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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이 Jan 29. 2020

"누군가 성추행당했다는데... 그게 너니?"

나의 첫 직장은 방송 프로그램을 만드는 외주제작사였다. 막내 방송작가의 일은 고되기도 하고, 신나기도 했다. 특히 PD와 작가가 함께 가는 취재일정은 여행 같아 처음엔 좋았다.

여행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메이트가 아니던가. 내가 싫어하는 어른들과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아야 할 경우, 정말이지 괴로웠다.


어느 날 경력은 지긋하나 우리 회사에 갓 들어온 신참 PD 아무개 씨와 함께 길을 떠났다. 그다지 먼 거리는 아니었다. 선배 작가는 일이 있다고 하여 나와 아무개 두 사람만 떠났다. 신참 PD는 회사의 돌아가는 사정이 궁금한지 여러 가지를 물어봤다. 나 또한 입사한 지 6개월쯤 지난 풋내기였지만 아는 만큼은 성심성의껏 대답했다.


취재할 곳을 방문해 영상을 찍어본 뒤 귀가하는 길, 맛있는 저녁을 사주겠다고 해 근처 고깃집에 들어갔다. PD는 고깃집에서 진짜로 물어보고 싶었던 것을 묻기 시작했다.


"얼마 전에 선배 PD가 막내작가 중 한 명에게 고백을 했다더라." 아무개 PD가 말했다.


고백이라고 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이 회사에서 처음 발각된 성추행 사건이었다. 피해자가 그 사실을 공론화하자 대부분의 여자들(팀장과 선배 작가들)은 모두 분개했다. 그리고 대표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팀장은 은연중에 가해자를 잘라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회사가 이렇게 시끄럽던 와중에 나는 신참 PD와 함께 출장을 가게 된 것이다.

신참 PD는 사건의 전말을 대충은 알고 있으나 정확히는 몰랐다. 그도 그럴 것이, 신참 PD를 이 회사에 소개한 사람이 성추행 당사자였다.


나는 신참 PD와 밥을 다 먹은 채 서울에 올라가기 위해 차를 탔다.

신참 PD는 성추행했던 당사자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피해를 본 막내작가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나는 집에 빨리 가고싶어 차를 먼저 탔고, 신참 PD는 가로등이 켜질 때까지 한참 동안 담배를 피웠다.

이윽고 차에 탄 PD는 시동을 켜지 않은 채 물었다.


"성추행당했다는 애... C이니?" "아니요"

"그럼 D?" "아니요"

"그럼 B?" "아니요"


"그럼... 혹시 너니?"

"아니요. 물으셔도 저는 말해드릴 수가 없어요."

나는 표정관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깊은 밤의 어둠이 나의 매서운 눈길을 가려주길 바랐다.


신참 PD의 호기심이 이해되긴 했지만 역겨웠다.


성추행 피해자로 오인되는 것이 메스꺼웠다. 무언가 떳떳하기 위하여 발버둥 치고 싶었다. '내가 아니라 걔라고 말하고 싶은 심정'에 구역질이 났다. 그렇지만 이미 나는 회사라는 작은 사회에서 피해자와 동일한 위치에 놓인 구성원이었다.


나는 '혹시 너니?'라는 질문으로 이 사회에 속한 나의 위치를 정확히 깨달았다. 개인적으로는 불쾌하고 역겨우며 생경한 일이었지만 사회에서는 오랫동안 물흐르듯 계속되어 온 자연스러운 입장 차이였다.


출장을 마친 뒤 나는 이 대화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서 목욕을 했다. 꼼꼼히 깨끗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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