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테리 Nov 22. 2021

우울증이 그냥 기분 탓이라고요?

"파이팅!"이라고 말하지 마세요.

내가 우울증을 경험하기 전에 속을 터놓고 지냈던 친한 그녀가 먼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어느 날 그녀를 만났던 날 남들이 다 아는 패션감각 뛰어나고 옷 잘입기로 유명했던 그녀의 머리 스타일은 좌우 대칭이 전혀 안되고 마치 쥐가 파먹은 듯 영 이상한 모습이었다. 왜?라고 물어보려는 찰나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먼저 말을 꺼냈다. 실은 주말에 머리카락을 가위로 정신없이 마구 잘랐다고... 감당이 안 되는 감정에 스스로 머리카락에 자해를 한 것이란다. 뿐만 아니라 차를 몰고 도로를 달리다 갑자기 도로 한가운데 멈춰서 있었다고... 그녀의 우울증은 멋스럽고 세련된 그녀의 모든 삶을 마비시켰고 일촉즉발 위험한 순간과 위태로운 일상이 반복되다 급기야 대학병원 정신과 병동에 입원을 해야 했고 꽤 오랜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야 했다. 다행히 지금 그녀는 과거 이야기를 웃으면서 할 만큼 회복이 되었다. 그리고 많이 치료가 된 시점에 나에게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나 이제 운전도 할 수 있게 되었어" 대다수 사람들이 평범하게 생각하는 일상이 그녀에게는 특별한 감사가 된 것이다.

사실 그때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자해를 할 만큼의 감정이 무엇인지 가늠도 안되었을뿐더러 그녀를 향한 안쓰러움과 연민 뒤에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나?!라는 불편한 의구심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마 그 의구심의 저변에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할 수 있으며 극단적인 상황으로 치닫지 않도록 절제할 수 있는 능력 또한 누구에게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런데 몇 년 후 나에게 찾아온 우울증으로 삶이 장악당하고 멀쩡하게 운전을 하다가 갑자기 다리에 힘이 풀려 땅 밑으로 꺼지는듯한 아찔한 어지러움을 경험하고서야 그때의 생각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편협함이었는지를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 그녀에게 아주 많이 미안했다.

 

우울증이 찾아오는 원인은 가족 또는 사랑하는 사람의 사망, 경제적 부도, 이혼, 오랜 실업상태, 치명적인 병환, 과도한 스트레스, 목표를 향해 달려오다 맞이한 번아웃 등 사람마다 그 이유야 다르겠지만 대체로는 상실과 절망감이 그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 같다.


상실은 믿어왔고 소중했던 그 무언가를 송두리째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은 상태로 사람을 무력하게 멈춰있게 한다. 멈춰있는 이유는 멈춰있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이다. 시간을 거슬러 뒤를 돌아갈 수도, 그것이 사라진채 앞을 걸어갈 의지도 없다. 그래서 그들은 항상 과거를 헤매며 현재는 멈춰있다.

절망은 사전적 의미로 '인간이 극한 상황에 직면하여 자기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깨달았을 때의 정신 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그들에겐 희망이 없다. 그저 숨을 쉴 뿐이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이 죽음을 묵상하는 것은 뒤를 돌아서 갈 수도, 무언가를 향해 앞을 걸을 수도 없는 상태라 그럴 것이다. 그렇다고 멈춰있는 현재의 상태가 자신이 원해서가 아니므로 시공간 그 어느 곳에도 시선과 마음이 향할 곳이 없다.


혹시 사랑하는 가족 중에 지금 위중환 환자가 있다면 어떻겠는가? 맛있는 것을 먹어도, 사람들과 재미있는 수다를 떨어도, 멋진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해도 그것을 온전히 즐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생각과 마음이 온통 아픈 가족 생각으로 향해 있기에 일상에 소소한 즐거움을 향유할 수 없다.

내가 느낀 우울증이 이런 것이었다. 온통 우울한 감정이 저 밑바닥을 에워싸며 누르고 있어서 일상에 그 어떤 것도 온전히 누릴 수가 없었다. 아직도 기억이 난다. 시청역에 있는 2층 KFC에서 후배랑 점심에 햄버거를 먹으며 창문 밖 풍경을 보고 있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정이 이입되었다. '저 유모차를 끌고 가는 부부는 행복해 보인다. 나는 왜 저렇게 행복할 수 없지...' ' 저기 교복 입은 고등학생들처럼 나도 눈부시게 젊고 생기발랄할 때가 있었는데 이제 시간을 되돌릴 수가 없구나' '저 머리가 하얀 어르신은 어떤 세월을 사셨을까? 이런 상태로 긴 세월을 산다는 건 너무 괴로운 일이다 공기처럼 그냥 사라지고 싶다'

생각이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농도 깊은 우울증은 객관적이고 정상적인 사고를 멈추게 했고, 바라보는 사물과 사람 상황을 온통 회색으로 물들여놓았다.

TV에 재미있는 장면을 보고 잠시 정신을 놓고 웃고 있다가는 어김없이 우울이란 녀석이 정신 차리라는 듯 회오리를 일으키며 후려치듯 올라온다. 그 온도차와 엄습된 우울감이 무서워 나는 그 당시 예능을 보지 않았다.


우울증은 눈에 보이는 감기와는 비교도 안될 만 틈 큰 아픔이다.

그러나 감기 걸려 열나고 기침하는 사람에겐 '어서 쉬라고~ 약은 먹었냐'며 안부를 묻고 어딘가 다친 사람이 병원에 입원하는 일상의 멈춤은 그 타당성에 대해서 모두가 인정해 주지만 우울증으로 사투를 벌이고 있는 누군가는 여전히 혼자다. OECD 국가 중 자살률이 1위를 차지할 만큼 우울의 아픔이 만연한 사회지만 여전히 우울증은 감정의 영역이자 개인의 의지 문제로 치부된다.

우울증은 누군가에게 그 실체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명확하게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은 더 힘들고 외로운 질병이다.  

결코 "기운을 내야지~ 파이팅!" 한다고 괜찮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용기를 내보기로 했다. 10년 전 나처럼 우울의 늪에서 하루하루 고군분투하는 누군가에게 내가 보냈던 그 시간을 되짚으면서 희망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려고 한다.

내가 그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절실하게 했던 말이 있다. "이거 정말 괜찮아질까?" 그때는 그랬다. 이대로 영원히 우울할 것만 같았다. 절대로 괜찮아질 것 같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 누군가 내게 똑같은 질문은 한다면 이렇게 답해줄 것이다.


"믿기지 않겠지만 괜찮아져요.

이 우울의 터널을 통과하고 나면 당신 자신 역시, 이전보다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있을 거예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