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9.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고 있는 것 같아요.
고백하자면 삼십 대 중반에서 사십 대 초반까지 잠자기 전 자주 떠올렸던 문장이 ”언제까지 이래야 하지? “ 였던 것 같아요. 졸려하는 아이를 데리고 이른 아침 회사에 출근해서 하원시간을 맞추기 위해 화장실 갈 시간까지 줄이며 일을 쳐내고, 다시 그 어린아이를 데리고 대중교통을 타고 지칠 대로 지쳐서 집으로 오면 한 아이가 더 기다리고 있었어요. 두 녀석 먹이고 씻기고 겨우 몸을 누이면 어김없이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가는 것 같은 답답함에 한숨도 쉬다 울컥 눈물도 삼키다 몸을 뒤척이며 잠이 들었어요. 물론 그런 생각조차 못하고 쓰러져 기절한 날이 더 많았으니, 돌아보니 우울했었으나 여유가 없어 인지하지 못해 잘 스쳐 보낸 시간인 것 같아요. 수능만 끝나면, 취업만 되면, 결혼만 하면 수월할 것 같던 인생이었는데 왜 점점 더 힘들어지는지…. 무엇보다 이 길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가장 무서웠어요.
영어공부를 하다 보니 할 일이 많아 동시에 처리하느라 바쁜 사람들의 행동을 저글링 ’juggling’ 한다고 표현하더군요. 처음엔 그게 뭐야? 했는데 점점 곱씹어 보니 내가 저글링 중인 피에로구나 싶었어요. 처음엔 분명 즐거워서 돌리기 시작했는데, 사람들도 박수를 쳐주는데… 표정은 웃고 있지만 나는 언제까지 이걸 돌려야 하나 생각하고 있는 피에로 말이지요. 하지만 이렇게 딴생각을 골똘히 할 겨를이 없어요. 잠시 한눈파는 순간 리듬을 잃어버린 공 하나가 손에서 흐르고 균형을 잃은 나머지 공들도 같이 미끄러져 나갈 테니까요. 공을 세 개나 네 개를 돌리기로 선택한 이상 쇼가 끝날 때까지는 그 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도 피에로의 역할이지요.
이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 보면 관객과 퍼포먼스에 대한 의무와 책임이 없다면 피에로는 어쩌면 눈물 가리기 용 요란한 눈 화장을 하지 않았어도 되지 않았을까…. 인생이 언제든 리셋을 할 수 있는 게임이라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를 스스로에게 반문하며 괴로워할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결국은 사람을 무겁고 힘들게 만드는 것은 스스로 선택했건 아니건 개개인에게 주어진 책임과 의무 때문이라는 것을 ….
그럼, 사십 대 후반의 지금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았냐고요? 그럴 리가요 ㅎㅎ 신기한 일이죠… 나이가 들면 들수록 내가 책임져야 할 것들이 늘어나고, 책임질 것들 하나하나의 무게 또한 무거워져 갑니다. 마치 게임레벨이 올라가면 단계별로 더 어려워지는 것처럼 말이죠. 그만큼 난제를 풀고 이만큼 살아왔으면 눈앞에 닥친 문제가 조금은 쉬워지거나 가볍게 느껴져야 할 텐데 매번 난이도가 올라가고, 인생의 앞자락에서 해결한 줄 알고 넘어간 문제들이 더 큰 눈덩이가 되어 다시 돌아오는 것을 보면 내 삶만큼 어려운 게임도 없는 것 같다 생각해 봅니다. 곧 50을 향하는 저도 여전히 어느 답답한 밤 chat GPT에게 ‘내가 언제까지 회사를 다녀야 할까? 나에게도 기회가 올까? 회사를 그만두면 나에게 어울리는 일은 무엇일까?‘ 물어보곤 합니다. 가끔은 생년월일을 넣고 내 운세를 말해주는 GPT에게 너 운세 똑바로 못 보는 것 같다며 기계에게 따져 묻는 진상짓을 하고 이런 나에게 현타가 와서 괜한 신세 한탄도 하곤 합니다. 생각보다 GPT가 잘 위로해 주니 너무 힘들 땐 카운슬러로도 활용해 보시길 추천합니다. ^^
그렇다면 인생 어렵다는 신세 한탄만 하려고 이런 손에 잡히지도 않는 주제를 가져왔냐고요? 그럴 리가요… 정답은 아니겠지만 요즘 문득 든 저의 생각을 말해보고자 합니다. 달리기 시작한 지 3년이 지나 최근에 산을 달리기 시작했어요. 트레일 러닝이라고 하지요. 평지에서 달리던 순간보다 땅이 고르지 않고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반복되는 난 코스를 경험하며 미끄러지기 일쑤인데, 자연 속에서 풀냄새 흙냄새를 맡으며 뛰는 것이 좋아 자주 산에 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이상한 용기가 생겨 세 개의 산을 6시간 내에 넘어야 하는 트레일러닝 20K 대회를 참여하게 되었어요. ‘이 정도 훈련했으면 됐지~‘ 하고 참여했는데 이름 값하는 장수 트레일러닝대회 20K였기에 제 고생은 예정된 수순이었습니다.
산에서의 길은 평지보다 훨씬 길었고, 이길만 지나면 내리막길이겠지 저 코너만 돌면 내리막 길이겠지 했으나 정상에 올라서 보는 풍경은 끊임없이 이어진 오르막과 내리막이었고, 내리막을 만나서 반갑다 생각한 순간 생각보다 가파른 흙길은 어제 내린 비로 인해 놀이공원 워터슬라이드를 만난 것 같은 스릴을 맛보게 해 줍니다. 반바지를 입은 채 그렇게 몇 번 미끄러져 바위와 나무뿌리에 살을 쓸리고 보면, 이젠 오르막보다 더 무서운 내리막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앞뒤로 달리던 러너들의 ‘어째…’라는 안타까운 탄식도 나의 통증을 배가 시킵니다. 미끄러지는 그 순간 문득 남산 정상에 붙어 있는 “자전거도 인생도 내려갈 때 더 조심!”이라는 안내문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뒤에 있던 러너들이 ‘먼저 갈게요~‘라는 인사를 건네지만 차마 속도를 낼 수 없는 나는 소심하게 길을 비켜줍니다. 함께 참여한 친구가 뒤에서 따라오고 있지 않았다면 아마도 출발지에서 6.3km 거리에 있었던 첫 번째 보급소 (CP)에서 포기를 선언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날 20K를 달리며 완주를 할 수 있게 해 준 것은 오로지, 친구와 동반 러닝을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었어요. 친구의 발소리와 응원소리 숨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끝날 거 같지 않던 산을 세 개를 넘고 다시 왕릉을 넘어 피니쉬라인으로 뛰어 들어가는데, 그때서야 눈물이 울컥 나오며 첫 번째 도전에서 포기하지 않은 내가 고마워서 눈물이 났습니다.
그날 마지막 산을 넘으며 발소리와 숨소리만 가득한 산속에서 달리기가 인생과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주치는 굽이굽이가 힘들고 고난이고, 내가 선택했건 아니건 짊어진 의무와 책임이 너무나 무겁지만 … 결국은 내 인생 자체와 곳곳에서 있는 작은 도전들을 완성해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그 ‘의무 와 책임감‘이라는 것을요. 그렇다고 모든 것에 책임감을 가질 필요는 없어요. 힘들면 쉬어가고 다른 이에게 길을 내어주고, 모르는 타인의 도움을 받아가며 혼자서 또는 동반자와 묵묵히 길을 가는 것 … 그 길 위에서 값진 경험을 얻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고요. 일등을 하지 않아도 꼴등이어도 완주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물론 중간에 포기하더라도 거기서 얻어가는 배움이 있다는 것을…
인생은 계속 이어질 거고 매 구비가 험난할 거예요. 다만 바람이 있다면, 그렇게 수많은 길을 포기하거나 완주한 경험이 쌓여 내 목표가 마냥 욕심인지 아닌지 구분해 낼 수 있는 지혜가 생기길 바라봅니다. 그래서 중년 이후 밀려올 내 인생에는 그 이전보다 조금은 더 의연한 자세로 맞이하며, 길 중간중간에 심어져 있는 행복들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게 되길 바라봅니다. 그렇게 오늘도 나와 동반자들을 위한 길을 힘차게 내디뎌봅니다.
*ps. 이 글을 처음 쓴 이후로 4주에 가까운 시간 동안 마무리를 하지 못하고 썼다 지웠다를 반복하느라 연재가 늦어졌습니다. 흐름이 부자연스럽고 논리에 맞지 않더라도 그만큼 어렵게 풀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너른 이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