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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작가 Jul 04. 2023

그레고르 잠자의 현현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라는 욕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는 이유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자신이 잠자리 속에서 한 마리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음을 발견했다."로 시작하는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 논술 시간, 중학생들과 고전을 이야기하며 벌레에 대해 한참을 떠들었다.


"샘은 주택에 사는데... 예전에 바퀴벌레가 나타난 거야. 그놈이 가만히 있지도 않고 그 큰 몸으로 날아다녀 나에게 올까 무섭고... 너무 보기는 싫어서 약을 뿌리니 바둥대는 모습이 또 얼마나 징그러운지. 손도 대기 싫어 휴지와 물티슈를 가지고 변기에 버리려고..."


생각하지도 싫은, 끔찍한 벌레와의 무용담을 열심히 이야기하며 카프카의 <<변신>>으로 들어갔다. 같이 찡그리며 듣는 아이들은 어느새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의 불운과 소외에 대해 서서히 공감하는데.


"샘이 이 책을 읽다 열받은 건 뭐냐 하면, 다 할 수 있었잖아. 그런데 아들이 벌레가 되기 전에는 아무도 안 움직여. 아들은 오로지 집안의 빚 갚겠다고, 그걸 희망으로 삼고 열심히 돈 버는데... 벌레로 변하니 사람 취급도 안 하고..."


우리는 그레고르 잠자에게 측은지심을 느끼며 마인드맵으로 마무리했다. 어린 조카들이 자고 있는 거실 천장 위 보란 듯이 붙어 있던 벌레들. 조카들을 지키기 위해, 혹여 머리에라도 떨어질까 두려워서 파리채를 잡고 서서 천장을 노려보듯 살피며 스매싱을 날려야 했던 그 끔찍한 순간들. 꿈에라도 나올까 두려운데. 아이들과 <<변신>>을 논하며. 실존과 소외를 고상하게, 우아하게 말하던 우리였는데. 문제는 수업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감상에 젖을 순간.


부스슥. 뭐지? 뭐가 부스럭거리지? 기분 좋은 소리가 결코 아니다. 그 순간 내 눈에 떡! 하고 나타난 놈은 바로 그놈. 아이들과 실컷 말하던 그레고르 잠자! 왜 하필 우리 집 내 방에 당신이 현현했단 말인가? 액자에 붙어있는 벌레가 된 아들을 보고 기절한 어머니처럼 나도 기절 직전. 우선 항상 대기 중인 파리채를 들고 어떻게든 놈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온 힘을 다해 스매싱! 어라? 도망갔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다. 하.. 날 새겠네. 도대체 왜 이런 시련이 하필 오늘 기분 좋게 아이들과 <<변신>>을 논하던 밤, 방에 나타나 괴롭히는가.


만약 가족이 벌레(여기서 벌레는 더 이상 쓸모없는 존재를 상징한다)가 되었다면 어떻게 할 거냐고 아이들에게 물었더니,


자연으로 보내줘요.

(정글로 보내며 알아서 살아가란 얘기니?)

서커스단에 보내 돈을 벌게 해요.

(아이 나름 존재감을 찾으라는 좋은 의미였으나, 역시 돈벌이야?)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짐작도 못 했건만, 눈에 벌레가 나타난 순간 고민도 없이 파리채를 잡고 내리치던 내 모습으로 볼 때 분명 그레고르 잠자의 어머니처럼 기절하고, 아버지처럼 사과를 던지고, 동생처럼 처음에는 잘해주다가 결국 없애려고 했을까? 이건 상징이잖아, 정신 차려!


시험이 끝나고 결석한 아이들도 꽤 되어 샘의 개인사를 방출하며 조금 여유를 주었다.

"샘도 사실 이 학원에만 있었던 게 아니잖아. 여러 곳에서 일했는데 사정으로 일을 못할 때도 있었어. 그럴 때 스스로 위축되긴 하더라."

중학생들은 아직 어리지만 그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다른 때와 달리 대답도 잘해주고 공감의 끄덕임까지. 웬일이지 싶지만, 아이들도 이미 어느 정도는 알고 있는 듯하다.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구피 알아? 구피를 키우는데 수컷들이 암컷만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는 꼴이 보기 싫은 거야. 그런데 우리 집은 좀 야생처럼 강하게 키우거든. 온도 조절이 안 되어 추운 겨울에 많이 죽었어. 그래서 수컷 두 마리만 남았는데, 얘들만 있으니 재미가 없잖아. 새끼가 태어나면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 그래서 처음에는 밥을 하루에 한 번 꼬박꼬박 주다가 나중에는 차츰 줄어들다 신경도 안 쓰고 있더라고. 벌레(그레고르 잠자)를 챙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아이들과 실컷 벌레를 이야기하다 집에서 벌레를 맞닥뜨린 후 생각난 것 한 가지! 앞으로 '벌레보다 못한' 놈이란 말을 하기가 조금 힘들어지겠다. 그레고르가 생각날 테니까. 희생만 하고 자기 삶을 제대로 살지도 못한 그레고르 잠자는 죽음까지 비참했다. 나 역시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하고, 빚 갚으면 희망이 생길 거라고 믿고 있으니. 그레고르에 오버랩되는 모습도 뜨끔. 이 작품 속에 나오는 모든 인물에 내가 스쳐간다.


조카들 양육에 관절이 약한 어머니는 정형외과에 가서 주사도 맞고 물리치료까지 해야 하는 지경. 뚜벅이라 많이 걸어 건강할 거라 생각했던 나의 발목도 시큰. 티끌 모아 태산이 아니라 갈수록 가관이고 체력은 더 떨어진다. 그래서일까? 얼마 전 교회 장로님이 주신 생유산균과 미국 출장 다녀온 원장샘이 선물해 주신 종합비타민이 예사롭지 않고 와닿는다. 다행히 소설처럼 벌레가 되진 않겠지만... 앞으로도 육체는 조금 힘들지언정 가족을 위해 열심히 뛰고 싶다.


어릴 적부터 가난하고 힘든 가정이어서, 가족여행도 제대로 떠나본 적이 없지만. 내가 학원 일을 못할 때도, 수입이 줄어들 때도 새 옷을 사입히고 괜찮다(속은 걱정했겠지만) 위로해 준 어머니. 그 사랑을 기억해서라도 약해지는 어머니와 똥강아지 조카들, 기질은 정반대이지만 혈육인 동생을 끝까지 지키고 싶다. 벌레 한 마리가 이런 글을 쓰게 한다. 저항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힘없이 쓰러져간 벌레야,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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