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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안을 견디는 시간 Jun 16. 2018

완전한 고을 완전한 휴식 '전북 완주'

큰 비가 한바탕 지나가고 나자 공기에선 촉촉하고 쌉쌀한 풀내음이 느껴졌다. 전북 완주군의 유일한 기차역인 삼례역에 도착한지는 오래였다. 하지만 한참을 그리워했던 이를 만난 것처럼 발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끝없이 응시하고만 있었던 그곳. 완주. 전주를 둘러싼 지형처럼 완주에는 여행자의 마음을 살포시 안아주는 넉넉한 마음이 있다. 청정한 자연과 예술의 품에서 완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 그 이름처럼 완주는 여행자에게 ‘완전한 고을’이다.



수탈의 흔적에 스며든 예술


비록 지나간 과거라고 해도 상처가 남았던 곳을 다시 돌아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삼례역에서 맞닥뜨린 고요한 공기는 애써 수확한 쌀을 빼앗겨야 했던 농민들의 숨죽인 한숨처럼 다가왔다. 만경강 상류에 위치한 전북 완주군 삼례읍은 토지가 비옥하고 기후도 온화해 군산, 익산, 김제와 더불어 곡식이 풍부한 곡창지대였다. 농민들의 기쁨이 되던 땅은 일제강점기가 들어서자 양곡 수탈의 중심지가 됐다. 1914년에 문을 연 삼례역 철도는 일본으로 곡식을 옮기는 발이 됐고 삼례양곡창고에선 이출되는 양만큼 수탈한 양곡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삼례문화예술촌 내 모모미술관
비에 젖은 삼례문화예술촌


1920년에 신축한 삼례양곡창고는 무려 90년 간, 양곡창고로서 기능을 이어왔다. 나라 잃은 백성들의 설움과 산업 발달로 급격히 성장하는 시대의 변화를 모조리 품은 커다란 창고는 2013년, 완주군에 의해 삼례문화예술촌 ‘삼삼예예미미’로 다시 태어났다. 창고의 외관과 뼈대는 살리되 미술관, 디지털체험관, 소극장과 목공소 등이 들어선 문화예술공간으로 거듭난 것이다. 예술가들은 수탈이 남긴 상처 위에 근현대 예술의 씨앗을 심었다. 


삼례문화예술촌에서 가장 먼저 만나는 모모미술관은 녹슨 철재 벽면과 높은 천장을 받치는 나무 구조물이 옛것 그대로다. 그러나 그 안에선 삼례예술촌에서만 만날 수 있는 작품들이 걸리고, 문 앞에선 언제까지고 이곳을 지키겠다는 듯 태권 V 조형물이 방문객에게 든든한 어깨를 내민다. 책공방 아트센터에선 책 만드는 기계와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활자가 공간에 가득하다. 기름 냄새 속에서 탁탁탁 책장 넘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은 이곳에서 직접 책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나무가 책을 만드는 곳 반대편에는 나무의 시간처럼 묵묵히 소임을 다한 연장들과 한 편의 시 같은 목가구가 있는 김상림목공소가 있다. ‘어느 날, 나무는 말이 없고 생각에 잠기기 시작한다/하나, 둘 이파리를 떨군다’ 목공소 앞에서 방문객을 맞는 시구처럼 삼례문화예술촌에선 걸음을 뗄수록 사람은 하나의 나무가 된다. 곡식을 빼앗기던 아픔의 공간에 반창고가 되어준 예술. 역사의 벌어진 상처에 새 살이 돋아나고 있다. 



지친 날개가 숨을 고르는 곳


새가 힘차게 날아오를 수 있는 건 잠시 쉬어갈 수 있는 작은 땅 덕분이다. 먼 길 날아온 기러기가 쉬어간다는 비비정(飛飛亭)은 불안하게 퍼덕이는 마음이 가는 다리를 뻗을 수 있는 작은 정자다. 비비정은 조선시대의 무인 최영길이 세운 후 여러 전란을 거치며 1998년에 복원됐다. 초록으로 흔들리는 갈대밭 사이로 이리저리 흔들리며 흐르는 만경강이 눈 앞 가득 펼쳐지는 곳.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제방이 들어서기 전에는 하얀 모래밭에서 쉬어가는 기러기 떼의 모습이 하얀 도화지에 물감을 흩뿌려놓은 듯 장관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다시 날개를 펴고 날아가야 하는 새처럼 시간도 백사장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다. 전주천, 삼천천 등 크고 작은 하천이 모이는 만경강에 목교와 철교가 놓였고, 이제는 시대가 다른 두 기차가 함께 강을 건넌다. 1928년, 일본이 우리의 농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놓았던 폐철교에는 무궁화호 열차를 개조한 비비정 예술 열차가 다니고, 맞은편에선 KTX 열차가 쏜살같이 사라져 버린다. 


비비낙안 카페 앞에서
할머니 셰프들의 손맛이 일품인 비비정 농가 레스토랑


수만 개의 이랑이라는 뜻의 만경강(萬頃江). 수만 개의 만남과 헤어짐이 흐르는 강의 근처에는 불과 수년 전만 해도 삼례읍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이었던 비비정 마을이 있다. 만경강 인근의 자투리땅에 판자촌을 이루며 하루하루 고단하게 살아가던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2012년, ‘비비정 농가 레스토랑’이 들어서면서부터다. 2009년, 완주군과 농식품부가 주관하는 ‘신문화공간조성사업’에 선정되면서, 비비정 마을을 오랫동안 지켜온 어머니들이 가장 자신 있는 요리 솜씨를 내세워 레스토랑을 열었던 것. 오로지 마을에서 직접 재배한 식재료를 사용한 한 상차림은 오래도록 배부르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50대에서 70대까지, 한 평생 가족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어주었던 어머니 셰프들의 손맛에는 담백하면서도 든든한 위로 덕분일 테다. 


레스토랑의 뒷동산에 올라 귀농자와 지역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카페 ‘비비낙안’에서 기러기처럼 잠시 숨을 골랐다. “해바라기 씨를 심어야지.” 해처럼 맑은 꽃이 피길 기다리며 화분을 일구는 한 주민의 말에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현실을 탓하지 않고 해바라기처럼 더 나은 삶을 향해 줄기를 뻗어나가는 비비정 마을의 일상. 연인들의 결혼식 장소로도 인기 있는 비비낙안 앞 정원에서 마을 주민들이 그랬던 것처럼 새 삶이 시작된다. 돌계단에서 느리게 느리게 움직이던 달팽이처럼 천천히, 우직하게 말이다.



만사를 제쳐놓고, 가만히 나에게


몽환적일 만큼 은근한 운무가 종남산 자락을 타고 마을로 향한다. 화선지에 떨군 먹이 서서히 퍼져나가듯 산자락에 피어난 한 폭의 수묵화. 산으로 둘러싸인 오성 한옥마을은 완전한 휴식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붓질이다. 


수백 년 된 한옥이 고스란히 제 모습을 지키는 이 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우리들의 정원’, 아원(我園) 고택이 있다. 태백산 끝자락의 종남산을 말없이 마주하며 이윽고 자연과 하나가 된 고요한 옛집. 경남 진주의 250년 된 한옥을 완주로 정성스레 옮겨 온 아원고택은 만사를 제쳐놓고 휴식하고 싶은 여행객을 말없이 품는다. 30년 전, 건축가인 전해갑 아원 대표는 여행 중 우연히 현재의 한옥마을 터를 만났다. 뒤로는 대나무 숲이 바람을 연주하고, 앞으로는 종남산이 겸허심을 가르쳐주는 비밀스러운 공간. 한옥은 산과 함께 음악과 예술, 자연이 한 데 어우러지는 유일한 장소였다. 경남 진주의 장인들과 한 채에 3년이란 시간과 정성을 들여 이축하고, 아원 뮤지엄을 비롯한 현대식 건물까지 더하니 모두 완성하는 데만 12년이 걸렸다.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의 시계는 12년이 긴 시간일 터. 하지만 비가 오면 비를 맞고 바람이 불면 그대로 흘려보내며 탄생과 죽음을 반복하는 인간사를 품은 한옥의 시간은 언제나 ‘지금’ 일 테다.


우리들의 정원, 아원고택
고무신이 건네는 나직한 목소리


사각사각. 발을 내디딜 때마다 흙길이 보내오는 소리가 청명하다. 디딤돌에 나란히 놓인 하얀 고무신은 삶의 여정을 매 순간 정갈히 걸어갈 것을 주문한다. 만휴당의 대청마루에 앉아 수면 위에 찰랑찰랑 흔들리는 종남산을 지그시 바라본다. 어디선가 빗방울이 이슬이 되어 하나둘 떨어지고, 작은 연못에 뜬 수선화를 살며시 스치는 바람이 느껴졌다. 아원고택과 연결된 아원 뮤지엄에서 아련하게 들려오는 음악을 들으며 눈을 감는다. 산을 타고 내려오던 운무는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두 팔 벌려 여행자를 감싸 안고, 그 싱싱하고 맑은 품속에서 여행자는 꿈을 꾼다. 남들이 말하는 수만 가지 일에서 벗어나 한옥처럼 마음의 창을 활짝 열어젖히는 꿈을. 그래서 영원히 지금에 머무르는 꿈을.



글 윤민지

한국가스공사 사보 [KOGAS] 2018년 6월호 'Walk a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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