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언니의 카톡 한 줄

Q8. 일은 잘한다면서, 좀처럼 기회를 주지 않네요.

by 일하는 노진지씨

며칠 전 화난 후배가 전화로 성토한 이야기인데, 저도 지난 시절 숱하게 고민했고 여전히 제 마음을 어지럽히는 부분이다 보니 오늘은 이 이야기를 해보려고 해요. 저의 별거 없는 생각을 풀어놓기에 앞서 질문을 다시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보여 이 부분을 먼저 짚고 갈게요. 질문의 대상자는 상사나 협업 조직으로부터 또는 업무경험이 있는 동료나 후배 등 타인으로부터 일을 (제법)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일을 잘한다고 셀프 평가하는 사람은 아니에요~ 어떠한 형태가 되었든 타인으로부터의 평가! 를 기억해 주세요)


일을 열심히 또 잘 해내는 그런 분들에게 특정 시기가 되면 듣는 이야기가 있어요. “일은 내가 다 하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승진했어. 나 이용당한 거 같아… 회사 때려치울까?”라는 한탄을 하고, “아니… 널 두고 왜 저런 사람이 승진을 해? 술이나 한잔 사줄게.”라는 주변으로부터 받은 위로를 전달하며 나의 억울함에 대한 근거를 보충하지요. 저 또한 수많은 위로도 받아보고, 위로를 해주기도 했고, 열받아 때려치운다는 소리도 격하게 해 본 적이 있기에 누구보다 이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어요.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 지금 현재 그런 고통에 빠져있는 분이 있다면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합니다)


한국의 직장에 다니는 우리들에게 ‘기회‘란 승진이 가장 보편적이고, 그 외 ‘회사 지원학위과정 진행’과 ‘주재원 발령’ 정도가 이에 해당되지 않을까 합니다. 개별건으로 주어지는 인센티브는 실적에 대한 보상에 가깝다 보니 미래를 향한 투자의 의미를 담고 있지는 않아 ‘기회’의 범위에서는 제외할게요. 좀 곁가지이지만, 저 세 개의 기회중 하나라도 회사로부터 제공받은 적이 있는 사람은 불평불만 접어주세요. 적어도 당신은 회사나 상사로부터 한번 이상의 기회를 부여받았던 적이 있으니까요. 오늘은 그 한 번의 기회가 올 듯 말 듯 결국은 받지 못해 속상한 사람들을 위한 위로의 글이니까요.


지난 10년간 조직개편이나 인사 시즌이 돌아오면 남편은 저에게 정신 차리라며 일침을 합니다. “일은 다 해주고 결국 다른 놈 좋은 일 시키는 호구 같아.” “아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야. 그냥.. 나는 일이 잘 되길 바라서.. 그러면 좋으니까. “ ”그 일이 잘 된다고 솔직히 너한테 뭐가 좋냐? “ 내가 일하는 것을 항상 응원하는 남편이지만 일에 끊임없이 공들이고, 별거 아닌 작은 보상에 즐거워하는 저를 보는 일은 그도 편치는 않았나 봅니다. 남편의 그런 말이 처음에는 나를 부정하는 것 같은 고통을 주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곱씹어보니 그 어떤 형식적인 위로와 ‘다음에’라는 의미 없는 약속보다 더 현실적으로 다가와 일에 대한 저의 자세가 바뀌는 계기를 만들어주었어요.


그렇다면 일에 대한 저의 자세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설렁설렁해볼까? 생각도 해봤지만, 일이 잘 못 되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어하는 제가, 제 손에 들어온 일을 대충 처리하긴 어렵라고요. 그러는 사이 시대의 변화와 경험의 누적이 저의 ‘기회‘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게 만들어주었고, 통속적인 ‘기회’가 주어지지 못했음에도 다행히 아직도 즐겁게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기회‘에 대한 해석이 어떻게 바뀌었냐고요?

‘기회‘가 꼭 승진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거죠.


조기 은퇴 또는 실직이 누구에게나 언제든 찾아올 수 있는 단어가 된 세상에서, 오랜 기간 몸 담아 온 안전한 온실밖으로 나가 경쟁력을 가지기 위해서는 한 분야의 이름난 전문가(Specialist)가 되거나, 반대로 일의 본질을 잘 이해해 여러 분야를 아우르는 Generalist 가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저처럼 대기업에 오랜 시간 안주해서 다니던 사람이 어느 순간 나가려고 돌아보면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었어요. 대기업의 경우 부서별 분업이 철저하게 이루어져 있다 보니 한 부서에서 30년을 근무했다 하더라도 해당 분야의 업무 전체를 경험하기 어렵고, 외주 서비스나 다양한 인프라의 도움을 받다 보니 전문가보다는 기획 관리자의 역할을 더 많이 하게 됩니다. (기획관리도 정말 잘하는 전문가들도 있습니다) 정말 뾰족하게 전문가처럼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명함이 사라진 순간 칼끝은 뭉툭해지고, ‘그래도 나는 기획관리업무를 잘했으니까 ‘ 라며 Generalist라고 주장하고자 해도 완벽한 시스템에서 나와 홀로서기를 하려 보면 내가 직접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적었는지를 깨닫게 되지요. 극 소수지만 운 좋게 계속 승진을 해내는 사람의 경우 업무 범위가 점점 넓어지면서 오히려 Generalist가 되지만, 애매하게 한 번의 조직리더 승진 후 멈춘 사람의 경우는 관리자의 시간이 길어지며 구성원대비 직접 해결할 수 있는 일은 더욱 적어지게 되죠. 그래도 한 번이라도 승진하신 분들은 그게 어떠한 이유에서건 조직으로부터 관리자가 될 수 있다고 인정받으신 분들이니까, 그렇지 못한 분들 대비 또 하나의 경쟁력을 보유하게 된 것은 사실이에요.


여기까지 이야기가 흘러왔으니 이제 제대로, 그렇지만 여전히 별거 없는 저의 ‘기회‘에 대한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해드릴게요. 32살, 회사 입사 후 5년이 지난 어느 날, 바쁘게 움직이는 사무실의 흐름을 보며 ‘언젠가 회사를 나가게 된다면 ‘유사하거나 작은 규모의 회사로 이직‘을 하거나 ‘1인 사업자‘가 되어야겠지 ‘라는 생각을 했어요. 과정은 어떻게 되더라도 결국 내가 일을 놓지 않는 한 1인 사업자의 길을 가게 되겠구나라는 깨달음을 얻게 된 그때 ‘퇴사하기 전 이 대기업 시스템 안에서 필요한 것을 최대한 많이 배우고 가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 뒤 부서이동이나 업무를 고를 수 있는 기회가 생길 때마다, 1인 사업자가 된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안 해본 일‘이나 ‘습득 후 향후 도움이 될 것 같은 일‘을 찾아다녔고 차곡차곡 경험치를 쌓아갔습니다. 그 경험은 일을 넓게 볼 수 있는 시야를 갖게 해 주었고, 업무 전체 흐름을 보고 이슈와 그레이 영역의 일을 해결하고, 조직 간의 시너지를 찾아내는 일을 쉽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만으로 홀로서기를 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월급을 받으며 1인 사업자를 준비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는 마인드로 회사를 다니고 있습니다. (물론 매번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하고 있습니다. ^^)


그래서 답답한 상황이 생기면 이렇게 되뇝니다. ‘이곳은 은퇴 후 나의 거름이 될 학교다!’ (이것도 정신승리인가요? ^^)


지금 기회가 닿지 않는 것 같아 실망스러운 분들이 계신다면, 그런데 당장 솔루션이 보이지 않는다면, 지금 있는 그곳에서 ‘나만의 기회’를 찾아보는 것을 제안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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