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low down and look around
나는 참외를 좋아한다.
그 이유로는 그냥.. 내가 단감과 묶어서 단단한 과육에 달콤한 과일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여겼다. 그러다 천천히 돌이켜보았다. 참외에 대한 기억을.
어느 4월, 식물을 다루는 전공을 하며 여주에 있는 농업계 고등학교로 교생실습을 나갔다.
교직이수를 하며 대상자에 맞는 수업 목표와 교육매체, 평가 등을 하는 것을 익혔었다. 그리고 그 실전의 자리에 가게 되었다. 그에 어울리게 동기들은 각각 원예, 조경 이론 과목을 맡았고, 나는 2학년 영농과제라는 실습과목을 맡게 됐다. 반마다 작물을 하나씩 맡아 심고 거두어 수익도 얻는 실제적인 수업이었다. 토마토반, 감자반, 참외반... 각자 알록달록 토마토 그림이 가득한 팻말을 만들고, 씨감자를 심어 싹이 나길 기다리고, 참외가 자랄 수 있도록 검은 비닐을 덮었다. 칠판 앞에 있는 나를 상상했지만 현실은 농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체육복을 입고 흙을 뒤집어쓰는 나날이 이어졌다.
보통 4주간의 교생실습을 거치지만 특이하게 6주간의 교생실습을 하는 동안 아이들과는 생각지 못한 경험들을 가득 쌓았다. 남학생들의 선 넘는 농담에 화내기도 하고(혼내는 것보다 화에 조금 더 가까웠다.) 용기 내서 다가오는 아이들과 화해하며 더 돈독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매점의 인기 만점인 메뉴를 얻어먹기도 했다. 농업계 고등학교, 특히나 중2라 해서 험한 이미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마냥 순수한 아이들을 보니 마음이 열릴 수밖에 없었다. 오들오들 떠는 아이에게 내가 가진 비싼 카디건을 고민 없이 내어주기도 한걸 보면. 방과 후에 굳이 멋진 경치를 보여주겠다며 산으로 이끌고 간 아이와 길을 잃고 헤매기도 하고 이윽고 해가 질 무렵 아름다운 경치와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는 나를 사진에 담아주었다. 동아리 활동에서 손수 만들어 찌그러졌지만 팥은 가득한 단팥빵을 챙겨주기도 했다. 아이들과 비닐하우스에서 해바라기를 심으며 연애 고민을 듣기도 하는 등 함께한 모든 순간이 땡볕이었고 열정이었다.
그러니 어찌 정이 안 쌓일 수 있을까. 특히 멀칭에 레이크질에 육체노동이 가장 심했던 참외반. 육체노동 외에도 화, 미안함, 솔직함, 즐거움, 감사, 사랑 등 여러 방면의 감정을 교류했던 참외반은 내게 유별했다. 한 주 한 주 그 감정을 교류하며 땀 흘리다 보니 6주의 실습이 끝났다. 마지막 날 1학년 담임반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고 쭈뼛쭈뼛 찾아온 2학년 참외반 학생들과도 수줍은 사진을 남겼다. 유난히 행복했던 한 달반의 시간을 보내고 몇 주 뒤, 참외반 학생에게 연락이 왔다. 참외를 수확했다고.
같이 키운 농작물이라고 꼭 보내주고 싶다는 소중한 마음을 받기로 했다. 참외가 오는 날 기겁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상자 크기가 아니었고(더 컸음) 그 안을 빈 공간 없이 참외로만 가득 채워 보낸 것이다. 아이들의 땀 흘려 키운 참외는 내 얼굴만큼 컸고, 내가 갈고 만진 흙이 고스란히 묻어있었다. 그 사랑 때문이었을지도 모르지만, 객관적으로도 ‘우리의’ 참외는 살면서 맛본 참외 중에 가장 달았다. 맛도 맛이지만 아이들이 판매했으면 직접 돈을 벌 수 있는 참외를 내게 보낸 것이 의미 있었다. 역시 내겐 유별난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나는 받은 대로 상자에 빈틈없이 간식을 채워 아이들이 지내는 기숙사로 보냈다. 잘 받았다고 예쁜 인증사진을 보내는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나는 여러 사람들과 그 맛있는 참외를 오래도록 나눠먹었다.
8년 전 이맘때의 이야기다. 벌써 그 기억이 오래되었다는 것이 새삼 놀랍다. 그러나 참외를 볼 때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려서일까, 작년 일처럼 가깝게만 느껴진다. 그날들의 복장, 아이들의 표정, 참의 달콤함까지. 그 맛이 아직도 기억난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때 먹은 참외는 정말 크고 달콤했다. 평생에 먹은 것 중에 가장 맛있음은 변하지 않을 거다. 그리고 이 기억이 살아있는 한 나는 참외를 계속 좋아할 거다.
당신은 어떤 과일을 좋아하나요? 그와 관련된 기분 좋은 기억도 함께 떠올리면 달콤함은 배가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