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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서 오르간으로 반주하기

순서

1. 오르가니스트와 반주자

2. 성당에서 반주하기

 - 평일 미사 반주하기

 - 성가대가 있는 미사 반주하기

3. 오르가니스트로 살아가기





오르가니스트와 반주자


오르간이라는 악기는 귀하면서도 천하다.

역사로 보나 규모로 보나 오르간은 가장 최고의 악기라고 할 수 있다.

건반악기로는 고대부터 존재해오던 최고령 악기이고 수백수천 개의 파이프가 다양한 소리를 내며 대규모 편성의 오케스트라 음향 정도는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는 가장 거대한 악기이다.

또한 모차르트가 ‘인간의 영혼을 울릴 수 있는 유일한 악기’라고도 말했다고 할 만큼 아름다운 소리를 가진 악기이기도 하다.

이 정도만 보더라도 가히 최고의 악기라고 자부할 만하지 않은가?

악기의 가격을 보자면 소규모의 파이프오르간을 제작하는 데 만도 억 단위의 경제규모를 가지고 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한국에서는 오르간을 제작하기도 어렵거니와 큰 교회나 초대형 공연장이 아니면 대규모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도 교회에서 네모난 상자같이 생긴 파이프오르간의 음색을 흉내 내어 만든 전자오르간만 본 적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소위 ‘옛날 사람들’이 기억하는 국민학교 시절 음악시간에 발로 밟아 달리기하며 반주하던 풍금도 오르간의 일종이다.

한국에서 ‘오르간’으로 떠올려지는 이미지는 이 두 가지가 전부라고 보면 되겠다.

무신론자이거나 그리스도교 이외의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먼 옛날 달리기 오르간의 기억뿐일 것이고, 실제 오르간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사람들이 있는지 어쩐지도 모르는 사람이 태반인 것이 현실이다.

그래서 성당이나 교회에서 사용하는 전자오르간은 피아노를 조금이라도 칠 줄 아는 사람에게

 ‘똑같이 생겼는데 와서 좀 쳐보라’로 시작하게 되는 악기이다.

어떻게 켜야 소리가 나는지 조차 알 수도 없는 악기인데 설명서 보고 전원 올리고 불이 들어오는 버튼을 이것저것 누르고 그냥 노래처럼 들리게 치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접근한다.

이 귀하디 귀한 최고의 악기가 한국에서는 이런 천대를 받고 있다.

연주자도 다르지 않다.

오르가니스트라는 명칭을 아는 사람도 드물다.

오르가니스트라고 제대로 불려지는 오르가니스트도 없지만 대부분의 오르가니스트들은 이름이 반주자다. 친절하고 교양 있는 사람들은 ‘반주자님’이라고도 불러준다.

게다가 피아노 칠 줄 안다던 아까 그 사람도 일단 한번 오르간 쳐봤으니, 미사 때 반주 한 번 해봤으니 그냥 OO성당 반주자가 된다.

자 이제 이렇게 반주자가 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본인의 몫이다.

설명서에 나온 대로 전원 버튼과 알 수 없는 불이 들어오는 버튼을 여러 개 눌러놓은 후 악보에 그려진 대로 박자에 맞춰 누르면 되는 것이다. 반주 중에 템포가 느려지거나 빨라지게 되면서 미스터치를 하게 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과 뭔가가 맞지 않기 시작하면 다른 아무도 모르지만 반주자 혼자 얼굴이 시뻘게지고 다른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고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치게 된다. 두어 차례 이상 반주를 하고 나면 반주자로서의 책임과 의무로서 혹은 스스로 망신의 순간을 피하기 위해 집에서 몇 번씩이고 연습을 하게 된다. 그래서 익숙해지고 얼추 맞아 들어가면 그때부터 실력 있는 반주자로 등극하게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식으로 오르간을 알게 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연주가 되는 곳은 대부분 교회나 성당이고 그 또한 연주를 위해서가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데에 반주하는 악기로 사용이 되는 것이 전부이다.

역사가 장대하고 방대한 작품의 수를 자랑하는 오르간 작품도 한국에서는 한 번 제대로 들어볼 기회가 아주 드물다.

서양에서는 교회나 성당에서 오르간과 오르가니스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즉흥연주도 문헌연주도 자유롭게 시도할 수 있고 감상자들도 꽤 있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상황이 아주 다르다.

교회가 가진 역사도 서양에 비해 짧고, 신앙생활이 일상인 서양인들과 달리 유교 문화권인 한국은 생활과 종교가 분리되어있어 교회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 우리에게는 낯설고 어색하다. 또한 서양 종교가 한국 문화화 되면서 –특히 가톨릭에서는-예식과 의식 행위 자체만을 중요시하고 음악에는 BGM 정도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아직까지 사대주의와 유교문화가 깃들여져 있는 우리나라에서는 예식과 음악이 한 덩어리로 인식되지 못하고 어쩐지 음악은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장치 정도로 여겨지는 것 같다.

물론 서양음악을 즐겨 듣는 일반인들도 소수이다 보니 오르간 음악을 서양 고전음악으로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오르간과 오르가니스트는 귀하기도 하지만 굉장히 서럽고 서글픈 존재들이다.

나는 진정한 팬심으로 오르가니스트가 되었다.

오르간이 정말 궁금하고 너무 좋아서 전공을 하게 됐고 지금 오르간을 연주하고 가르치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있다.

진심으로 오르간이라는 악기가 가진 진면목을 일반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알아봐 주었으면 하는 작은 소망도 가지고 있다.

언젠가는 나처럼 오르간을 사랑해서 오르간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되는 날도 꿈꾸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제대로 알고 제대로 연주할 수 있도록 많은 이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다.  

다행히도 예전에 비해 오르간 반주자들을 위한 교육이 여기저기에서 다양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연주 테크닉이나 악기의 사용방법은 일대일의 개인적인 교육으로 가능한 일이겠지만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오르가니스트로 가게 되는 반주자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나는 가톨릭 오르가니스트이므로 미사에서 통용되는 반주 이야기로 제한한다.



성당에서 반주 하기


아까 그 반주자가 새로 되신 분은 아마도 매주 집에서 피아노로 혹은 키보드로 열심히 연습하고 미사에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심장 벌렁거림과 뜻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과 미쳐 보지 못한 각종 조표와 임시표들로 연습 때와는 다른 결과를 미사 때 보여주었을 것이다.

이것은 처음 보는 악보를 받았을 때 오르가니스트도 자주 겪는 일이다.

다만 피아노와 소리가 나오는 방식이 전혀 달라서 애먹는 일은 초반에만 겪게 되는 당황스러움이다. 흔히들 피아노 건반만을 눌러오다 보니 오르간을 눌렀을 때 지속적인 소리가 나는 것이 아마도 굉장히 어색할 것이다. 피아노처럼 누르면 갑자기 방송사고처럼 소리가 없는 상황이 되어버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계속 눌러야만 한다는 강박에 시달릴 것이고, 언제 어느 상황에 떼야하는지도 몰라서 ‘에라 모르겠다 손가락 열 개가 다 누를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눌러보자’는 시도도 하게 되리라.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은 익숙지 않음에서 오는 문제들일뿐이다.

몇 개월 후가 지나면 아주 자연스럽게, 어쩌면 피아노에서 오르간 건반 누르듯이, 어느 정도 레가토가 익숙해져 있을 것이다.

문제는 본인이 알지 못하는 그 이후에 시작된다.



평일 미사 반주하기

내가 생각하는 가장 고난도의 반주는 바로 평일 미사에서다.

노래 부르는 사람들은 악보가 아닌 가사를 보고 기억나는 멜로디로 노래를 부른다.

제대로 된 박자를 알려주는 지휘자도 노래방 스크린도 없다.

가끔 불운할 때면 선창자라는 분이나 집전사제께서 마이크에 목청을 자랑하며 3-4부 돌림노래를 친히 만들어 주신다.

여기까지는 반주자가 아는 문제들이다.

그러나 여기에 그가 모르는 문제가 하나 더 있다.

악보에 빠져들어 있는 반주자다.

음악은 귀로 듣는 것이다.

그러나 반주를 하고 있는 그 순간만큼은 음악은 눈으로 보는 것이 된다.

박자표를 일단 봐야 하고 샵과 플랫이 몇 개가 있는지 확인해야 하고, 4분 음표 사이에 숨어있는 8분 음표나 16분 음표를 찾아야 한다. 가끔 점도 나오고 콩나물 대가리가 뻥 뚫린 긴 박자가 나를 놀라게 한다. 쉼표 따위는 눈에 거슬릴 뿐이다. 사람들의 노랫소리는 내가 뚫어지게 보고 있는 악보와 다르다. 막 부른다. 저들과 맞지 않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저들이 악보를 잘못 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런 하소연이 통할 리가 없지 않은가?

미사 전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신부님들도 미사 경본 잘못 읽기도 하고, 전례 순서도 헷갈리고, 강론 준비도 가끔 빼먹는 눈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례의 자연스러운 흐름이므로 삐걱거리거나 멈추게 되면 틀렸더라도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보다 잘못된 일이다.

반주자가 잘못 연주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과 어긋나서 돌림노래, 5 성부 노래가 삐걱거려서 뭔가 이상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미사 중에 반주가 조금이라도 어긋나거나 잘못된 듯 들리면 수녀님들이 당장에 달려오시는 것이리라.

이 문제는 일반 신자들을 원망만 하고 앉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절대 잘못된 것을 고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한 반주자도 잘못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 있다.

음악을 귀로 듣지 않고 눈으로 보려고 했던 것이 고해소에 갈 일이다.

반주는 연주와 달라서 내가 악보 그대로 연주하는 것만이 옳다고 할 수가 없다.

반주를 듣고 비슷하게 따라 부를 수 있도록 안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평일 미사 반주자의 주요 소임인 것이다. 바로 이 점이 평일 미사 반주가 가장 고난도인 이유이다.

제대로 안내를 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악보에 빠져들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라면 곤란하다. 대강 훑어보아도 손이 자연스럽게 흘러갈 정도 익숙하게 악보가 숙지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 기본자세인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반주의 템포가 일정한지를 알아야 하고(미스터치로 당황해서 멈춘다거나 빨라지거나 느려지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반주의 음량이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정도의 소리인지를 알아야 하고, 그다음엔 사람들이 노래 중에 숨을 쉬어서 돌아가시지 않을 수 있는 타이밍을 주어야 한다.  이것은 반주가 함께 숨을 쉬어주어야 가능한 일이며, 반주자가 숨 쉬는 것과 무관하다. 다시 말해 손으로 숨 쉬는 타이밍을 만들어야 하지 내가 건반을 붙잡고 아무리 코로 큰 숨을 쉬어도 소용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노래를 함께 불러야만 어느 부분에서 숨을 쉬는 것이 적당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작과 마무리에서도 명확해야 하는데, 전주를 하면서는 어떤 템포로 불러야 하는지, 어떤 조성의 노래인지 알려주어야 하며 또한 성가 책을 펼치는데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것도 의식하고 있어야 한다. 즉 전주의 길이가 너무 짧아서도 안되고 노래의 시작 조성과 같은 화성과 리듬을 알려주어 사람들이 쉽게 노래를 시작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가끔씩 소수의 반주자들 중에는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면 그 후에 따라서 치는 그림자 반주자도 있고, 내가 시간 내서 반주해주는 게 어디냐는 막무가내 정신력의 소유자들이 아무런 준비 없이 오르간 소리만 내주는 음향 담당을 자처하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것을 컨트롤하기 위해서는 악보 그대로 치는 것이 아닌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이끌 수 있는 리더의 정신이 필요하다. 악보 보는 것도 힘든데 어떻게 그런 걸 다 신경 쓰냐고 하지 마시라. 진정한 평일 미사 반주자가 되려면 테크닉이 약간 모자라도 잘 들리는 귀와 열심히 미리 준비하는 자세와 이 사람들의 노래만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리더의 자질까지도 필요한 것이다. 쉽게 실력 있는 반주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성가대가 있는 미사 반주하기

미사에 성가대가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참석하는 신자수가 많기 때문에 신자들 스스로에게 노래를 맡기기엔 불안한 미사일 것이다. 교중미사나 다른 주일미사가 대부분이다.

여기에서는 반주자가 평일 미사보다는 어느 정도 마음의 여유를 누릴 수 있다.

지휘자가 박자와 음정을 안내해주고 큰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는 성가대원들이 있어서 악보를 눈으로만 봐도 큰 무리가 없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명과 암이 존재한다.

주일미사에는 반주해야 할 곡의 수가 엄청 많아진다. 대축일이나 복잡한 전례에 참여하게 되기도 해서 연주의 어려움보다는 전례의 어려움을 체험하게 된다. 그리고 성가대원들이 자신들의 노래에 반주해주는 사람으로 착각해서 그들의 연습시간에 초대도 받게 된다. 이 말인즉 연습으로 빼앗기는 시간이 몇 곱절 많아진다는 뜻이다. 주일에 미사 전후로 그들의 연습에 맞춰주고, 평일 하루 저녁까지도 시간을 빼앗긴다. 이것은 나의 연습시간이라기보다는 그들의 연습시간이다. 나는 나대로 연습을 해야 그 많은 양의 악보를 읽을 수 있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가대원들은 미사에서 신자들과 집전 사제를 도와 노래를 부르며 전례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자신들의 노래실력이 향상되고 자랑하기를 원한다. 그래서 성가대에서 반주를 하다 보면 그들끼리 전례와 무관한 다른 문제로 싸우는 것을 많이 목격하게 될 것이다.

이 미사에서는 지휘자를 중심으로 반주를 하게 되어서 마음이 편하다는 장점이 있지만 지휘자 복불복의 경우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음악 전공을 하지 않은 지휘자, 전례를 잘 모르는 지휘자, 소리를 낼 줄은 알아도 듣지를 못하는 지휘자, 성격만 좋은 지휘자 등 예상을 뒤엎는 지휘자를 만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반주자가 아닌 오르가니스트라면 그토록 오랜 시간 고생해가며 공부했던 순간들이 무색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이러한 상황을 못 견디거나 뒤늦게 다른 재능을 발견하게 되어 지휘로 전향하는 오르가니스트들도 많다.

결국 성가대가 있는 미사의 반주자는 성가가 아닌 다소 어려운 악보를 봐야 하고 반주해야 할 곡의 양이 많아지고 시간의 할애를 많이 해야 한다는 점과 많은 사람들과 부딪히는 게 되는 상황의 피곤함 외에 다른 어려움은 없다.



오르가니스트로 살아가기



지금까지 반주자로서의 해야 하는 일들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다.

이렇게 반주자로 지내는 일은 연주를 하고 악보를 보는 일이라기보다는 희생과 봉사, 인내로 스스로를 수양하는 일이라고 볼 수가 있다.  반주를 하다 보면 신자들의 수군거림이나 질책을 듣는 날도 많고, 내 시간과 노력을 포기해야 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신앙이 바탕에 있기 때문이 오랜 경험이 있는 반주자라면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평일 미사가 됐든 주일미사가 됐든 한국의 OO성당 반주자로서만 의 삶을 살지 않기를 바란다.

사실 서양에서 오르가니스트였다면 (거기에서는 미사 반주자라는 말은 없다.) 희생이나 인내의 요구 없이 신앙 안에서 온전히 음악적인 역량을 발휘하며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한국 교회에서는 반주자를 조용히 미사 전례를 유지하는 도우미 정도로  여기는지 모르겠다.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으로 인해 다수의 사람들이 반주자를 희생의 아이콘으로 여기게 그냥 두지 말라.

오르간이라는 악기는 위대하고 지극히 예술적이며 더불어 신앙까지 품고 있다.

실제로 빈 성전에서 홀로 오르간을 연주했을 때 감동하며 기도하게 되는 일은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오르간이 영혼을 울리는 유일한 악기라는 이야기는 고생하는 반주자에게 하는 실없는 격려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악기를 연주하고 음악을 즐길 줄 알게 된 것은 하늘에 계신 전능한 분의 선물일 것이다. 

오르간 음악을 알고, 예로부터 교회에서 유일하게 연주가 허용된 이 악기 대해 그 이유를 탐구하고, 제대로 듣고 연주하며 그분의 선물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진정한 오르가니스트가 되어 보는 것은 어떠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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