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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 있게 대우하라

하룻밤의 행복

by 윤작가

고기 대신 해산물

바지락이 들어가면 국물이 "끝내준다!"

자궁근종 크기를 줄이기 위해 식단 조절 중이라 체질에 안 맞는 육류와 밀가루 금지. 어릴 때부터 어머니 닮아 고기를 싫어했던 딸은 체질에도 해산물이 딱 맞다.

이번 달에 초음파 정기 검진을 앞두고 신경이 쓰인다. 어머니는 명절 앞두고 농협 하나로 마트에서 비싼 바지락을 사 왔다.

바지락이 싱싱한지 해감을 위해 바가지에 소금물 넣고 하룻밤 재워둔다.



"소금물에 놀다가(?) 냉장고에서 시원하게 하룻밤 잘 묵었지?"

어머니의 우스갯소리와 달리 된장찌개용 냄비에 쌀뜨물 부어도 아직 살아있는 그대들. 하룻밤 행복하고 끝! 인간을 위해 희생한 바지락을 기념해서 청량한 통 안에 입 벌린 바지락을 찍었다. 된장 풀고 애호박과 가지, 두부 썰고 파와 고추 조금. 어머니표 바지락 된장찌개. 막내 조카는 채소 빼고 바지락만 쏙 골라먹는다.


밀가루 못 먹는 내가 산 쌀 소면으로 만든 오이 비빔면

이 없으면 잇몸

밀가루 대체물로 쌀로 만든 소면, 쌀 튀김가루와 부침가루 등 조금이라도 새로운 음식을 먹으려고 용쓰는 요즘. 금양체질에는 못 먹는 식재료가 많아 조카들 위한 고구마튀김도 맛만 봐야 한다.

어머니는 딸이 고기를 못 먹어서 이번 추석에는 동그랑땡 대신 시장에서 산 떡갈비 구워 조카들 먹일 생각이라고 했다.

어릴 때 외갓집에 가면 노할머니는 요강-의사의 처방대로 먹지 않고 약을 과다복용, 부작용으로 요강을 받치고 계셔야 했음-에 앉아 놋수저로 배나 복숭아처럼 부드러운 과육 긁어 입에 넣고 있었다. 동생과 내가 "할머니" 부르며 달려가면 "우리 새끼들 왔냐?" 하며 두 팔 벌리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요강에 앉은 할머니 볼에 뽀뽀하면 우리의 할 일은 끝난다. 이 없는 잇몸을 생각하니 노할머니 생각이 저절로 떠오른다.

이 없으면 잇몸이라고, 밀면을 못 먹으니 쌀로 만든 소면을 어머니에게 내밀었다. 딸이 장난감처럼 산 수저 받침대 오리에 젓가락 놓고, 어중간하게 남은 삶은 달걀과 바나나도 썰어놓는다. 사진 찍기 전, 붉은색이 필요하다며 당근도 채 썰어 고명으로 올린다. 이제 어머니는 딸을 완전히(?) 이해했고, 협조자이다.


제 눈에 안경

5성급 호텔 못지않은 품격 있는 상차림?!

바다 생선이 금양체질에 좋대서 어머니는 자신의 알바 근처 횟집 사장님께 공수해 온 갈치와 고등어를 사 와서 미리 구워둔다. 동생과 조카는 막 차린 음식을 즐기지만, 주면 주는 대로 받는 나는 음식이 식어도, 밥이 질어도, 일주일 내내 먹는 반찬이어도 군소리하지 않고 무조건 먹는다. 왜냐하면 어머니가 직접 한 음식이기 때문에.

유치원생도 아닌데, 뼈까지 발라 먹기 좋게 키친타월 깔고 접시 양쪽에 플레이팅 한 것처럼 꽃무늬가 보인다.


호텔 조식처럼 5성급 부럽지 않은 어머니의 사랑과 마음이 담긴 귀한 밥상이다. 제 눈에 안경이라지만, 어머니는 외모뿐만 아니라 마음씨도 일품. 이런 어머니가 요즘 쇠약해졌는지 집안일을 조금 하면 힘겨워하신다. 곁에서 돕느라고 애쓰는데 살림은 어머니가 거의 도맡아 하시니, 다 큰 딸들과 조카들 뒷바라지에 평생 쉴 틈도 없이 애처롭고 죄송하다. 그래도 나약한 마음먹으면 인생이 처연해질까 싶어 가치 있게 바라보기로 결심한다.


가치 있게

"세상에서 사람은 자신을 얼마나 가치 있어 보이게 만드느냐에 따라, 그에 걸맞은 대접을 받는다."

- 아돌프 크니게, <<우리가 타인을 마주할 때>> 중에서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한 이 책에서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아닌, 자신을 가치 있어 보이게 만드는 만큼 대접받는다는 새로운 관점을 깨닫는다. 크리스천이지만, 성경과 기독교 서적 이외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성장하고자 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어느 때는 나도, 어머니도, 동생도, 조카들도 다 불쌍하다. 생전 노름꾼 아버지로 졸업 후 줄곧 일해도 집 한 채 없이 프리랜서로 떠돌 듯이 밥벌이하는 나와 이혼하여 친정 식구랑 합류하여 사는 동생네와 도박에 미친 전 제부로 인한 아버지의 빈자리. 사춘기 조카들에게도 한없이 미안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죽을 때마다 외치는 한 마디, "파워풀 패밀리(powerful family)"! 우리 가정은 파워풀하다. 그래서 남이 함부로 건들지 못한다. 건드리는 놈은 온전하지 못하다, 이런 정신으로 살아왔고 살아간다.


조카에게 일이 터지면, 엄마인 동생과 이모인 나와, 할미인 어머니가 함께 출동. 동생에게 일이 터지면, 언니인 나와 엄마인 어머니와 자녀들인 조카들 출동. 나에게 일이 터지면 조카와 동생과 어머니가 출동. 이런 식으로 묶여 살아간다. 바지락은 하룻밤의 행복만 맛보고 우리 가족 뱃속으로 들어왔지만. 소화되어 사라지겠지만. 우리 식구들은 같이 밥 먹고 함께 울고 웃으며 더욱 뜨거워진다. 서로를 가치 있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 그 누구든 함부로 우리를 보지 않게 하려고 오늘도 이렇게 글 쓰고 책 읽고, 청소하고 동생 취업 1주년을 축하하는 꽃다발 사고, 음악 듣고 바지락 된장찌개 국물에 감탄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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