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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een Nov 06. 2024

첫 에스프레소

홀로 시도한 에스프레소 경험기


 오랜만에 당직반차를 쓰고 무엇을 할까 고민했다. 최근 근무 외 시간에 내 곁에는 늘 누군가 있었다. 사랑하는 가족에게 감사하며 추억을 쌓는 시간을 보내거나 누가 뭐라 해도 곁에 있어줄 교회 공동체와 행사 준비에 시간을 쓰기도 하고 혼자의 시간이 보장되더라도 그때엔 운동을 하거나 화상영어공부를 하면서... 그러다 갑자기 맞닥뜨린 혼자만의 낮 시간은 낯설었다. 어떻게 보내야 할지 간만에 긴장이 되고 만발의 준비를 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내 취향의 카페를 찾아보았다. 가서 글을 쓰거나 앞으로 있을 행사준비를 하던 뭐든 할 생각이었다. 근데 언제부터 수요일이 빨간 날이 된 건지, 마음에 쏘옥 들어 찾아보는 카페들은 죄다 수요일 휴무였다. 그래서 카페는 포기하고 특정시기에만 볼 수 있는 국립박물관 특별전시를 찾아갔다. 멋진 전시물은 유리 너머에 있었는데 빛을 반사하고 손걸레의 흔적이 남은 유리를 아쉬워하며 박물관을 빠져나왔다. 260점을 한 시간 안에 보고 나오다니. 특별전시의 타이틀이 아쉽기만 했다. 그리곤 근처 에스프레소바를 찾았다. 카페에서 늘 NON-COFFEE만 찾는 사람이. 특히나 점심시간 이후의 카페인에 취약한 사람이 말이다. '내 취향의 카페' 목록엔 없는 곳이지만... 들어가 보았다.     


디저트가 맛있어 보여서 들어온 에스프레소바에서 케이크만 시킬 순 없었다. 찬찬히 난생처음 보는 에스프레소 메뉴를 읊었다. 콘 판나, 피에노, 로마노, 콘미엘... 아! 아포가토는 알지. 에스프레소바에 왔으니 에스프레소를 먹어야겠다는 욕구가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이름은 모르지만 다행히 메뉴마다 설명이 써있었다. 에스프레소는 굉장히 쓸 것이란 생각을 가지고 그나만 달달하게 카카오파우더가 들어간 피에노(pieno)를 먹어야지 생각했다. 그리고 쭈욱 메뉴를 보니 푸딩이 보였다. 좋았어. 나 홀로 투메뉴다.     


과연 잘한 선택일까, 아냐 먹어보자, 오늘 밤 못 자는 거 아니야? 음 그럴지라도 시도해 보자. 캐러멜 푸딩은 맛있을 거야... 그나저나 이제 뭐 하지? 혼자서 보내는 시간에 대한 불안(?)이 다시 들 때 즈음 동그랗고도 귀여운 에스프레소 잔에 담긴 피에노와 차가운 스테인리스 잔에 둥실 떠있는 푸딩 그리고 소주잔 같은 크기의 물 한잔이 나왔다. 피에노는 저어 마시는 게 맛있다는 말에 듬뿍 올라간 카카오가루와 커피크림을 휘휘 저었다. 짙고 깊은 갈색이 크리미한 땅콩버터 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보며 묘하게 도파민이 생성되는 듯했다. 스푼에 닿는 질감이나 스푼이 움직이는 속도에 저항을 주는 끈적이는 점성도 내 생각과 달랐다. 뭐야, 무슨 맛일까. 아메리카노도 쓴데 물을 타지 않은 에스프레소는 아주 쓰고 탄 맛이 가득할 거라 생각했던 거다. 그러나 처음 만난 에스프레소 메뉴인 피에노는 달콤, 부드러움이 가득했다. 앙증맞은 컵에 맞게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놓았지만 곧바로 한 모금을 마셨다. 너무 맛있어서. 그리고 올라오는 텁텁함에 물 한 모금 마시고 캐러멜 푸딩을 맛보았다. 이야, 아이스크림이 더해지니 시원하고 찐덕하게 달콤하고 다했다.      



‘혼자 먹으면 맛이 없다’, '맛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같이 먹고 마셔야 맛이 더해진다’고 생각해 온 나는 그 생각이 바사삭 무너짐을 경험했다. 맛있는 건 혼자 먹어도 맛있구나. 그리고 놀랍게도 바로 노트북을 열고 이 글을 쓰기 시작했다. 어쩐 일로 글이 숭숭 써지는 게 달콤한 커피 때문일까. 그리고 궁금해진다. 찐 에스프레소가. 다행히 오늘 밤 잠을 잘 자게 된다면 나는 에스프레소바를 다시 찾을지도. 아니라 하더라도 한 번쯤 아니 최소 한 번은 올 것 같다. 아, 그러고 보니 먹고 싶던 케이크는 안 먹었네. 그 이유를 들어서라도 또 와야겠다.  


갑자기 맞게 된 여유시간에 무엇을 할지 고민에 빠졌었는데 이 에스프레소를(엄밀히 말하면 피에노이지만) 만나고 나서는 오늘 무엇을 하든지 간에 꽉 찬 하루가 될 것 같다. 작은 잔만큼이나 사소한 시도이지만 신선한 경험과 엄청난 맛이 하루를 기록하기에 충분하다. 어느새 퇴근 전 들었던 불편한 말도 남지 않고 아쉬운 특별전시도 중요하지 않게 되었으니. 


무엇을 해야 한다는 불안이 감싼다면 입을 사로잡는 에스프레소 한 잔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커피가 부담스럽다면 향긋한 차가 될 수 있겠지만 가끔은, 콘 판나, 피에노, 로마노, 콘미엘, 아포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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