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마한을 추억하며 (2) - 한성백제의 굴레
항상 지도를 보면서, 산업이 시대의 가치를 이끌어가게 되기 한참 이전, 농업이 천하지대본이었던 그 시절, 왜 한반도의 주요 곡창지대를 석권했고 당대 선진문물의 중심이었던 중원과의 교류도 선점했던 백제가, 능력있던 왕이나 재상들이 다른 나라에 비해 현저하게 드물었던 것도 아닌거 같은데, 그렇게 빠르게 사라졌을까 하는 의문이 끊이질 않았었다.
광개토태왕 이전의 고구려와 맞서 이겨봤고, 진흥왕 이전의 신라에게 넘어야 할 산이었던 백제다.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의 규모로 보아, 적어도 한성백제가 운용했던 국력은 한반도의 패권을 쥘 만 했다. 대부분의 국가에서, 큰 부흥 뒤에는 귀족 세력간의 다툼이 있고, 나아가 왕위를 둘러싼 정쟁이 나타나면서 국력을 소모한다. 백제의 그 때에, 하필 이웃 고구려와 신라에 명군이 나타난 것은, 백제에게는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요즘 말로, 스불재가 아닐까. 결과론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한성백제가 한성을 잃고 난 뒤에는, 기존 마한 호족들을 잘 제어해야만 했다. 한성과 유사한 느낌의 사비백제를 건설하고, 또 바로 후방에 전시수도 웅진성을 두고, 또 백제 무왕 대에는 금마(지금의 익산)에 부수도를 또 건설하고 했던 것은, 어떻게 보면 각 지역 호족들 간 균형잡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한성백제가 오랜 기간 위세품을 전달하며 친왕 혹은 근왕 호족세력을 만들어둔 덕에, 금강 중하류의 웅진과 사비로 무사히 국가를 이전할 수 있었던 것이고, 많은 호족들 사이에서 백제 지도부는 다시 자신들의 근거지를 생성해야만 했을 것이다.
성왕의 전사로 허망하게 끝났지만, 그렇게까지 옛 한성백제 지역을 집착했던 것은, 단지 당항성과 산동반도 간의 외교 및 교역로가 중요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는 없다. 그들에게는 아직 믿을만한 근거지가 없었고, 따라서 그들의 찐 근거지였고 여전히 그들이 잘 아는 그들의 지역이 바로 옛 한성백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대야성도 점령하는 등 잘 나갔던 의자왕은, 최근에 밝혀지고 있지만, 웅진성 피난 당시, 웅진 지역 호족에게 배신당해 성 밖으로 갑자기 끌려나가 강제로 항복하게 되었다.)
과거 많은 교과서에서(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집권 초기 능력을 뽐냈던 의자왕이 직후 여색에 빠져 국사를 그르치는 통에 국가가 망했다는 식으로 기술했다. 낙화암 삼천궁녀 이야기가 그 정점이다. 이제는 그게 말도 안되는 거라는 것이 어느 정도 알려진 상태다. (그 정도 궁인의 규모를 감당할 만한 도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삼천 궁녀라는 규모 역시 백제보다 훨씬 크고 막장이었던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교차검증이 가능한 여러 사료에서 계백군 오천명이 마지막 남은 백제군의 병력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오천이라는 병력이 그 시대에 결코 적은 병력은 아니지만, 신라군 오만에 당군 오만 도합 십만의 침략군에 대응하여 모조리 긁어모아 전장으로 내보낸 병력이 오천이라면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많다. 그러나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 짚어보아야 할 포인트가 있다.
먼저, 신라군과 당군은 일반적인 형태의, 국경에서 일어나는 국가 대 국가의 전투를 시작한 것이 아니라, 한 국가를 무너뜨리는 것이 제 일 목표가 되는, 수도로 먼저 공격해 들어가는 전쟁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런 종류의 전쟁은 국가의 주권이 국왕에게 집중되어 있는 중앙집권형 고대국가의 경우, 매우 위협적이다. 한민족의 역사 속에서도, 발해가 잘 나가다가 갑자기 멸망한 이유가 바로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향한 거란의 습격 때문이다. (작자 주: 백두산 분화설 같은 다른 가능성도 언급되지만, 분화가 사실이라고 해도 화산재가 발해 국토 전체를 폼페이처럼 뒤덮어서 모두가 사망하지 않는 한, 분화만으로 꽤나 강성하던 국가가 한방에 멸망하지는 않는다. 발해-거란 국경에서 그 당시 발생한 대대적인 전쟁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인해 수도에 대한 습격이 가장 높은 가능성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 또한, 고려와 거란 간의 전쟁에서도 거란은 서북지방에 대한 점령 없이 고려 왕을 향해 공격을 감행한 경우가 있으며, 병자호란 때에도 후금은 속도를 앞세워 평안도와 황해도의 방어시설을 모두 우회하고 한성을 직공했던 전력이 있다.
즉, 시간이 문제다. 이런 형태의 수도 직공은, (방어측 입장에서는) 수도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시간을 끄는 것이 상책이다. 그리고 벌어놓은 시간 동안 각지에서 오는 응원군을 기다려야 한다. 지금과 달라서, 침략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데에도 꽤 시간이 걸린다. 게다가 직할영지가 아니라 호족영지이기 때문에, 동의를 얻어서 군사를 대규모로 조직해서 수도 근처에서 집결하는 데 적지 않은 나날이 소요될 것이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수도는 국경과 거리가 있기 때문에, 수도에는 근왕군 뿐이다. 찐 전투병력들은 주요 군사거점 도시에 있거나 분쟁지역 인근에 주둔한다. 한반도 고대국가 모두는 수도를 평시수도와 전시수도로 운용했다. 한성백제 역시 그랬고, 사비백제는 아마도 사비와 웅진을 운용했던 것 같다. 사비는 금강의 중하류에 있어 교역과 외교가 편했지만, 웅진은 금강의 중류에 있는데다 주변에 가파른 산지로 둘러싸여 방어에 최적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장점이 그것뿐이라 확장에 문제가 있는 웅진은 평시수도의 기능을 사비에게 내준 것 같다.)
여기서 문제는, 역사서에서 보이듯, 기벌포 저지에 대한 전략이 채택되지 않았고, 따라서 그 초반에 필요한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백제의 진짜 정예병은, 고구려와 신라 간 영토분쟁지역에 주둔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근왕군 역시 정예병이었겠지만, 그 수가 문제다. 또한, 이것을 달리 보면, 기벌포 인근에서 치뤄진 나당연합군과 백제 간 첫 전투에서, 백제의 군대는, 정예병이 아니었을 가능성 또한 높다. 가뜩이나 기습이라는 정황이 백제에게 불리한데, 전투경험이 적은 병력이라면 승산은 더 낮아진다. 대패는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우리가 알듯이, 의자왕은 사비를 버리고 성공적으로 웅진에 들어갔다. 그런데, 나당연합군이 제대로 된 공격을 시작하기도 전에, 의자왕은 항복해버렸다. 내가 역사를 배울 때까지만 해도, 오천 결사대의 산화와 낙화암 사건등에 가슴이 미어진 의자왕이 스스로 나와 항복했다느니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발굴과 연구는 계속되었고, 최근 웅진지역 호족세력에 의해, 성내에서 배신당했고, (아마 목에 말이 겨눠진 채로 협박당해서) 스스로 성문을 열어야만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 같다고 한다. 시간을 끌면, 분명 각지로 향한 파발이 도착하여 구원군이 당도할 것이고, 그 전에 상황을 종료해야만 한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 분명하다.
사서에 남은 기록만으로도, 계백은 충분히 훌륭한 장수였음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당대 가장 엘리트 무장만이 맡을 수 있는, 근왕군을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국경지대의 병력들은, 원래라면 국경지대부터 공격해오기 때문에 초반 전투를 담당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게 된 이들은, 의자왕이 웅진으로 후퇴할 때쯤 연락을 받고, 금강으로의 진군을 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근왕군 오천명은, 국가의 마지막을 의미하는 작은 병력이 아니라, 보낼 곳에 정예병 다 보내 놓고, 근왕군으로만 오천을 유지하던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나당연합군은, 당군 오만 신라군 오만이다. 의자왕 시절 신라는 백제에게 서부전선의 핵심이었던 대야성(현재의 합천 인근)을 뺏기고 그 방어선을 경주 바로 앞인 압량주(현재의 대구-경산 인근)로 옮겼다. 백제에게 뺏긴 성은 오십개가 넘는다. 백제에게 만일 오천밖에 안 남은 거라면, 그 전에 백제와의 힘겨루기에서 신라 쪽으로 힘이 쏠리는 모습을 보여주던가, 혹은 당나라에 지원군 요청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거나 했어야 한다. 그리고, 수도직공은 리스크가 진짜 크기 때문에(잘못하다 고립되면 전멸이다), 군세가 그렇게 차이나면 그냥 정석적으로 국경지대부터 치고 들어가는게 낫다. 즉, 십만의 병력이 수도직공을 선택한 데엔, 정공법으로는 우세를 점치기 어렵기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높고, 이는 백제가 국경선에 배치했던 정예병의 규모가 연합군의 수에 비등하거나 혹은 승패를 점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은 되었다고 해석해야 한다.
정황상 모든 이유를 들어도, 웅진성의 호족 또한 의자왕이 평소에 컨트롤했어야 하는 세력이고, 그 웅진성이 전시수도이기에 더욱 중요하게 관리되어야 했다는 점은 달라지지 않는다.
한강유역을 잃은 뒤, 웅진천도 이후의 백제 왕조는 바람 앞 등불이었다. 한성백제 때만 하더라도, 전장에서 전사한 경우를 제외하면 왕들은 대부분 자연사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성백제 이후 백제 왕들은 대부분 암살당했다. (물론 전사한 경우도 많다. 자연사한 예가 거의 없다.) 웅진백제 시절의 4명의 왕 중 마지막 무령왕만 자연사(나머지는 모두 암살), 그 다음 성왕이 천도한 사비백제 4명의 왕 중 성왕은 한성에서 전사, 나머지 3명은 암살 혹은 단명, 그리고 직후 무왕은 금마로 천도(자연사), 그 이후 어느 시점엔가 의자왕은 다시 사비로 천도했던 것 같다. (기록상으로는 금마로의 천도가 존재하지 않는다.)
왕의 안전은 무엇보다 측근의 유무와 그 규모에 달려 있다. 고대국가일수록 더욱 그렇다. 한성백제가 웅진과 사비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한성백제는 단지 한성을 잃은 한성백제로 버텼고, 제대로 기능하는 왕조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한성을 공략했다고 볼 수 있다. 성왕의 위례성 진공은 실패로 끝났고, 그 이후의 계속된 왕의 암살은 백제 왕조가 지속적으로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들로부터 실질적인 위협을 받아 왔음을 의미한다.
의자왕의 시대에, 신라는 선덕여왕 재임기였다. 기록상으로, 의자왕 재임 기간 대부분 백제는 강성했다. 50개가 넘는 성을 신라로부터 빼앗았다. 진흥왕 대에 확립된 대야성(합천)과 속함성(함양)을 잇는 서부 국경선이 무너졌다. 무왕의 뒤를 이은 의자왕은, 이런 기세로 자신감이 충만하였던 게 아닐까 싶다. 계속되는 승전보는 왕권을 강화시킨다. 백제 왕실에 협조하는 호족이 늘어날 것이고, 그 친밀도 역시 높아지게 된다. (호족들이 전심을 다해 왕실에 충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을 것이라는 뜻이다.)
무왕 시절, 현재 전라남도 지역에 위치한 침미다례 지역이 백제로 흡수되었다. 국력의 증가는 결과로 나타났고, 아마도 의자왕을 주축으로 하는 한성백제 왕실은 주변 호족을 상대로, 심적인 우세를 가지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의 부친은 무왕으로, 암살로 이어지던 계보를 오랜만에 끊어내고 시호 그대로 백제의 위세를 다시 세웠다고 볼 수 있다. 강성함과 우세함이 십년, 이십년 이어지면 방심하기 쉽다. 모든 종류의 방심은, 합리적이지 못한 의사결정의 확률을 높인다.
금마로 왕성을 옮기면서까지 왕권의 안정과 안녕을 추구했던 무왕 세대와 달리, 의자왕은 겉으로 느껴지는 위세와 권력으로 인해, 국정 여러 면에서 마음을 놓았던 것이 아닐까. 놓은 마음은 여러 국정 현안에 대한 둔감함으로 이어지고, 충언이 고까워지며, 필요한 정책의 집행이 늦어지게 된다. 이런 것이 쌓이고 또 쌓이면, 위기를 알기 어려워지고, 대처가 느려지며,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 늘어나니 그만큼 상황에 대한 리스크가 커진다.
서서히 망해간 역사속 많은 나라와 달리, 국가의 강성함을 제대로 보여줬던 군주가 계속 집권하는데도 갑작스럽게 붕괴해버린 백제다. 안타깝지만, 여전히 백제왕실의 진짜 본거지는 한성이었고, 그 한성의 망령과 왕실이 힘겨루기를 하다가 진짜 망해버린 케이스다. 아직까지 백제의 진짜 최전성기를 근초고왕 시절로 본다는 걸 생각해보면, 한성백제를 수복하고자 했던 후기 백제왕실의 마음을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다. 결과론적이지만, 백제가 더 강성하고 더 오래갈 수 있었던 에너지 대부분을, 그 한성백제 수복에 다 소진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