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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리하는유리 Nov 02. 2020

그래도 가끔 고기가 먹고 싶지 않아?

유난스러운 채식주의자에게 묻는 일곱 번째 질문

꿈을 꿨다. 원형 탁자에 틈 없이 빽빽하게 놓인 반찬 접시들, 그 가운데 놓인 구이판. 그 위에 지글지글 익고 있는 살점들, 연기 자욱한 식당 안. 익어가는 고기를 쳐다보는 나. 나는 젓가락을 손에 쥐고 입맛을 다시고 있다. 동시에 상추를 손에 얹고 쌈을 쌀 준비를 하는 꿈속의 내 모습을 보며 소스라치게 놀라 잠에서 깼다.


쌈장까지 척 올린 쌈을 입으로 가져가는 순간이었다. 고기가 입에 들어가기도 전에 깼으니, 꿈속의 내가 고기를 정말 맛있게 먹었는지 아님 우물거리다 그제야 살점의 감촉을 느끼고 이내 곧 뱉었는지는 모를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입가에 침이 흘러있었다. 정말 맛있다고 생각한 거구나. 누군가가 죽는 악몽을 꾼 것보다 더 찝찝하게 잠에서 깼다.


하루 종일 꿈속에서의 내 모습이 떠올랐다. 꿈의 해석은 우리를 무의식으로 인도하는 왕도라던 프로이트의 말처럼 이 꿈이 무의식의 내가 원하는 걸 알려주는 거라면, 현실의 나는 나 자신에게 잘못된 암시를 걸고 있는 건 아닐까? 괜히 비건이라는 이름에 나를 가두고 이 안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을 부정하고 있는 걸까? 평소엔 너무나 명확했던, 채식을 시작한 이유들이 내 머리를 더 복잡하게 했다. 가끔 나도 고기가 먹고 싶을 수 있지 않나? 그렇담, 그냥 먹어도 되지 않을까?


두부로 만든 비건 '미트볼' 스파게티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환경은 너무나 잘 갖춰져 있다. 내가 사는 독일 동남부 지역은 특히나 소시지와 독일식 돈가스인 슈니첼이 유명한 바바리아 지방이다. 토요일 아침이면 정육점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고, 길거리에는 두툼한 빵 사이에 소와 돼지의 살을 곱게 갈아 햄처럼 만든 Leberkäse를 먹으며 지나가는 사람들도 쉽게 볼 수 있다. 먹으려고만 하면 어디서든 고기는 쉽게 먹을 수 있다.


그렇지만 나는 고기를 먹지 않는다. 이건 나의 선택이고 내가 스스로 정하고 따라온 어떤 규율이 되었다. 스스로 선택한 규율의 맹점은 그 규칙이 내가 원하던 결과를 돌려주지 않더라도, 맹신하게 되고 내가 만든 그 굴레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 신념을 깨부술 만한 어떤 계기가 있지 않고서 그 행동의 준칙이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재정립하는 건 생각보다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이 찜찜한 꿈이 어쩌면 그 규율을 뒤흔들 계기가 아닐까 두려웠다. 채식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옭아매고 있었다면, 게다가 그것도 모르고 내가 정말 고기를 먹고 싶은데 그렇지 않다고 내게 주문을 외우고 있었다면, 그건 얼마나 멍청한 일인가. 꿈속에서 치-익하고 익는 살점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시던 내 모습이 다시 눈 앞에 서있다.


울타리 없이 뛰노는 페루의 라마들


채식에 입문하기 전 두려웠던 것 중 하나가 유동성 없는 사고방식을 갖는 거였다. 무조건 채식만이 옳고 잡식이나 육식을 하면 무지하고 잔인한 사람, 동물성 제품은 절대 먹을 수 없고 먹어서도 안 되는 것. 남에게 그런 잣대를 들이대며 편협한 채식인이 되지 않기 위해 노력했는데, 나도 모르는 새에 나를 고기로부터 막는 울타리를 만든 것 같았다.


채식인 회사 동료 중 한 명과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던 생각이 났다. 그녀는 생선 등 해산물은 먹고 고기만 먹지 않는 페스코테리언인데, 어릴 때부터 오랫동안 채식을 한 덕에 친구 중에 채식인이나 비건이 많다고 했다. 그중 한 비건 친구는 부모님 집에 갈 때만 육식을 해야 한다며 '고기 먹는 비건'이라고 동료는 웃었다. 가족 중 유일하게 채식을 하고 부모님이 모두 고기를 좋아하는 탓에 연휴 때 고향에 가면 좋든 싫든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식탁 위에 잘 차려진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기 요리, 가족들이 다 모인 연휴의 따뜻함, 둘러앉은 미소들을 보면서 그 비건 친구는 어떤 마음으로 고기를 먹었을지 직접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혹시 죄책감이 들었을까, 불편했을까, 아님 그저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식사를 한다는 생각에 맛있게 먹었을까. 어쩜 꿈속의 나처럼 입맛을 다졌을 수도 있겠다. 그리고 정말 맛있게 고기를 먹었을 수도 있겠다.


Photo by Lee Myungseong on Unsplash

유명한 비건인들이 고기를 먹다가 들켜서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모두 등을 돌렸다던가, 유명한 가수나 배우가 비건을 시작했다가 몇 년 만에 그만두고 „건강이 악화되어서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어요."라고 한탄하듯 탈 채식 선언을 하는 기사들을 읽었다. 그런 기사에 반론하며 유명한 채식인들을 비판하는 다른 채식인들의 블로그 글이나 칼럼도 읽었다. 이런 기사들은 사람들의 입소문도 빠르게 타고 논란거리가 되는데, 그건 비건이라는 이름이 지는 사회적 명목이 크기 때문이다.


비건은 음식뿐만 아니라 모든 소비에서 동물성 제품을 배제한 삶을 의미하는 데 이 이름이 나를 묘사하는, 나의 정체성 중 일부분이 되면 부처 같은 완벽한 생활을 해야 한다는 묘한 중압감이 생긴다. 그럼 고기를 먹는 행위가 '실패'나 '배반'으로 여겨지는데, 그래서 고기가 먹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마치 죄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내가 고기를 정말 먹고 싶은 건지 확인할 방법은 고기를 마주하는 수밖에 없다. 슈퍼에서 한 번도 눈길을 준 적 없는 정육점 코너에 앞에 서서 가지런히 놓인 붉고 조금은 거무죽죽해진 살점들을 내려다본다. 크게 숨을 들이켜며 짙은 비린내를 맡았다. 꿈속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몰라도 내 눈과 코 앞에 있는 지금 이 광경은 내 입 안에 침을 고이게 하지 않는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오직 이 유리로 덮인 진열대 안엔 내가 먹고 싶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내가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 있을까? 내 확고한 정답은 '아니요'이다. 현실이든 꿈이든, 자발적이든 혹은 우연히 고기(혹은 동물성 제품)를 먹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행위 자체가 스트레스고 고통일 필요는 없다. 스스로를 채식인이라, 비건이라 이름 부를 수 있는 전제 조건은 그 이름이 가지는 의미와 의식을 공유하고 그에 대해 동질감을 느낀다면 충분하다.


Photo by Jon Tyson on Unsplash


우리 채식인들은 '누가 더 완벽한 비건의 삶을 사나'같은 선발대회에 오른 후보자들이 아니다. 비건은 자신이 지향하는 삶의 방향을 묘사하는 대표어여야지, 꿈조차 불편하게 자신을 옭아매는 낙인이 된다면 즐겁고 건강한 비건 생활을 지속할 수 없다. 이 좋은 채식을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자주, 오래도록 하는 게 나에게도, 동물들에게도, 환경에게도 더 중요하다.


그 꿈은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다시 이어지지 않았고 나는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고기를 먹지 않았다. 정말 고기가 먹고 싶은 날이 온다면, 고기를 먹을 수도 있다. 혹은 평생 고기를 먹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선택을 끊임없이 존중하면서도 의문하행복한 비건으로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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