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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나물 봄동이 Sep 27. 2016

어떤 통화 2

새벽 2시 14분. 헤어진 전여친에게 걸 수도 없는 전화

이 매거진 속 이야기들은 제가 혹은 누군가 겪은 일에서 출발합니다. 아, 물론 상상 속에서의 일도 포함합니다. 그렇기에 소설이 아닌 것처럼 보일 때조차도 저는 소설이라고 부를 거예요. 뭐, 그냥 그렇다고요.




  

그래, 난 좀 취했었어.

취하고 싶어 마셨지만 취하지 않았고

그래서 마시고 또 마시고

지칠 때까지 마시다 보니

정말로 많이 취해버렸어.

그렇게 엉망이 된 내 모습은 나도 처음이었어.

   

친구 H에게 전화를 걸었어.

나야, 겨우 한 마디 내뱉었을 뿐인데

H는 내 상태를 바로 알아챘지.

그래, 우린 친구니까.    


너 지금 어디야? 거기 대체 어디야?

H가 계속 말을 했지만, 나는 그저

몰라, 나 어떡하지,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으로 중얼거렸어.

나 진짜 많이 취했었나 봐.

야, 정신 차리고 내 말 똑바로 들어. 거기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전화 좀 바꿔 봐.

H가 말했고 ‘똑바로’란 말에 정신을 똑바로 해야겠다고 생각해서였을까, 난 지나가는 여자를 붙잡았어.

저기, 전화 좀 받아보실래요? 제 친구가 바꿔달라는데.

여자는 무슨 말이냐는 듯 놀라는 것 같았지만 이내 알아차리는 것 같았어.

내 휴대폰을 건네받은 여자에게 H가 말했겠지.

죄송한데, 제 친구가 지금 많이 취한 것 같아서요. 거기 위치 좀 설명해주시겠어요?

그리고 여자가 뭐라뭐라 설명을 했겠지.

여기 여기인데요. 혹시 저기 아세요? 저기 지나서 거기 근처에 오시면 오른쪽으로 골목이 하나 있는데요, 그 골목으로 들어오시면 여기가 보이는데, 지금 여기가 여기인데, 이해하시겠어요? 여보세요? 제 말 듣고 있으세요?

네, 잘 알았습니다. 고맙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었으면 될 J는,

그러나 이렇게 말했던 거야.    


너 Y지? 거기 꼼짝 말고 있어.    


내게 휴대폰을 건고 사라지려는 여자,

수화기에서 다급하게 H의 목소리가 들려왔어.

야, 너 지금 그 여자 어디로 못 가게 꼭 붙잡고 있어. 그 여자 놓치면 너 나한테 죽는다. 그 여자 내가 말했던 Y란 말이야!    


아, 내가 술에 덜 취했더라면

그때 그 여자 Y를 잡던 내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당황했을 그 여자 Y의 표정을,

다급히 달려와 마주한 내 친구 H와 그 여자 Y의 눈빛을 기억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니지, 내가 술에 덜 취했더라면 그들은 그렇게 재회할 수 없었을 테지.    


어쨌든 나는,

나도 너처럼 한 여자를 붙잡지 못하고 떠나보내고 말았어,

H에게 한탄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어.

그날 그렇게 H는 그 여자를 붙잡았으니까.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났어.

그렇게 다시 만날 수도 있더라.

그럴 수도 있는 거더라.

어쩌면 우리도

언제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든 다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그때는 우리도

다시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취한 목소리로 H가 전화를 걸어왔어.

나는 많이 취했냐고 거기 어디냐고 묻는 대신

옆에 지나가는 사람 좀 바꿔달라고 했지.

H는,

너를 닮은 사람은 지나가지 않는다고 말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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