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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노 Aug 12. 2022

남을 적당히 시샘하며 사는 삶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 만들기 참 힘들다


드러내고 싶지 않고 들키고 싶지 않은 감정을 손에 꼽으라 하면 그건 질투다.




질투는 이런 저런 상황에 따라 나를 쫌스럽게 만들기도 하고 부끄러우며 공허하도록 만든다. 특히, '시샘'으로 인한 누군가와의 관계가 소원해짐은 쫌스러움의 극치라고 볼수있다. 물론, 긍정적인 영향도 있다. 적지 않은 동기부여를 선사하며 '질투는 나의 힘'이 될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말이다.




'자랑하고 싶은거 있으면 얼마든지 해' 라며 리듬이 없는 듯 있는 듯 몽환적인 분위기로 하품하며 말하는 장기하는 누군가를 질투해본적 없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유복한 집안에서 똑똑한 유전자를 물려받아 명문대를 나온 사람은 정말 하나도 부럽지가 않은 걸까. 




어렸을 적, 나는 대전에 살았는데 초등4학년 때 울산으로 전학을 갔다. 그곳은 사투리가 정말 심했다. 적응하기가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내성적인 성격에 사투리까지 더해져 그곳에 녹아들기 더 어려웠다. 학교가 끝나면 누나하고 동생하고 집에서만 놀았고 놀 꺼리가 더 이상 없어 심심하면 학교 문제집을 풀며 놀았다. 




그러던 어느날, 동생이 큰 교통사고를 겪었고 수개월 입원 후, 우리가족은 다시 대전으로 이사를 갔다. 전학을 간 학교는 학생수가 어마어마했다. 내성적이던 나는 벌떼처럼 모여있는 학생들에 더 주눅이 들어 친구사귀기가 쉽지 않았다. 




전학 한달 후, 첫 월례고사를 치루고 난 다음 날, 교실 칠판에 커다란 글자가 써 있었다. "전학생 전교2등!" 우리 반에는 로보트처럼 공부만 하던 단 한번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던 '허ㅇㄱ'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평균점수 0.5점차 2등을 했던 것이다. 울산에서 친구가 없어 문제집 풀며 놀았더니 효과가 있었나보다. 반 친구들이 나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친구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한 친구의 집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5층짜리 아파트의 3층에 위치한 그 집의 문을 여는 순간, 익숙치 않은 향긋한 내음새가 코로 스며들어왔다. 우리 집에서 맡던 냉장고에서 새어나오는 반찬냄새, 빨래다이(건조대)에 걸쳐진 빨래들에게서 나는 피존냄새가 나지 않았다. 




쇼파가 있는 거실을 지나 친구녀석의 방으로 들어가니 그 녀석 엄마가 과자를 갖다 주셨다. 학교 다녀 왔는데, 집에 엄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놀라지 않은 척 방을 둘러봤던 기억이 난다. 이불이 가지런히 놓인 침대와 책상, 그리고 책장 비스무리한게 보였다. 그곳에는 친구녀석이 입던 티셔치와 바지들이 백화점 옷가게에 진열해놓은 옷들처럼 이쁘게 접혀 있었다. 티비에서 보던 미국 드라마 속 방처럼 느껴졌다. 




'뭐지 이 곳은?' 


친구 녀석의 아빠는 중소기업의 사장이라고 했던거 같다. 그 녀석의 집은 나에게 알 수 없는 감정을 갖게 해주었다. '거실 쇼파에 모여 티비? 식탁에 앉아 밥을? 옷이 진열이 되어있는 방? 방과 후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집?' 그 집은 내가 살던 집과는 많이 달랐다.





그 친구와 거리가 멀어진건 그 때부터였던 것 같다. 전교2등이라는 성적을 받고 난 후, 5미터 정도의 거리로 다가왔던 그 친구와 그 때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던 것 같다. 20미터 정도의 거리로 졸업할 때까지 그리 서먹하지도 그리 친하지도 않게 지냈다. 다툰적도 없고 그렇다고 그 친구가 못된것도 아니었다. 친절하고 괜찮은 녀석이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초등 5학년 때 느꼈던 그 알 수 없는 감정은 '시샘'이었던 거 같다. 


질투라는 감정이 관계의 거리에 영향을 준 것이다.




40대 중반이 된 지금, 그 때의 그 '시샘'은 여전히 날 떠나지 않고 있다. 


관계의 거리조절에 영향을 주며 쫌스럽게 만들고 날 부끄럽게 만든다. 또한 긍정적인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마냥 나쁘지만은 않다. 



어쩌면 장기하가 '부럽지가 않어'라고 말하는 속내는 


'남이 부러워하는 인생 만드는거 힘들잖어, 그냥 남을 적당히 목도하고 적당히 시샘하며 살어'라고 말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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