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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산 Dec 24. 2019

나는 잘한다고 생각하는데 못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기분 나쁘다

Slightly Frowning Face, emojipedia.org

2008년 11월, 숙명여대 TESOL 과정이 거의 마무리가 되고 학사 일정 중 하나인 Job Fair 취업박람회가 있는 날이었다.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이라 선명하게 기억나진 않지만, 그날 아마도 나는 의상 선택에 꽤 신경을 썼던 것 같다. 회사도 관둔 상태였고 함께 TESOL 과정을 들었던 사람들처럼 나도 취업을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취업박람회에 올 이름 모를 고용주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


박람회는 크게 두 세션으로 나뉘어서 진행되었는데, 하나는 큰 행사장에서 여러 교육 기업 부스를 돌아다니며 취업 상담이나 즉석 면접을 보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강의실에서 특정 기업 담당자의 설명을 듣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강의실에서 담당자에게 기업에 대한 설명을 듣는 게 행사장에서 듣는 것보다 더 집중도 잘 되고 다른 기업보다 더 가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그런 느낌을 어떻게든 주려는 것 같았다. 강의실에서 설명을 한 A교육은 영어교육 전문기업이었다. A교육은 자산규모가 500억이 넘고 100개 이상의 초중고등 대상 캠퍼스를 운영하고 있다.(2019년 3분기 기준)

많은 기업홍보 담당자가 그러하듯, A교육 담당자도 대한민국에서 A교육이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난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만큼 A교육에서 운영하는 A학원도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라는 뉘앙스도 풍겼다. 여기서 '아무나'는 학원 수강생도 의미하지만, 강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사실 나는 그런 콧대 높은 학원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강의실에 앉아 설명을 듣던 대다수의 TESOL 수료자들이 A교육에 당장이라도 지원할 태세였다. 아무것도 모르던 스물넷 취준생이 대세를 어찌 거스를 수 있겠는가. 결국 나를 포함한 거의 모두는 A교육에 입사지원서를 제출했다.


A교육에만 올인할 수 없으니 행사장에 있던 다른 부스에도 들러 지원서를 작성하고 안내서를 챙겼다. 기업과 학원 담당자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 그날 내가 지원한 기업과 학원은 5곳 정도였고 그 후 면접을 보자고 연락 온 곳은 2곳이었다. A교육과 테스트와이즈 어학원이라는 곳이었다. A교육 인사 담당자는 나에게 면접으로 보기 위해 어느 신도시에 있는 A학원으로 가라고 했다. 어느 신도시는 분당 아니면 일산일 것으로 추측하는데, 지금이야 이 두 곳을 정확히 구분하지만 스물넷의 나에게는 A학원도 신도시도, 구직활동이 전부 생소했고 생경했다.

A학원 면접날, 어느 신도시의 지하철역에 내려 학원 쪽으로 향했다. 학원이 있는 건물의 1층에 매우 큰 메르세데스-벤츠 전시장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어쩌면 렉서스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건물이었다. 담당자의 안내를 받아 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규모의 회의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차가운 표정의 실장님이 오셔서 내게 준비한 시범강의를 시작해보라고 했다. 어색한 구두를 신은 나는 교단으로 올라가 마커를 잡았다.

내가 대학교 4년 동안 가장 많이 했던 것은 발표 준비였고, 4학년 2학기 홍보 영어 교수님께서는 내 발표를 들으시고 대치동 족집게 강사 같다고 하셨었다. TESOL 과정 중에도 동기들이 나의 발표에 대해 좋은 말을 많이 해주었다. 나는 발표에 자신 있었다. 나는 내가 발표를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발표와 강의는 다르지만, 발표력을 기반으로 열심히 준비한 만큼 강의도 잘할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이전 보습학원이나 공부방에서의 강의 경력도 있었기 때문에 나 자신을 믿으며 실장님 앞에서 나의 강의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 와중에 약간의 유머도 섞어가면서 강의했다. 물론 실장님은 조금도 웃지 않았다.


10분 정도의 발표가 끝나고 실장님이 점수표처럼 생긴 서류에 무언가를 바쁘게 체크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나에게 강의가 나쁘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했지만 기분이 좋지 않았다. 잘했다거나 좋았다는 말을 기대했는데 나쁘지 않다고 하니 내가 어떤 기준에 미치지 못한 느낌이었다. 자신감에 가득 차 있던 나에게 나쁘지 않다는 평가는 매우 자존심 상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날 내가 들었던 말 중에 나쁘지 않다는 말이 결과적으로는 제일 좋은 말이었다. 실장님은 나의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내가 왜 A학원과 맞지 않는 사람인지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자세, 눈빛, 목소리, 톤, 억양, 발음, 손짓, 판서 하나하나 자세히도 집어냈다. 상체가 너무 칠판 쪽으로 향해있어 학생들이 수업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니 좀 더 학생 쪽으로 서야 한다고 했다. 시선은 지금보다 좀 더 위를 봐야 하고, 목소리는 더 높게, 발음을 더 유창하게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듣고 있자니 솔직히 말해 기분이 더러웠다. 아니, 드러웠다.


나는 내가 정말 잘한다고,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걸 평가하는 사람이 못한다고, 못했다고 말했다. 그렇다. 나는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못하는 사람이었고 그날 나는 정말 못했다. 실장님이 얼마나 많은 강사들을 봐왔겠는가. 성공적인 강사의 특징을 초보 강사들에게도 알려주려는 실장님의 마음, 충분히 알 것 같다. 그리고 사실 그게 실장님의 역할이다. 좋게 말하면 강사들에게 현실조언을 해주는 것, 안 좋게 말하면 강사들의 기를 누르는 것.


하지만 그날 나에겐 둘 다 실패했다. 실장님의 현실조언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내 기도 눌리지 않았다. 오히려 작용-반작용의 힘을 갖게 되었다. 실장님이 쓴소리를 하는 내내 나는 생각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학원에 다시는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실장님이 지적한 나의 자세나 목소리를 바꾸지 않을 것이라고. 어차피 실장님은 A학원 강사라는 틀에 맞춰 나를 재단하려 한 것이니까 내가 그 틀에 맞지 않는다고 슬퍼하거나 좌절하고, 억지로 끼워 맞추려고 애써 노력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왜냐하면 너무 기분이 나빴기 때문에.


내가 그날 못한 건 그 학원에서 원하는 강사처럼 하지 못한 것뿐이었다. 나머지 모든 것은 다 잘했다. 새로운 도시에서의 차가운 경험, 실장님과 학원 수강생들의 무표정 하나하나 이제와 생각해보면 소중한 경험이고 잊지 못할 학습이다. 그날 시강(시범강의)은 잘하고 또 잘한 일이었다.


실장님은 강사 평가서를 챙겨나가며 마지막으로 나에게 선생님은 중고등 대상이 아닌 성인 대상을 하시면 잘할 거라고 했다. 그렇게 탈락을 암시했고 정말로 그 이후 학원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나는 실장님의 말대로 성인 대상 어학원의 토익강사로 일하게 되었고, 그 일을 10년이나 하게 될 줄은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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