을 살아갈 내 마음의 안식처, 퀘렌시아(Querencia)를 갖는 일이 이번 발리 여행의 기획 테마이다. 그리고 일상이라는 여행을 떠나기 위해 설레는 마음으로 삶으로 돌아오는 채비 하기.




#용어


. 카이로스(Kairos) : 주체가 상황이나 대상에 따라 다르게 느끼는 상대적인 시간 개념,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한 시간도 10분 처럼 느껴지는 찰나의 시간


. 크로노스(Chronos) : 주체에 상관없이 모두가 동일하게 느끼는 절대적인 시간 개념, 봄/여름/가을/겨울, 초/분/시 단위로 지나가는 시간


. 퀘렌시아(Querencia) : 나 자신으로 통하는 본연의 자리, 세상과 마주할 힘을 얻을 장소. 내면세계의 안식처를 발견하는 그 시간들이 모두 퀘렌시아이다.좋아하는 공간, 가슴뛰는 일을 하는 시간,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 이 모두가 우리 삶에 퀘렌시아의 역할을 한다. 소음으로부터 벗어난 곳에서의 명상과 피정, 기도와 묵상의 시간, 하루 일과를 마치고 평화로운 음악이나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는 밤. 「새는 날아가면서 뒤돌아보지 않는다, 14p, 류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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