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SOL
가산 디지털단지의 온라인 교육 회사 생활에 찌들어있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친구들과 네이트온에서 만나 소소하게 회사 욕을 하고 있었는데, 광고 회사에 다니던 한 친구가 나에게 앞으로도 계속 영어 교육 관련 커리어를 쌓을 거냐고 물었다. 사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영어 관련 일은 나의 생계를 위한 짧은 기간 동안의 임시직과 같은 것이었고, 분명 언젠가 세상을 놀라게 할 카피라이터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카피라이팅 실력도 크리에이티비티도 없었다. 게다가 광고회사에 들어갈만한 공모전 수상 경력이나 어학연수, 유학, 인턴 경험도 없었다. 그 와중에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여러 광고회사와 기업에 열심히 이력서를 제출했다. 무스펙인 나에게 돌아오는 것은 더 좋은 인연으로 다음 기회에 만나자는 답장뿐이었다. 하지만 워낙 감정의 오르내림이 크지 않고, '언젠가 되겠지, 날 안 뽑은 니들이 후회할 거다'라고 생각하는 타입이라, 크게 상심하거나 우울해하지는 않았다. 그저 발표 당일 한두 시간 정도의 기분 나쁨이 다였다. 그리고 나는 보통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이 풀리지 않으면 똑같은 방법으로 여러 번 시도하기보다 차선책을 찾는 편이다. 그래서 그때도 자꾸만 떨어지는 광고회사는 일단 보류해놓고 영어교육 관련 일을 하고 있으니 이거부터 먼저 발전시켜보자는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친구는 나에게 테솔* 자격증이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그때까지 나는 테솔이 뭔지도 몰랐다. 그 친구의 말을 듣고 나서 알게 되어 결국 등록까지 이어졌다. 이제와 생각해보면 그 친구에게 진심으로 고맙다. 테솔 자격증 덕분에 종로 YBM에서 토익 강의도 하고, 커밍아웃도 하고, 책도 쓰고, 유튜브도 시작했기 때문이다. 관련 이야기는 차차 하기로.
친구가 소개해준 테솔은 숙명여대 테솔이었다. 테솔(TESOL, Teaching English to Speakers of Other Languages 영어를 모국어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방법(교수법)- wikipedia) 과정은 숙명여대, 한국외대, 이화여대 등의 대학원에서 진행되며 자격증 수료, 석사, 박사 과정이 있다. 나는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던 2008년에 숙명여대 테솔 과정에 지원했고,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때 당시에는 숙대에서 만든 MATE라는 영어 말하기/작문 시험을 보고 어느 정도의 점수가 나와야 테솔 과정에 등록할 수 있었다. 사실 난 지원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시험이라니! 게다가 400만 원 정도의 등록금이라니! 이 사실을 알게 된 당일 반나절 정도 충격과 걱정의 시간을 보낸 후, 방법을 모색했다. 그래도 나름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학비 걱정보다는 시험 걱정이 앞섰다. 그때 나의 토익 점수는 800점대였고, 토익 외에 다른 영어시험을 준비해 본 적이 없었다. 앞서 말했듯이 MATE 시험은 토익에서 다루는 리스닝/리딩 평가가 아닌 작문/말하기 평가이다. 작문은 대학교 때 두 학기 연속으로 들었던, 호랑이 교수님께 들었던 영작문 시간에 정말 열심히 했던 터라 조금은 안심이 됐지만, 말하기는 자신이 없었다. 영어 말하기가 나에게 어려운 이유는 많지만, 내 말투와 목소리에도 그 이유가 있다. 나는 말을 할 때 단어와 단어 사이를 뚝뚝 끊으면서 말하는 타입이다. 말이 물 흐르듯 흘러가지 않는다. 게다가 목소리도 비교적 저음에 오르내림이 크지 않아, 억양과 강세, 연음 등이 두드러지지 않는 편이다. (실제로 테솔 과정 중에도 전달력이 떨어지는 말투라고 원어민 교수님께 지적당한 적이 있었다.) 물론 내가 노력했다면 하이톤의 감정이 단어마다 느껴지는 원어민 느낌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엔 시간과 의지가 부족했다.
예상했던 대로 MATE 작문 시험은 잘 봤다. 컴퓨터실에서 주어진 주제로 글을 입력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말하기 시험은 컴퓨터실에서 보는 게 아니었다. 컴퓨터가 아닌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내향적인 나는 낯선 사람에게 말하는 것보다 컴퓨터에게 말하는 게 훨씬 마음이 편하다. 강의를 할 때도 사람들 앞에서 하는 것보다 카메라 앞에서 하는 게 긴장이 덜 된다. 이런 나에게 3:3 말하기 시험은 꽤나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세 명의 지원자가 세 명의 면접관 앞에 동그랗게 앉아 특정 주제에 대해 수다를 떤다. 면접관은 끼어들지 않고 지원자들끼리만 이야기한다. 그 모습을 세 명의 면접관이 지켜보며 점수를 매긴다. 내향적인 나는 낯을 좀 가리는 편이고, 남의 말을 자르기 싫어하며, 여러 사람이 있는 자리에서 먼저 나서는 것이 어렵다. 이런 나에게 테솔 말하기 시험은 최악의 환경이었다. 예상대로 나를 제외한 두 명의 지원자가 하이톤의 원어민 느낌이 물씬 나는 억양과 발음으로 쉬지 않고 이야기를 했다. 한 명은 거의 모든 문장을 “Actually”로 시작했고, 다른 한 명은 모든 문장을 “as well.”로 끝냈다. 내 기억에 나는 시험 시간의 10% 정도를 이야기한 것 같고, 그 둘이 45%씩 나눠 가진 듯했다. 시험이 끝난 후 떨어질 것을 예상했다. 하지만 합격했다는 통보가 왔다. 나의 10% 가능성을 봐준 세 분의 면접관에게 지금도 고마울 따름이다.
2008년 가을학기 SMU-TESOL(숙명여대 테솔)은 어린이 대상 교수법과 성인 대상 교수법,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 방식이었고 나는 당연히 성인 대상 반을 선택했다. (첫 직장 ‘보습학원’ 이야기를 참고하세요) 수업은 아침 9시부터 시작했다. 기본적인 교수법에서부터 다양한 문화적 배경에서의 소통법, 언어학, 음성학까지 내가 앞으로 영어 강의를 하는데에 있어 필요한 교수법을 광범위하면서 심도 깊게 배웠다. 다시 말해, 너무 빡셌다. 과제와 발표가 너무너무 많았다. 회사는 오후 출근이었기 때문에 일을 하면서 동시에 테솔 과정을 들으려고 했지만, 그때 당시 나는 강서구 끝자락에 살고 있었고 회사는 가산 디지털단지, 학교는 숙명여대였다. 하루에 이동만 두세 시간 걸렸고 환승도 두세 번씩 해야 했다. 결국 난 회사를 포기하고 테솔에 전념하기로 했다.
5개월의 코피 나는 과정을 마치고 무사히 수료증을 받았다. 그리고 마지막에 진행된 취업박람회에서 만난 한 사람으로 인해, 내 인생을 이전에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원어민 교수님들은 ‘테솔’보다는 ‘티쏠’에 가까운 발음을 했지만 편의상 ‘테솔’이라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