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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살아가기




이전에 기고한 ‘성당에서 오르간으로 반주하기’ 라는 긴 글에 의외로 많은 분들이 공감해 주셔서 미천하지만 나의 다른 경험들도 함께 나누어 보고자 한다.




성당에서 반주하는 오르가니스트에게는 책임과 의무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미사 전례를 돕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미사 때 필요한 성가번호를 알아 내야하고, 성가대가 있다면 특송을 부를 때 반주할 곡을 준비해야한다. 그리고 나서 악보를 또박또박 읽어야하고, 전주를 어떻게 칠 것인지를 정해야한다. 가끔은 묵상때 연주할 식상하지 않은 멋진 1분 이내의 곡을 찾아 내야하고  조금 고급 이라면 미사후에 후주까지도 준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을 가장 초급의 반주자가 해야할 일이라 하자.

초급 반주단계에서 좀 더 성의있고 적극적인 오르가니스트라면 이 단계에  들어서고 나서 오르간 레슨을 받고자 할 것이다.
사실 오르간에 대한 공부는 오르가니스트라면 당연히 해야할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나는 오르가니스트다’라는 프로그램이 없어서 인지 그냥 소리를 내는 것으로 만족하는 반주자들이 많다.
레슨을 받으러가면 대부분의 오르간 선생님들은 친절하게 (나처럼^^!)  오르간이 어떤 악기이고 어떤 음색을 선택해야 하고 어떻게 레가토와 발페달을 써야하는지, 그리고 어떤 곡을 연주하면 좋을지를 알려 줄 것이다.
이렇게 기본적인 연주법과 악기에 대해 인식을 하든지 아니면 독학으로 열심히 악보를 정확히 보는 것에 전념하든지 간에 일정기간을 거쳤다면 - 보통 전례시기 3년 (가),(나),(다)해를 경험했다면- 어느 정도 반주하는데 익숙해 질 것이다.

여기서 초급 단계에서 겪는 실수(?)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배워본 사람은 알겠지만, 어떤 곡을 연주하는것과 누군가의 반주를 하는 일은 굉장히 차이가 크다. 혼자서 연주하는 일에는 책임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나 노래가 됐든, 솔로 악기가 됐든 일단 반주를 하게 되면 주요 멜로디가 나아가는데 박자와 분위기를 가이드 해주어야 하고 더욱이 잘못된 반주로 방해를 해서는 안된다. 이것이 반주의 책임이다.
이러한 책임감과 부담감 때문에 더 실수가 크게 따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실수는 초보단계에는 누구나 겪는 일이므로 이 글을 읽는 여러분과 나는 ‘실수’라 부르지 말고 ‘과정’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여기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에서 말한 ‘과정’ 혹은 연주하는 테크닉이나 음색을 잘못 쓰는 물리적인 실수가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과정’을 견뎌내지 못하거나, 견디지 못한 채로 익숙해 진다.
전자는 ‘과정’ 자체를 겪는것이 힘든 조급한 사람들이다.
레슨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이렇게 질문한다.
“얼마나 치면 발페달을 잘 치게되나요?”
“언제쯤 이면 레슨을 안받고 혼자 잘 칠수 있나요?”
여기서 내가 되질문하고 싶은것이 있다.
잘 하게 된다는 그 ‘잘’은 어떤 것인가?
혹시 그 ‘잘’ 이라는 것이 나만 아는 존재라는 생각은 혹시 해보지 않았는가?
가르치는 사람이 예언의 능력이라도 갖고 있어야한다는 말인가?
이 질문은 나는 오류라고 생각한다. 오류가 아니라면 ‘하느님만이 아실 답’ 이라고 해두자.

심하게 조급한 사람들은 오르가니스트가 되기 전에 스스로 그만 두거나 시도만 해보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다.또 아예 시도조차 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오르가니스트는 반주할 줄 안다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여기서 조금은 설명된다. 조급한 마음,회피하려는 마음, 너무 잘하고 싶은 마음에 지배 되지 않을때 하느님이 부르시는 소리를 듣게 되는것이  아닐까?
익숙해 지는데에 너무 오래 걸린다고, 너무 어렵다고 쉽게 좌절하거나 조급해하지 말자. 개인차라는 것도 굉장히 크고 일정 기간 동안 어느 정도로 노력 했는지에 따라 익숙해 지는 시간은 달라 질 수 있다. 익숙해 지는 기간이 길어지면 또 어떤가? 모든 것은 전부 나에게 쌓이는 것인데 경험과 정성스러운 노력이 쌓인다면 오히려 견고해져서 하느님 앞에 더욱 거룩해 질 수있기 때문이다.

‘과정’을 견뎌내지 못하는 또 하나의 실수는 <무시>이다.
내가 잘 못하고 있는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습관적으로 미스 터치를 하거나, 박자가 오락가락하거나 아예 없거나, 소심해서 안들릴 정도로 작게 치거나, 과감해서 너무 크게 치거나 ...어차피 누가 지적할 것도아니고, 지적한다 해도 나는 잘 모르겠고 알아도 안 고쳐진다는 입장이다. 이 상태로 반주가 익숙해 진다면 그야말로 그 미사에 오는 사람들은 ‘catastrophe 대참사’를 매주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은 내가 잘못하고 있는 것을 몰랐다 하더라도 스스로 에게 너무나 관대한 ‘실수’에 해당한다. 이러한 실수는 나의 마음을 열고 귀를 여는 데에서 그 실수를 만회할 수 가 있다. 항상 깨어있으면서 누군가 지적을  할때 그것을 선의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미사에 참례한 사람들에게 먼저 질문을 한다거나,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배우려는 노력을 하는 것이야 말로 예수님이 겪으신 수난에 동참하는 하나의 작은 희생이 되지 않을까?

‘과정’ 의 시간에는 고통의 신비가 따른다.
장시간의 연습에서 오는 신체의 고통, 벗어날 수 없는 꾸준함에서 오는 지겨움의 고통, 작은 실수에서도 타인에게서 느껴지는 민망한 고통, 나의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하는 희생의 고통, 그 외에도 예상치 못한 고통들이 따르게 된다.
이러한 고통은 비단 오르가니스트들에게만 오는 고통은 아닐 것이다. 모든 세상 일에는 반드시 따르는 고통이다. 특히나 하느님의 일을 돕는 사람에게는 더욱.
재능의 여부와 관계가 없고, 반주를 시작한 기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도 관계가 없다.
오르간으로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을 하는 동안에는 이러한 고통이 순간순간 다가오게 되고 이것을 겪은 사람은 반드시 하느님의 신비를 느끼게 된다.
이 신비를 굳이 설명하려고 노력하지는 않겠다.
이 글을 읽고 있는 오르가니스트라면 아마 작은 경험이라도 해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오르간 앞에서 매주 미사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로써 그 신비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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