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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재범 Feb 08. 2022

기억은 내가 조종하는게 아니다

이제는 헤어져야 할

나는 사랑할 대상을 붙잡아야 한다. 억지로 붙들고 있는 기억도, 물건도, 사람도 없다. 깊은 애착을 가진 대상이 없다. 마음에 들어오는 무언가를 거부하는 일은 많지 않지만 떠나는 무언가를 붙잡는 일은 더욱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가만히 있는 대상에 관심을 주지 않아 멀어지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억지로 음에 담아두고 오래도록 아쉬워하는 무언가가 아직 내게는 없다.


나는 놓지 못해 끙끙대는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 애착 없는 일상은 공허하다. 무언가 없으면 안 되는 삶 주어진 시간을 남김없이 소비하는 삶이다. 애착 없는 삶엔 빈틈이 많다. 의미 없이 붕 떠버린 시간에 나는 주목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한다. 주목할 대상이 있든 없든 시간은 나를 덮쳐 흐른다. 몰려오는 시간의 빈틈을 메우기 위해 정신을 마취할 무언가를 찾아내야만 한다. 보통 유튜브를 켜고, 자주 술을 찾는다. 무엇도 사랑하지 않으면서 시간을 채울 수 있는 스낵을 찾아 취한다. 사랑 없는 시간의 빈틈을 지날 때 나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결국 사랑할 대상을 가지지 못한 나는 나 자신까지도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마는 것이다.


애착의 대상과 구태여 이별할 필요가 무엇인가. 어린아이가 쪽쪽이를 뗄 때가 되었으니 멀어져야 하고, 첫사랑과 이별한 지 몇 년이 되었으니 잊어야 하고, 다툰 지 오래되었으니 화해를 해야 할 근거가 있나. 쪽쪽이를 입에 대고 싶지 않을 때까지 물고 있으면 정말로 안 되는지, 죽기 직전에 첫사랑을 한 번 더 떠올리면 찌질한 것인지, 다툼은 반드시 화해로 귀결되어야 하는지. 우리는 정해진 바 없는 일에 보편적인 기한을 두고 함부로 이별을 권하는 일이 잦다.


쪽쪽이가 지겨워지면 물지 않으면 되고, 지겨워지지 않으면 계속 물고 있으면 된다. 첫사랑이 생각나면 생각하면 되고, 생각이 나지 않으면 다른 생각으로 시간을 보내면 된다. 잊고 싶은 기억이 떠오르면 잊고 싶다고 생각하면 된다. 잊히지 않으면 '참 잊히지 않는구나'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영원히 지속하는 기억은 많지 않다. 다가오는 기억에 충실하면 나는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다.


기쁨도 슬픔도 보편적이지 않은 개인의 시간으로 누리다 떠나겠다. 슬픈 일에는 지칠 때까지 슬퍼하고, 기쁜 일에는 더없이 기쁨에 취하겠다. 아픈 기억에 아프지 않은 척하지도, 좋은 기억을 그저 그런 기억으로 무시하지도 않겠다. 어차피 떠나보내려 마음먹는다고 해서 잊히거나 후련해지는 기억은 없다. 기억은 내가 조종하는 게 아니다.



20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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