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1/3
지난 "내가 토익을 좋아하는 세 가지 이유"를 쓸 때에는 토익 강의를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객관적인 입장으로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이 글은 매우 객관적이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2020년 3월 9일부터 다시 토익 강의를 시작했기 때문. 코로나만큼 계획에 없던 일이지만 그래도 이왕 다시 시작한 김에 초심으로 돌아가 열심히 해보련다. (혹시 원장님이 이 글을 보실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실 이렇게 강의를 쉬고 다시 시작하는 게 처음은 아니다. 2013년에도 한 1년 정도 학원 강의를 쉬고 영상 회사에서 일을 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14년에 다시 같은 학원으로 재입사를 했다. 2018년 10월에 다시 퇴사를 하고 2020년 3월에 또 재입사를 했다. 그러니까 나는 같은 학원에서 두 번 퇴사하고 세 번 입사했다. (다시 한번 학원 관계자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013년과 2018년에 나는 왜 퇴사했을까? 직장인의 3, 6, 9병 - 3년 차, 9년 차 위기였던 걸까? 내가 그때 당시 그만두었던 이유를 되짚어보며 '내가 토익을 싫어하는 세 가지 이유'를 이야기해보련다.
1. 만점이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처음부터 토익을 잘했던 건 아니다. 나의 첫 토익 점수는 아마도 500점대였을 것이다. 상황에 따라 왕왕 토익 공부를 하면서 800점 중반까지 만들고, 나의 전공인 광고홍보와 관련된 회사를 들어가기 위해 취업을 준비했다. 하지만 취업은 쉽지 않았고 어찌어찌하여 토익강사가 되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https://brunch.co.kr/@life-usan/7 )
내가 토익 강의를 시작한 2008년 12월 당시 나의 토익 점수는 여전히 800점대였다. 다행히 왕기초반을 맡았기 때문에 수업 도중 내용을 몰라서 당황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내가 토익 만점이 아니라는 사실은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하게 만들었다. 살짝 과장해서 말하면, 매일 눈 뜰 때부터 눈 감을 때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24/7 오로지 토익 생각만 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도 아니다. 오히려 내가 나서서 과노동을 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도 학원에 가서 강의 준비를 했고 출퇴근할 때도 언제나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조금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약간 재미도 있었다. 복잡한 문법과 어휘를 이해하고 나만의 강의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것이 마치 게임에서 한 판, 한 판 깨면서 다음 레벨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2013년에 처음으로 퇴사를 결심했을 무렵, 나의 토익 점수는 만점이었고 가장 높은 레벨의 반을 맡고 있었다. 토익 시험도, 토익 수업도 어렵지 느껴지지 않았다. 도파민과 세로토닌이 예전만큼 생성되지 않는 듯했다. 그러던 중, 영상 제작에 대해 알게 되었다. 끝판왕이 없는 완전 새로운 세계였다. 오랜 고민 끝에 퇴사를 결심했다. 당시 나는 3년 차였다.
2. 답이 정해져 있다.
2016년 5월 신토익이라는 이름으로 토익이 전면 개정되었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언어도 변하듯 토익도 변했다. 하지만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않았다. 토익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공명정대하고 대공지평하다.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하거나 불편하게 만들지 않는다. 문제가 생겨도 2분안에 해결한다. 그것도 모두에게 좋은 쪽으로. 그들은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그 선을 늘 지키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와 글은 항상 예측가능하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만일 그렇다면 아마도 정치적으로 가장 올바른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나는 비교적 새로운 것에서 매력과 재미를 느끼는 편인데, 이런 내가 늘 답이 정해져 있는 토익을 업으로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나름의 대안책으로 2012년 국내 최초 토익 팟캐스트를 만들었다. 그것도 영상으로!
하지만 팟캐스트 영상 제작도 본질적인 해결책은 아니었다. 역시 나는 재미있는 일을 해야 돼!라고 생각하며 2018년 두 번째 퇴사를 했다. 그러나 코로나와 같은 예정에 없던 일들이 일어났고 결국 나는 2020년 세 번째 입사를 했다.
3. 빠져나올 수 없다.
토익에서 빠져나오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1982년 한국에서 첫 토익이 시행된 이래, 2020년 현재까지도 많은 기업과 학교, 단체에서 토익 점수를 요구하고 있다. 게다가 토익 점수의 유효기간이 2년이다 보니 대부분 토익 시험을 살면서 딱 한 번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좋은 점수를 받는다고 해도 짧게는 2년, 길게는 10년마다 한 번 씩 갱신을 해야 한다. 그만큼 수요가 늘 있는 시험이기 때문에 토익시장은 망하지 않는다. 그래서 수험자의 입장에서도, 강사의 입장에서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다.
내 인생의 약 1/3을 함께 한 토익.
그를 사랑하기도 하지만 증오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나는 지금 토익강사이다.
그러니 조금 덜 미워하고 조금 더 좋아해야겠다.
(싫어하는 이유를 더 썼다가는 3번째 퇴사를 할 것 같아 여기서 급하게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