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보니 오늘 상담의 말미에는 집에 남아 있는 떡볶이에다 맥주 한 잔을 마시고 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떡볶이와 맥주 생각은 아주 잠깐이었지만 강렬했다. 그 생각은 상담을 마치고 집에 올 때까지 없어지지 않았고, 늘 그랬듯 동네 마트에서 천백 원을 주고 500ml 발포주 캔 하나를 샀다. 지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뭐랄까, 김빠지고 시금털털한 발포주의 맛(?)을 음미하며 아껴 마시는 중이다. 다이어트 중이니까 떡볶이는 생략하기로 했는데, 정말 큰 마음을 먹어야 했다. 꺄, 이 몸에 별로 안 나쁠 것 같은 맛, 발포주가 최고야. 알코올 농도가 낮고 달아빠진 음료수 맛의 술은 싫어하는 내가 요즘 유일하게 마시는 술이 바로 발포주다.
“다시는 술을 마시면 안 돼요. 다시는.”
A 대학병원 의사 선생님의 살짝 동그란 금테 안경 프레임 사이로 보였던 내 눈에 도장을 찍는 듯한 눈빛과 단호한 어조를 기억한다. 그게 4년 전이었나. 그 뒤로 한 2년은 절대 입에 술을 대지 않았는데 슬슬 고삐가 풀려서 편의점에서 맥주 캔을 하나 사서 마셔보았고, 죽을 것 같진 않았지만 오랜만에 마시니까 다음 날 숙취로 너무 힘들긴 해서(원래 술이 약한데, 한때 와인을 미친 듯이 마신 적이 있었다) 이것저것 마셔보다가 결국 발포주에 정착했다.
힘들고 외로울 때나 이유 없이 공허한 저녁, 나에게 뭔가 보상을 해주고 싶을 때 어김없이 나는 발포주 캔을 한두 개 산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엔 그때 그 의사 선생님의 레이저처럼 빛나던 눈빛과 엄격한 말투가 낙인처럼 찍혀 있다.
괜찮지는 않지만 괜찮겠지, 계속 약을 먹고 있으니까. 어차피 나와 오래오래 함께 할 병인데 발포주 한 캔쯤이야, 나는 나를 다독여본다. 하지만 발포주도 줄여야겠지, 사실 아예 끊는 게 좋겠지. 발포주는 언제나 저녁에 마시게 되고, 그럼 저녁약을 먹는 시간과 오버랩이 되기 마련이다. 언제나 꺼림칙한 동행이다.
근데 그럼 나는 내게 뭘 먹일 수 있는 거지. 몸에 나쁘고 맛있는 걸 하나쯤은 먹고 살고 싶은데안 되는 걸까. 잠이 잘 오지 않아 하루 한 잔의 아메리카노도 오직 아침에만 그것도 디카페인으로 마시려고 애쓰는데... 이미 들을 때로 들어버린 나이와 매사 시들해져버린 감성, 인생의 단맛은 다 빠진 것처럼 흑백무성필름처럼 흘러가는 일상. 이런 나에게 삶의 재미란 무엇이어야 할까, 이 나이를 먹도록 나는 그것을 잘 몰라서 헤매고 있나 보다.
발포주 한 캔쯤은 몸속으로 빠르게 흡수된다. 다음날 숙취가 없으려면 이 정도가 딱 좋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는 소리와 배경음악으로 깔아둔 백예린의 몽환적이고, 뭉개지는 영어 발음이 일품인 신곡들이 기분 좋게 어우러진다는 생각을 한다. 아직 읽어보진 않았지만 <밤이 스승이다>라는 책 제목은 참 잘 지은 것 같아. 이 놈의 의식의 흐름! 자나깨나 나는 생각이 과도한 동물이라니까.
아무튼 요즘 내게 유일한 삶의 낙은 수요일 저녁, 일주일에 한 번씩 찾아가는 옆옆 동네 심리상담소다. 오늘 5번째 심리 상담을 받았다. 그동안은 탐색전이랄지, 내 정보를 공유하는 차원이랄지, 선생님과 내가 라포를 형성하는 과정이었다면, 오늘은 조금 더 진지하고 본격적인 느낌으로 질문이 훅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내 머릿속에 들어앉아 자꾸만 불안과 두려움을 만들어내는 생각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선생님은 상담으로 불안을 없앨 수는 없지만, 내 나름대로 불안을 다루는 방법을, 불안과 동행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낼 순 있다고 하셨다. “선생님은 사는 게 불안하지 않으세요? 요즘 같은 세상에도 안전하다고 느끼세요?”라고 묻고 싶었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불필요한 질문에 선생님이 답하실 이유는 없다. 우리의 상담 시간은 늘 부족하다고 느껴지는데, 사실 내 얘기를 털어놓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데만도 진이 빠지기 일쑤다.
참, 오늘 새롭게 배운 거, 잊기 전에 적어둬야지. 불안해서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할 때 3단계면 충분하다고 한다. 첫째 알아차린다. 아, 내가 또 불안해서 오지도 않는 상황들을 당겨서 미리 걱정하고 있구나, 하고. 둘째, 한 손을 가슴께에 올리고 셋째, 기왕이면 혼잣말을 하면 더 효과가 좋다. “내가 지금 불안하구나. 두렵구나. 그래서 가슴이 뛰고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르는 구나”하고.
그리고 진짜 귀한 걸 하나 더 깨달았다. 이건 지금까지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영역이라 나는 조금 흥분하기까지 했다. 왜 나는 불안할 때 누군가 내 뒷담화를 하고 있다고 상상을 할까, 왜 주로 두 사람의 대화일까, 왜 나는 번번이 그런 생각들을 만들어낼까?
왜 그런 생각들을 하는지 생각해 보셨어요?
실제 있었던 일이 아니라 스스로가 생각하는 거잖아요.
조심하라고요. 더 안전하라고.
내 입에선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답이 튀어나왔다. 내가 꽤나 모험주의자인 줄 알고 살았는데, 물론 나이 탓도 있겠지만, 나도 모르는 사이에 세상 둘도 없는 안전주의자가 되어버렸나 보다. 나의 심리적 현실은 대체 얼마나 부서지기 쉽고 비무장지대처럼 두려운 곳인 거지.
같은 생각인데 해석이 달라졌네요.
불안하고 불편한 뒷담화가 아니라
조심하고 안전해지라고 내가 나에게 해주는 얘기로.
그러게요. 정말 그렇네요.
오랫동안 나를 괴롭혀온 불편한 생각들이 실은 내가 나를 보호하려고, 나의 안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지어내는 시나리오였음을 알게 된 날.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잊고 싶지 않아서 이렇게 기록해둔다. 앞으로도 잘 부탁해. 나의 불안, 나의 불편, 나의 고통이자 나의 안전지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