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박물관 방문기 (1) - 사국시대 꿈의 시작
고령에 위치한 대가야박물관을 방문한 것은, 다른 박물관 방문과는 조금 결이 달랐다. 다른 박물관들은 처음부터 계획하고 일정을 잡아서 방문하게 된 것이라면, 이 경우는 상대적으로 너무나 갑작스러운 방문이었다. 그래서인지, 관람에 소요되는 시간도, 생각을 정리하는 데 드는 시간도, 그리고 그 정리된 생각을 글로 옮기는 데 필요했던 시간도, 모두 더 오래 걸리게 된 것 같다.
SNS를 거의 하지 않지만, 워낙 박물관과 유적지 관련 검색이 많다 보니, 관련 알고리즘이 작동했었던 것 같다. 다른 검색을 하던 중에, 유네스코 등재를 기념하기 위해 국립박물관이 아님에도 잠시동안 무료입장을 진행한다는, 고령 대가야 박물관 관련 블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게다가, 때마침 다른 곳 방문 일정이 취소되면서, 짧지 않은 시간이 생겼다. 관심도가 애초에 그렇게 낮지는 않았지만, 거리 등을 감안하여 방문 우선순위가 좀 밀리던 곳이었지만, 과감하게 방문일정을 넣게 되었다.
금관가야가 대가야보다 중요해서도, 더 강해서도, 더 관심이 있어서도 아니다. 가야 연맹체 혹은 변한 소국들은 그 중심국가가 시대에 따라 계속 변한다. 마한이나 진한과 달리, 변한에는 부족국가의 단계를 벗어나 완성형 고대국가에 도달하는 데 성공한 소국이 없다. 그러다보니, 주도권을 쥔 국가의 순서대로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이 내 역사지식의 체계를 잡기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아직 신라가 아닌 사로국 시절, 가야 중 금관국은 그 위상이 뒤지지 않았다.
가야사에 대한 연구는 어렵다. 가야 자체에서 남긴, 남아있는 기록은 거의 없다고 한다. 고고학적 연구와 비교문헌 연구밖에 할 것이 없는데, 고대국가도 아니고 신라에 거의 합병당한 세력의 기록이고, 그들의 기록은 신라 왕권에 대한 저항으로 비춰질 수도 있기 때문에, 그들 고유의 기록을 오랫동안 보존하는 것은 어려웠을 것이다. 다행히, 고고학적인 자료는 꽤 많은 편이라고 한다. 다만, 그 연구의 깊이가 아직은 일천하다고 볼 수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부터 연구되기에, 아직 백제의 연구조차 부족한 상황이니 어련하겠는가.
금관가야에 대한 연구자료나 기록자료 등은 아마도 국립김해박물관에 있을 것이다. 현재의 나는 충청권에 거주한다. 국립역사박물관 중, 제주를 제외하면 김해박물관이 제일 멀다. 관심사가 아무리 높아도, 제일 먼 곳을 먼저 가기는 쉽지 않다. 어쩔 수 없이, 고령 대가야박물관은 그 뒤로 우선순위가 밀렸다. 그런데, 갑자기 반나절 정도의 시간이 생겼다. 김해는 당일치기는 어려운 거리다. 고령은 어렵기는 하지만 가능은 하다. 사전조사 하나 없이, 그렇게 갑작스런 고령 대가야박물관 방문이 결정되었다.
가야, 변한, 혹은 가락국이라 불린다. 가장 유명한 금관가야부터, 비교적 최근에 유명(?)해진 함안의 아라가야 등, 많은 변한 소국들을 한데 묶어 가야라고 부르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들 각각이 스스로 가야라는 이름을 붙인 것 같지는 않다. 진한이나 마한의 소국들과 마찬가지로, "**국"의 이름자를 가진 형태였던 것 같다. 대가야도 그런 종류가 아닐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애매한 점이 있었다. 대가야란 명칭에서 "가야"를 빼면 남는 것은 지명 이름도 아니고, 옛 지명 이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큰 대 자이기 때문이다. 대가야는, 말그대로 그냥 "대가야"였다. 국명 자체가 대가야였고, 대가야라는 이름으로 (비록 몇 안되는 기록이지만) 국제사회에 등장했던 것 같다. 국명에 큰 대자가 붙어있다는 것에 고무되어, 이곳 대가야박물관은 온통, 삼국시대로 지칭되는 한반도의 고대국가시대를, 사국시대로 개칭해야 한다는 꿈으로 가득했다.
금관국과 같은 다수의 변한 소국들은, 마한과 진한의 그것들에 대한 취급과 마찬가지로, 고대국가로 진입하기 전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수도의 역할을 하는 하나의 성과, 그 주변의 영지, 그리고 종교지도자와 정치지도자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상태의 지배체계를 가졌다.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종교지도자의 힘이라면, 현생에 대한 기대는 정치지도자의 힘이다. 국가의 초기에는 주변의 부족민들을 국가체계로 편입하고, 발생가능한 반란을 억제하며, 그들을 국가의 노동력에 편입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두 가지 힘을 모두 쥐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꽤나 오랫동안, 고대 및 중세 국가는, 농경이 주된 산업이지만, 입지에 따라 수산업이나 교역업, 또는 광산업이 국가의 주요 산업인 경우도 있었다. 성공적으로 고대국가에 안착한 국가들도, 초반에는 주변의 소국들과 큰 차이가 없거나 도리어 밀리기도 했다. 금관국은 실제로 사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적도 있고, 신라, 왜, 침미다례, 마한, 낙랑, 대방 등과 교류하고 풍부한 철을 수출하여 국가의 부를 축적하기도 했다. 한성백제 역시 건국 초반에는 목지국으로 대변되는 마한 여러 국가들의 틈바구니에 껴있었다. 변한 내 전쟁으로 보이는, 포상팔국의 난으로 인해, 침미다례를 포함하여 당시까지 남아있던 부족국가 형태의 소국 상당수의 국력이 크게 감소했고, 이것이 금관국으로 대표되는 전기가야와 안라국으로 대표되는 중기가야의 몰락으로 이어지게 된다.
변한 국가들의 이름이 기록에 따라 꽤 엇갈리지만, 대부분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그들은 꽤 가깝게 다닥다닥 붙어있었던 것 같다. 입지는 낙동강과 그 지류인 남강을 따라 존재했던 것 같고, 추가로 남해 연안의 뱃길을 따라서도 몇 개 국가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대가야의 수도로 입지했던 고령은 낙동강의 중상류에 위치하며, 적어도 초반에는 그들도 낙동강의 수운에 의존하며 다른 진한 및 변한 국가들과 교류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령은, 생산력이 높다고 한다. 땅이 좋다는 뜻이다. 토질이 괜찮은 다른 곳 대비 대여섯 배의 생산력을 가졌다고 한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각 가야 소국들의 영토는 큰 차이가 없었을 것이다. 같은 넓이 대비 더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다는 뜻이고, 이는 전적으로 노동력에 의존하는 당대의 산업구조상 매우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 농업인구도, 병력도 더 많이 유지할 수 있는 것이다.
금관국은 김해 평야에 위치하지만, 지금의 삼각주 형태의 지형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평지의 비중은 높았겠지만, 생산력을 담보하는 삼각주는 충분히 형성되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신라와 왜, 그리고 침미다례를 잇는 연안교역로 중심에 위치했고 철의 생산량이 높았기 때문에, 일종의 중개 무역과 국가 간 외교에 이점을 가졌을 것이다. 남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했던 안라국은, 그 입지의 이점으로, 가야연맹 내 외교와 정치력을 행세하기 유리했을 것이다. 해상운송은 지금에 비해 그 위험이 훨씬 컸을 것이므로, 내륙 수운을 통해 많은 변한 소국들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은 분명 큰 이점이다. 낙동강과 황강을 통해 초기의 대가야 역시 안라국의 내륙 교역망에 연결되어 있었을 공산이 크다.
교역과 외교는 분명 중요하다. 주변국이 함께 빠르게 성장하는 시기라면, 물자가 많이 필요하고, 따라서 외교와 교역의 수요가 높다. 금관국과 안라국의 성장은 이에 기인했을 것이나, 동시에 주변국의 성장을 초래한다는 문제점이 있다. 이들은 무조건 주변 국가들의 상황과 시대에 따른 환경에 맞춰 변화해야 했다. 아무리 잘 적응해도, 금관국과 안라국 각자의 노력만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대가야의 이점은 주변 상황에 별로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만, 생산량의 증대가 인구 증가로 이어지고, 이것이 다시금 다음 세대의 국력 신장으로 이어지는 방식은 시간이 좀 걸린다. 그 동안 주변 국가들 대비 크게 뒤처지지 않으면서 잘 버텨야 한다는 과제가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