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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RST Jul 16. 2020

불행을 피하는 것,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김영민 교수의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를 오독하다.

대학원생과 회사원들이 같이 있었던 모임이 있었다.


대학원생 친구들은 시도 때도 없이 대학원생이라는 자신의 신분, 또한 돈이 안된다는 자신의 전공을 자조하며 자학개그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회사원들과 달리 생업전선에 뛰어들지 않은 자신들의 어떠한 '순수함'을 은근히 과시하고는 했다. 어쩌면 나의 괜한 피해의식일지도 모르지.




읽다 보면 그야말로 박식함이 느껴지고, 소위 '글빨'이 느껴지는 김영민 교수의 이 책을 읽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가방끈 긴 자들과 장시간 대화할 때의 어떤 기시감을 느꼈다. 너무 삐딱한 생각일까?


사실 너무 폄하했다고는 생각이 들지만. 밥벌이를 위해 치열하게 살아보지 않은 자들에게서 느껴지는 지나치게 깔끔한 냄새,


허허실실 도인 같은 속세를 벗어난 느낌들. 과시하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느껴지는 엘리트스러운 냄새.




글에 녹아있는 작가의 인생관과 행복에 대한 철학들은 전체적으로 불행을 피하는 방법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 같다.


톤이 어둡지는 않지만 궁극적으로는 행복에 대하여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느낌. 크게 기대하지 않고, 크게 실망하지 않는 중용의 미덕.


묘한 밸런스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작가의 완성된 인생관을 볼 수 있었다.




작가는 그렇다 치고, 나는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이 질문에 대해서 사실상 자주 생각하지 못한다. 


질문을 바꾸어 내일, 혹은 한 달 뒤 죽는다면 무엇을 오늘 해야 할까?라는 조건을 붙인다면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을 해볼 수 있겠지.




나는 학자가 아니고, 나의 일상은 작가의 일상보다 격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마치 궁극적인 행복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다는 것처럼, 불행을 피하고 소소한 연민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작가의 인생관은 내게는 조금 소극적으로 느껴진다.


바쁜 일상에 치이는 현대인은 약해지기 쉽다. 그들의 운명은 열심히 주도권을 가지려 싸우지 않으면 가족, 친구, 직장상사 등의 타인에 의하여 좌지우지되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외부의 불리한 환경에 대응하기 위하여는, 작가의 인생관보다 더 적극적인 대응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행복할 수 있을 만큼 맘껏 행복해하고, 때로 슬퍼하고 좌절할 수 있을 만큼 또 슬퍼할 수 있는 것.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낮은 텐션으로 지내기보다는 상처 받을 수 있더라도 에너지를 다 하는 것. 


그것도 현명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내 생활이 그렇지는 못하지만. 




책 후반부의 인터뷰에서 작가는 '학생들에게 반문을 자주 하는 편이고, 사상 공부에 필요한 방식'이라고 언급하는데,


어쩌면 나도 자연스럽게 작가의 학생이 되어 책 속에서 문답을 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책을 읽으면서 정치 관련 칼럼을 빼고는 재미있게 읽었는데, 이리도 삐딱한 글이 나오는 것은 오히려 내가 작가의 어떤 방대하고, 압도적이고, 완성된 사상에 압도당하였기 때문이 아닐까?


그런 방어기제라면 그다지 멋있는 그림은 아니지만.




작가의 교토 기행에는 금각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진짜' 금각사는 이미 불타 없어졌다. 찾아가더라도 그 금각사는 당신이 아는 금각사가 아니니, 차라리 은각사를 가는 게 낫다는 결론.


그 결론을 나는 이렇게 수정하고 싶다 - 금각사든 은각사든 뭐든 전부 가보고, 어땠는지에 대한 의미부여는 내가 직접 해 보이고 싶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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