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베트남을 선택한 이유는 하나다.
추억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어서. 어떤 나라 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호치민에 도착했을 때 나는 베트남어 한마디도 할 줄 몰랐고, 부끄럽지만 지정학적 상식조차 없었다. 수도가 겨우 하노이라는 것만 알았을 뿐, 어디에 있는지, 날씨가 어떤지, 주변 국가가 어떤 나라인지, 경제규모는 얼마나 되는지, 우리나라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정말, 하나도 몰랐다.
내겐 그저 에메랄드 바다와 코끼리가 살고있는* ‘동남아’라고 엮여있는 국가 중 하나였다.
*그건 태국 관광상품이다! (현재는 동물학대 논란으로 줄어드는 추세이다.)
베트남에 도착하다.
열의가 있었던 프로그램 참가자 중 몇은 미리 베트남어 강의를 듣고 왔다. 연세대 다녔던 분은 학교에서 사전 언어교육이 있었다고 했다. 한 여자분은 대기업 유통사에서 5년의 경력을 쌓던 중, 회사를 관두고 이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했다. 의지없는 나와는 다르게 이미 몇번 베트남을 다녀간 뒤, 베트남의 가능성을 보고 지원한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들을 보니 내가 정말 운이 좋아서 여기에 왔구나, 하며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코트라에서 운영한 K-move 프로그램 1기라, 경쟁률이 적었던 모양이다. 베트남에 애정이 넘치거나, 실력이 쟁쟁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깍두기 같은 기분으로 호치민 공항에 내렸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느끼며 준비된 버스에 짐을 실었다. 버스가 공항을 빠져 나오며 보이는 풍경에 놀랐다.
생각보다 도시다. 얼마 있지도 않은 내 상상 속 베트남은, 논밭에 사람들이 갈색 식물로 엮은 삼각형 모자를 쓰고 있는 나라였다.
예상외로 많은 수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다.
베트남에 거주가 등록된 한국인이 공식적으로 20만명 가까이 된다. 이는 미국, 중국, 일본 등을 이어 6번째로 교민이 많은 국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수가 거의 한곳에 집중*되어 살았다. 호치민 부촌이라 불리는 7군, 푸미흥에 말이다. 프로그램 책임을 맡고 계신 과장님이 처음 우리를 데려간 곳이 이곳 푸미흥이다. 푸미흥이라는 대만회사가 개발한 계획 구역으로 국제학교와 거주구역, 상가건물이 어우러져 있다.
*과거 베트남-한국 첫 수교 이후(1992년) 한국인들은 떤선녓 공항근처에 모여살았다. 현재 2021년에는 2군과 7군이 한국인 밀집 거주구역이다.
푸미흥엔 크레센트라는 몰이 있는데, 인공 호수를 만들고 그 주변에 산책로를 닦아놓았다. 호수를 바라보는 아파트엔 수영장이 있다고 했다. 호치민 시내에 있는 수영장이 있는 아파트의 월세는 40스퀘어 기준으로 약 40~60만원 사이이다.
베트남과 한국의 교역량은 꾸준히 상승했다. 2015년 한-베 FTA 발효 이후 연평균 16.5%씩 교역이 급증하고 있다. 전체 교역의 약 9%를 차지하는 주요 교역국이다. 또한 한국은 베트남에 가장 투자를 많이 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현재는 코로나 상황으로 비자가 까다로워졌지만, 이전에는 3개월 관광비자를 무한정 연장하면서- 소위 비자클리어라 불리는 방법으로 3개월마다 캄보디아 국경을 방문하면서 -베트남에 몇년씩 거주하던 분들이 많았다. 비자에 관한 이야기는 5화에 다시 자세히 다루겠다.
베트남에서의 첫 저녁
현지음식을 먹고 싶었는데 과장님의 앞으로 한식이 그리울거란 강력한 주장으로 순대볶음을 먹으러갔다. 한국어 간판에, 한국어 메뉴. 베트남 종업원들이 한국어를 한다. 동남아라서 저렴할 것이라는 예상과 다르게 한국가격보다 조금 비쌌다. 제육볶음은 만원이 넘었고 부대찌개 2만원, 김밥과 같은 분식류도 기본 3천원이 넘었다.
물론 외국인 밀집지역이 아닌 곳을 벗어나면 식비는 저렴해진다. 2014년, 500원 700원이면 속이 꽉 찬 반미(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었고, 1500원이면 통통한 돼지갈비가 얹어진 밥 껌승을 먹을 수 있었다. 매운맛을 즐기는 베트남 사람들 식성이 나에게 잘 맞았다. 국물에 토마토가 들어가는 건 어색했지만, 지금은 좋아한다.
현재는 Grab, 배민, Foody 등 배달앱이 나와 거의 대부분의 음식이 배달이 가능하다. 로고가 있는 가게의 메뉴 가격은 2014년과 비교하여 최소 2배가 넘게 올랐다. 가격 상승의 이유엔 물가상승률 외에도 ①배달어플의 수수료 ②다른 점포의 가격을 알게 된것도 영향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2014부터 2021사이 매년 평균 4.5% 물가상승률을 보였는데, 그에 비해서도 가격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첫 달, 기숙사 생활
우리는 호치민인문사회과학대학 앞에 위치한 DMA라는 곳에 짐을 풀었다. 2인 1실을 사용하는 기숙사 였는데, 처음 부모님의 품을 떠나 독립한 것이라 설레었다. 기숙사 문 바로 앞엔 6스퀘어 크기의 정사각형 중정이 있었다. 도착한 시기가 5월 말, 우기의 시작이라 방에 앉아 중정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곤 했다. 2시간 정도 세차게 내리는 비와 파릇한 열대의 풀을 보며 타국에 온 정취를 즐겼다. 호치민은 1년의 반씩 건기와 우기로 나뉘는데, 5월~11월까지 우기라 하니, 건기는 못보고 집에 가겠구나 했다. 한국의 추위가 버거웠던 나에게 아주 알맞는 기후였다.
3개월간의 교육은 빡빡한 일정이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 언어교육이 있고, 금요일에는 정치, 경제, 케이스 스터디, 멘토링, 공장탐방이 이루어 졌다. 언어교육은 꽤 밀도가 있었다. 하루에 총 6시간 베트남어와 2시간 영어를 배웠다. 3개월안에 베트남 직원들과 간단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베트남어는 영어알파벳과 비슷하게 생겼다. 대신 모음에 삿갓이라든지, 접시같은 모양이 달려 총 6개의 성조를 가진다.
첫 베트남 친구
한달정도 베트남어를 배우고나니 써먹고 싶어졌다. 어느날 학교 앞에 beetalk이라는 앱을 광고하는 마케터들이 왔다. 노란색 바탕의 벌이 그려진 채팅 앱이었다. 마케터들이 친구를 사귈 수 있는 앱*이라 소개하여, 그날 다운받아 이용하기 시작했다. 위치를 지정하니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리스트에 보였다. 배운 베트남어를 시도해 보았다. 상대방이 답변해주지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극히 적었다. 서로 하고싶은 말을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인사하고, 나이를 묻고, 베트남어를 공부하고 있다, 한국사람이다, 베트남에 온 지 한달 됐다, 베트남 음식을 좋아한다의 말을 하고 났더니 더이상 아는 문장이 없었다. 여러명에게 같은 내용을 반복하는 가운데, 답답했던 상대방 하나가 영어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나중에 알고보니 데이팅 앱이었지만 내 베트남어를 향상시키는덴 도움됐다. 현재는 서비스를 종료한 앱이다.
뉴질랜드에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녔다는 남자는 나보다 4살 많았다. 친구가 이 앱의 개발자라며, 피드백을 위해 사용해 보는 중이라고 했다. 뉴질랜드에서 유학하던 시절을 떠올리며 동변상련을 느꼈는지, 베트남에 온지 얼마 안된 나를 위해 맛집을 소개해 준다 했다. 오프라인으로 만나는건 불안할 테니 자신의 명함을 보내 신분을 밝히고 여자사람친구를 데려가겠다 했다. 룸메이트였던 언니와 함께 나갔다. 그가 우릴 데려간 곳은 냐항응온(nhà hàng ngon), 맛있는 식당이라는 뜻을 가진 관광객들이 필수로 찾는 식당이었다. 양옆으로 시장처럼 늘어선 테이블 위엔 다양한 음식들이 조리되고 있었다. 메뉴판에서 골라 시켜도 좋고, 그 자리에서 음식을 골라도 됐다.
뚜안(Tuan)과 팜(Pham)은 내가 처음 사귄 베트남 친구였다. 그 후 뚜안은 나에게 끼안(Ky Anh)이라는 스위스국적의 베트남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비엣끼우(Việt kiều)라고 불리는 이들은 우리나라로 치면 교포들이다. 베트남도 한국과 같이 분단된 국가였다. 1970년대 남북전쟁이 있었고 공산화가 싫었던 부유층, 중산층, 반공주의자들이 베트남을 탈출해 난민이 되었다. 유럽과 미국에 정착한 이들에게 자녀가 태어났고 아이들은 그 나라의 국적을 취득하며 베트남교포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은 30대가 되어 부모의 나라로 돌아와 살기 시작했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은 해외의 경험을 살려 사업을 하기 시작했다. 교포사회는 좁았고, 끼안은 발이 넓어 사업하고 있는 대부분의 비엣끼우를 알았다. 그를 통해 다른 비엣끼우들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은 스위스, 프랑스 국적의 친구들이었다. 이때 만난 친구들 덕분에 훗날 나는 스위스로 이사를 간다.
이들 덕분에 베트남 생활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날씨도 맘에 들고 음식도 잘 맞았다. 부모님의 품을 떠나 처음 느껴보는 자유도 좋았다. 베트남에 살기 시작한지 한달 반, 나는 이때부터 적극적으로 하반기 3개월을 근무할 회사를 찾기 시작한다.
사는곳을 바꾸었더니...
나는 이때 알게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삶이 달라지지 않거나, 고여있다는 기분이 들면 사는 곳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밟고있는 땅이 달라지기만 해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다. 내 경우엔 아예 해외로 나간거라 조금 극단적이긴 하지만 분위기가 다른 동네를 바꾸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 같다. 자주 가던 슈퍼, 커피숍등이 당연히 달라진다. 새로운 것들을 배우느라 우울함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여의치 않다면 매일 출근하는 길을 바꿔 보거나 가구 위치를 바꾸어 봐도 좋다. 눈이 새롭게 느끼면 생각의 변화가 생긴다. 노력해도 바뀌지 않던 습관들이 생각이 바뀌니 자연스레 변화한다. 예대를 다니는동안 교수님들의 ‘많이 보라’던 말이 실제로 와닿았다. 영감, 즉 새로운 생각들은 보지 못했던 것을 볼때 생긴다.
그렇게 변화하기 시작한 나는 ‘사업’에 대해서도 다르게 느끼게 된다.
베트남의 교통수단과 집구하기
베트남의 교통수단
전철이 2016년도에 생긴다 했다. 못보고 한국에 갈 줄 알았다. 2021년 지금도 여전히 못보고 있긴 하다. 완공이 늦어지고 있다. 하노이엔 열차까지 올리긴 했는데, 기술상의 문제로 늦어지는 듯 하다.
베트남사람들 대부분이 오토바이를 소유했기 때문에 대중교통은 발달하지 않았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버스노선은 띄엄띄엄하다. 오토바이가 없는 나는 택시를 주로 탔었는데, 그랩이 들어온 뒤론 그랩을 애용중이다.
동남아의 우버라 불리는 Grab은 2012년 말레이시아에서 탄생한 앱이다. 베트남엔 우버가 먼저 진출했었는데, 그랩이 발빠르게 ‘오토바이 택시’를 선점하기 시작하더니 시장의 우위를 차지했다. 우버와 그랩이 경쟁적으로 할인혜택을 주며 사용자를 모으던 그 시기가 소비자에겐 참 좋았다. 그 후, 그랩과 우버 모두에게 투자한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의 교통정리로 우버가 베트남그랩의 지분을 27.5%인수하며 철수한다. 후발주자로 Lala move, Gojek이 나타났지만 그랩의 점유율 75%를 부수지 못한다. 그랩은 2021년 하반기 나스닥 상장까지 준비하고 있는 공룡기업이 되었다.
베트남에서 집구하기
외국인들은 서비스아파트나 아파트를 렌트해서 사는게 일반적이다.
한국인이 많은 2군과 7군엔 한국어가 가능한 부동산이 있다. 인터넷 검색만해도 바로 나오기 때문에 연락해서 방을 보러다니고 구하면 된다. 복비는 한달 월세정도이며 집주인한테 받기 때문에 세입자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서비스아파트는 스튜디오에 35~40만원, 빨래를 해주는 데가 많다.
일반아파트는 수영장이 있고 거실에 방 1개, 화장실 1개에 40~60만원 사이이다. 관리비와 전기세는 별도이다. 대략 5~15만원 사이 나오는 듯 하다. 외곽으로 가면 훨씬 더 저렴한 가격에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운송수단이 없다면 택시비가 저렴하게 얻은만큼 더 나오는 것 같다.
현지인들은 아래의 사이트를 많이 이용한다.
베트남어로 되어있고 매물을 올리는 부동산도 전부 현지 부동산이기 때문에 베트남어를 못하면 이용하기 어렵다. 혹시 여기서 꼭 맘에 드는 집을 찾았고, 영어가 가능하다면 부동산 에이전트에 영어로 문자를 보내보라. 영어로 대답해주는 에이전트가 있으면 약속을 잡아 집을 보러다녀도 좋다.
가짜사진인 경우도 많으니 꼭 방문해보고 계약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