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코메디의 왕> 리뷰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관심병이 사회적 질병이 되고 있다. 사회에서,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이상 인간은 남의 관심이 일정 부분 필요하지만, 관심 받기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집착으로 발전해 버리면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게 된다. 최근 공공장소 살인을 온라인 공간에 예고하거나 실제로 저지르는 사람들 중 일부에겐 이런 관심병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풀이된다. 주목받을 수 있다면 범죄자가 되는 것도 개의치 않는 것이다.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코메디의 왕’(1983)은 관심을 향한 병적 갈망이 한 인간을 어떻게 하면 무너뜨리는지 돋보기를 들이대는 작품이다. 주인공 루퍼트 펍킨(로버트 드 니로)을 보는 등장인물들은 답답함을 느끼는데, 그건 타인의 관심을 간절히 바라는 그가 역설적으로 남에게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관심을 달라고 요구할 뿐 옆 사람 이야기를 전혀 듣지 않는 그와는 소통이 불가능하고, 관객 또한 일방향적인 그의 관심병에 진이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나는 재능 있는 인물인데, 사회에서 기회를 주지 않네”
줄거리를 살펴보자. 펍킨은 당대 최고 코미디언 제리 랭포드(제리 루이스)의 차에 무작정 뛰어든다. 코미디언으로 데뷔할 기회를 얻기 위해선 톱스타의 눈에 띄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랭포드는 펍킨이 자기 사적 공간을 침범했음에도 진심을 담아 조언해 주는데, 그건 바로 “바닥부터 시작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펍킨은 “나는 이미 서른넷”이라며 랭포드에게 자기 연기를 먼저 봐줄 것을 부탁한다.
주인공이 자기중심적 인물임을 드러내는 신(scene)이다. 연예 산업의 ‘원칙’을 이야기하는 랭포드에게 펍킨은 나이가 많다는 ‘개인 사정’을 언급한다. 자신이 뒤처지고 있다는 조급함에 남의 차에 무작정 뛰어든 것부터가 본인만 생각하는 이기적 행동이다. 여기서 랭포드는 “내 사무실로 전화해서 비서 캐시 롱을 찾으라”며 “시간을 내서 당신 연기를 보겠다”고 말하는 명백한 실수를 저지른다.
코미디언 지망생을 적당히 돌려보내려던 슈퍼 스타의 발언이 실수가 되는 이유는 그것이 펍킨의 망상을 부채질하기 때문이다. 그는 상상 속에서 이미 대스타가 됐기 때문에, 코미디 연기를 하는 대신 주로 멋지게 환호받는 연습을 한다. 또한 랭포드의 비서를 만나서 자기 연기가 담긴 비디오테이프를 전달한 뒤 당장 답을 달라며 로비에 죽치고 앉는다. 위의 두 가지 행위엔 공통점이 있는데, 그건 자기 연기를 본 사람이 극찬하고 환호할 가능성만 상정한다는 점이다. 코미디는 대중과의 ‘호흡’이 무엇보다도 중요할진대, 남의 반응을 확신한다는 것 자체가 애초 그에게 코미디언으로서 자질이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보여준다.
범죄자로 처벌받겠지만 … “하룻밤이라도 왕이 되고 싶었어”
코미디의 왕이 되겠다는 펍킨의 열망은 광기로 변질된다. 그는 랭포드의 광팬인 한 여성과 팀을 이뤄 장난감 총으로 랭포드를 위협해 납치하고 방송국에 협박 전화를 건다. 랭포드를 살리고 싶다면 자신이 당일 방송에서 코미디를 선보일 수 있게 하라는 요구다. 인명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던 경찰과 방송국은 그를 쇼에 출연시킨다. 쇼에서 연기를 선보이던 도중 그는 처벌받을 것이 분명함에도 일련의 범죄를 감행한 이유를 설명한다.
“농담한다고 생각할 테지만 제리를 납치하지 않고선 쇼에 출연할 수가 없었거든요. 내일이면 내 말이 농담이 아니고 내가 미쳤다고 생각할 거예요. 하지만 난 평생 바보로 살기보단 하룻밤이라도 왕이 되고 싶어요.”
아무리 유명해져도 강력범은 강력범일 뿐
영화의 뒷부분은 해당 사건으로 복역 후 출소한 펍킨이 그 특이한 이력으로 인해 유명 코미디언이자 작가가 됐다는 이야기를 짧게 담았다. 유명세를 얻게 된 것이 그의 망상인지 아닌지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어느 쪽으로 해석하든 공통점이 있다. 바로 펍킨은 그 결과가 나름대로 만족스러웠다는 것이다. 즉, 실제로 대스타가 됐다면 그것대로 그의 욕망이 충족됐을 것이고, 체포 후 평생을 슈퍼스타가 된 망상 속에서 살게 됐다고 하더라도 그 자신은 행복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 영화는 관심병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에 대한 경고가 된다. 사람을 납치해서 살해 협박을 하는 건 중범죄다. 결과적으로 펍킨이 전국으로 방영되는 TV프로그램에 나가는 데 성공하거나, 유명 작가가 됐더라도 그가 범죄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나 펍킨은 관심이 너무 간절한 나머지 강력범이란 인생의 오점이 남는 건 신경조차 쓰지 않게 됐다. 단 하루라도 유명해질 수 있다면 반인륜적 수단을 쓰더라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인성의 소유자가 된 건 그의 인생을 놓고 봤을 때 확실한 새드엔딩이다.
40년 전보다 더 현실적인 얘기가 돼버린 ‘코메디의 왕’
영화는 당대성을 갖기 때문에 시간이 흐를수록 리얼리티가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작품은 제작된 지 40년이 지난 지금, 더욱 현실적으로 느껴진다. 자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중범죄를 일으킨 정신 이상자 펍킨을 볼 때의 공포감은 그때나 지금이나 유사하지만, 최초 개봉 당시 펌킨을 보는 감정은 텍스트 속의 괴물을 보는 두려움에 보다 가까웠을 것이다.
반면, 지금의 관객은 이것을 보다 리얼리스틱한 공포로 느낄 환경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장난이든 실제든 공공장소 테러 예고글이 며칠 걸러 하나씩, 어떨 땐 하루에 몇 개씩 올라오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내가 아침에 출근하면서 지나쳐 온 길에서 불과 30분 차이로 묻지마 살인이 일어났다는 걸 뉴스로 확인하는 우리는, 더 이상 펍킨을 텍스트 속에 가둬두고 관망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관심 자본의 인플레이션을 꺼뜨려야 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라는 것일까. ‘코메디의 왕’에서 스코세이지는 그런 해법 같은 건 전달하지 않는다. 영화가 담은 건 사회적 메시지보다는 펍킨이라는 비범한 인물의 심리에 대한 아나토미(해부학)에 가깝다. 하지만 이 작품은 범죄자를 다루는 시선에 있어서 최근의 영화들보다 나은 면이 있는데, 그건 펍킨을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그린다는 것이다. 이건 범죄자에게 슬픈 사연이나 철학을 부여함으로써 그를 어딘가 ‘낭만적 분위기가 있는’ 인물로 그리는 요즘 스토리텔링의 경향과 거리가 있다.
https://youtu.be/0wVhCCo02P4?si=B6MPdWxmKDwdAxtW
점점 빈번해지는 ‘묻지마 범죄’와 ‘살인 예고’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도 그래야 하지 않을까. 더 신속하게 잡고 강력하게 처벌함으로써 우스운 행위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가 세상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은 아주 보잘것없음을 알려주고, 그가 받을 수 있는 관심은 동경이 아닌 오로지 조롱뿐임을 확실히 하는 것이다. 너 나 할 것 없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갖겠다고 달려드는 ‘관심 자본’에 낀 거품을 꺼뜨리고, 적정한 가치로 평가받게 하는 것이 우리가 직면한 여러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법이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