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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테리 May 26. 2022

김밥을 폭식하다

화려하고 따듯한 너  

이제는 흔하고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대표 음식이 되어 그 아련한 정서가 많이 추락했지만, 한때 김밥은 오직 소풍 또는 운동회 같은 특별한 날만 먹을 수 있는 Special Food였다. 그것은 마치 어른들의 명절 음식 같은 거랄까.

김밥천국을 시작으로 김밥 전문점들이 생겨나고 이제 언제, 어디서든 가장 빠르게 한 끼 때울 수 있는 음식이 되면서 그 위상이 많이 떨어지긴 하였으나 여전히 집에서 손수 싼 김밥만큼은 사 먹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추억을 품고 있다.


아이를 낳기 전 비록 설거지가 귀찮긴 하나 반찬통이 아닌 제대로 된 그릇에 찬을 담고 상차림을 제대로 하고 먹어야지 하는 고집이란 게 있었다. 하루에 3번밖에 안 되는 그 시간만큼은 나 스스로를 대접해주자는 의미이기도 하고, 정갈한 그릇에 담긴 음식이 보기도 좋고 맛도 좋게 느껴지니까.


그러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한 생명체를 낳고부터는 그 고상한 고집은 지켜질 수 없었다. 아이를 안은채 보채는 아이를 매달고 서서 밥을 먹으려니 혹시 몰라 뜨거운 국물을 먹는 건 불가능했고, 건더기가 줄줄 흐를법한 뭐 예를 들면 콩나물 무침이나 물김치 이런 유의 음식도 먹을 수가 없었다.


3분 카레를 데워서 밥에 뻑뻑하게 비벼 먹거나, 고구마 또는 빵을 먹거나, 방울토마토 같은 것들로 끼니를 때우곤 했다.          


아~ 허기지고, 초라해

어쩌면 그때 계속 그렇게 허기 진채로 초라한 듯 먹었다면 지금 몸무게가 이지경은 아닐지도 모를 텐데...


그러다 문득 김밥이라는 녀석이 생각이 났다. 서서 돌아다니며 먹기도 좋고, 흘리지도 않고, 모양도 귀엽고 이쁘잖아. 심지어 수면부족과 외로움에 쓰러지기 직전인 나에게 어릴 적 따듯하고 설레었던 감정까지 소환시켜주는 소울푸드라니.


그리하여 남편이 아이를 봐줄 틈이 있는 주말이면 김밥을 싸기 시작했다. 전기 압력밥솥 2개로 밥을 하고, 참기름과 깨소금을 둘러 밥이 고슬고슬 식혀지는 동안 김밥 속재료를 만들면서 앞으로 빨, 주, 노, 초 아름다운 컬러들이 서로 합을 이루며 아름다운 자태로 탄생될 모습을 상상하며 그렇게 김밥을 말기 시작한다.

신기하게 김밥을 마는 동안에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아이의 징징거림에서 오는 짜증과, 독박 육아에 대한 억울함과 뚱뚱해진 나의 몸매에 대한 한탄스러움도 잊은 채, 그저 장인이 오직 그것에만 온전히 집중하듯 나는 그렇게 김밥을 싸고, 또 싸고 또 쌌다.

그렇게 싼 김밥은 언제나 20줄


김밥 레시피라는   별게 있겠냐만은 고들한 정도와 속재료의 손질 과정에서 식감은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밥은 살짝 꼬들한 정도로 하고, 딱딱한 재료는 오직 단무지만 허용할  모든 재료는 씹었는데 도드라지지 않게 대부분  익히는 편이다. 당근은 살짝 물을 첨가해 소금 간을 하고 볶아서 준비하고, 오이가 들어갈 경우  썰어서 소금 간을 해서 아삭한 상태는 없앤다. 그러면 특별히 밥에 소금을 넣지 않고 오직 참기름과 깨소금만으로 담백하고 고소하지만 입안에서 서로 씹힐 때는 도드라짐 없이  어우러져서 식감이 부드럽고 촉촉하다.


남편은 내가 싼 김밥이 그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기도 전에 자르지도 않은 통 김밥을 '아구아구" 뜯어먹는다. 나는 그것이 참으로 불만스러웠다. 일본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의 비빔밥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반찬들을 모두 넣어 비벼 먹는 것을 불쾌해한다고 했을 땐 '그게 뭐 불쾌한 일인가. 먹는 사람이 알아서 먹는 거지' 했는데 그 색색의 조화로운 모양새를 만들어내기 위해 짧지 않은 시간 공을 들인 장인의 입장에서는 그것은 불쾌한 일이 맞다.  그러기나 말기나 잠시 흔들렸던 불편한 마음을 가다듬고, 김밥을 조심스럽고 정성 어리게 자른다. 김밥을 잘라서 그릇에 담을 때마다 놀라는 것은 이건 정말 그 어떤 꽃보다 이쁘다. 이렇게 화려하게 이쁜 것이 맛도 있다니...

돌아다니면서 수시로 먹기에 뚜껑 있는 통에 담아 두어야 편하다.

맛있고 이쁜 것이 아이를 안고 청소를 하면서도, 서서 돌아다니면서도 오며 가며 먹을 수가 있으니, 이 또한 얼마나 육아 맞춤 푸드인가?! 그리고 신기한 것은 먹어도 먹어도 김밥은 잘 질리지가 않는다. 나만 그런가?

20줄을 말아먹었음에도 며칠 지나면 또 생각이 난다.


그러나 아는 사람은 안다. 김밥에 얼마나 많은 양의 밥이 들어가는지... 내가 모유수유를 할 때 주변 육아 선배들이 공통적으로 했던 말은 모유 수유하면 임신 때 쪘던 살은 금방 다 빠진다고 했다. 그래서 비록 출산 전 52KG에서 75KG까지 살이 쪘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현재 출산 후 3년이 지났지만 60KG이 넘는 몸무게가 계속 유지되고 있다. 그녀들과의 차이라면 그건 김밥의 영향도 무시 못하리라는 생각이다.


비록 김밥이 내 아름다움을 앗아갔을지라도 그때 그 시간 김밥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허기지고 초라했을까 싶다. 화려함과 따듯함으로 눈도 마음도 위로가 되어주었던 김밥.      

하지만 이제 10줄 정도로 그 양을 줄이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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