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나듦의 구분 (1) - 해미읍성 내아 소고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이 엘리베이터다. 단지 접근성 향상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제는 화물의 수송과 안전 등을 위하여도 승강기의 설치는 필수적이다. 공동주택 같은 경우, 한 통로에 하나씩, 한 건물에 여러 대의 승강기를 설치한다. 상업건물의 경우 더 많은 승강기를 설치하여, 더 많은 인원이 보다 빠르게 이동할 수 있도록 한다.
그런데, 전용 엘리베이터 라는 것이 있다. 화물 수송용이라거나, 응급환자 전용 승강기 처럼, 기능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도 있지만, 임원 전용이라던가, 혹은 직원 전용 처럼 조금 다른 관점에서 바라볼 여지를 주는 경우도 있다. 물론, 이 또한 기능적인 구분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먼저 식당이나 병원, 은행 등 고객 대면 서비스업의 경우는 일반적으로, 고객과 대면하는 부문보다 대면하지 않고 지원하는 업무의 크기가 훨씬 큰 경우가 많다. 고객이 접하는 서비스 하나를 위해 수십 수백가지의 업무가 필요한 경우도 많다. 이는 고객의 동선보다 훨씬 복잡하고 많은 양의 직원 동선을 유발한다. 직원의 동선과 고객의 동선을 구분짓는 것만으로도 부가가치 창출의 효율성이 크게 증대될 수 있다.
서비스업이 아닌 경우에도, 보안 등의 이유로 승강기 이용에 제한을 두는 경우가 있다. 내부인과 외부인의 동선이 회사 내부에서 겹칠 수 있는 상황이 존재한다면, 그것만으로 회사의 보안에 문제가 생길 여지가 생긴다. 최소 수준 이상의 보안규정이 존재하는 사업체의 경우, 사내로 연결되는 통로에 진입하기 전에 출입게이트를 설치한다. 이 게이트를 통과해야 비로소 엘리베이터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이 생기는 식이다.
임원 전용 승강기의 경우도, 기능적인 이유로 해석할 수 있긴 하다. 상법상 임원은 직원이 아니다. 훨씬 많은 책임을 지고, 훨씬 높은 가치의 경영의사결정을 수행한다. 그들의 경영활동을 지원하는 목적으로 설치한 것이라고 보통 이야기한다. 특히, 이런 건 지금보다 십수년 전에 더 많았던 것 같다. 드라마에서도 이런 모습이 심심찮게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에 비해 그런 모습이 덜해 보인다. (물론 더한 경우도 분명 있을 것이고, 전혀 달라지지 않은 기업문화를 보여주는 곳도 많을 것이다.)
한 번 경험한 일이다. 해미읍성 방문 때였다. 당시 관아부터 내아 등 여러 성내 시설물이 잘 복원되어 있다. 그 중, 관아 옆 내아를 들렀을 때 발견했다. 내아는, 관리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해미읍성은 충청병마절도사 혹은 병마사의 부임지였다. 그 관리가 주 업무를 보는 곳이 관아다. 이 관아 곁에 내아가 위치해 있다.
문제는, 내아로 들어가는 출입구가 따로 없었다는 것이다. 아니 가족들이 바로 마을로 출입할 수가 없고, 반드시 관아를 통해 마을로 진입해야 한다는 것은 생각할 거리를 꽤 많이 던져준다. 관아 정문이 무슨 사랑방 출입문도 아니고, 관리들이 주요 업무를 결정하고 수행하는, 당시 지역의 최고 관공서 중 하나였던 곳의 대문이다. 게다가 해미읍성은, 병마사의 관할지였고, 이는 해당 지역의 국방부 사무소 혹은 지역 경찰청이라고도 볼 수 있는 곳이다.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기에는 그 담벼락의 높이가 그닥 높지 않았다. (관아의 담벼락 높이보다 낮았다) 물론, 당대 사람들의 평균 신장(남성 약 161cm, 여성 약 149cm)을 감안한다면, 남성 키를 살짝 넘는 정도의 높이였기 때문에, 충분한 높이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관아의 중심부는 병마사의 업무 공간과 병마사 아래 관리들의 지원 업무 공간, 그리고 판결 등을 내릴 법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거기서 내아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관리가 아닌 관아에 속한 자들, 즉 노비나 관비(표현이 맞는 건지 모르겠다)등의 공간이 나왔고, 그것을 지나자마자 내아로 통하는 작은 문이 나왔다. 관아는 그 지위상, 읍성에서 약간 그 바닥을 높여 지었고, 내아는 읍성의 원래 바닥 높이에 위치해 있었다.
내아는, 그 가족들이 기거하는 집이다. 지금으로 치면 관사 같은 곳이다. 기와집이라는 거 말고는 특별한 게 없는, 그냥 살림집 모양이다. 그 담장도 그닥 높지 않았다. 시선이 안팎을 오가기에 전혀 무리가 없는 높이였다. 경기나 강원지역만큼 겨울온도가 낮은 지방은 아니지만, 눈이 정말 많이 오는 곳 답게, 온돌을 위한 구들장이 보다 세심하게 건축되어 있었고, 굴뚝(?)도 열기를 잘 가둬놓을 수 있도록 기왓장으로 꼼꼼하게 설치되어 있었다. 배수로 역시 깔끔하게 위치했다. 그러나 이런 것들 모두, 다른 유적지에서 충분히 관찰할 수 있었던 것들이다. 특출나다고 할 만한 것은 없었기에, 어느 정도 내아를 읽고 떠나려 했다. 그런데....!!!
나가는 문이 없었다. 관아와 내아가 직접 연결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했다. 그런데, 내아 담장을 따라 꼼꼼히, 혹시 문을 놓쳤을까 싶어 한바퀴 돌았지만, 개구멍도 없었다. 결국, 관아로 통한 그 문을 다시 통과해야만 했다. 처음에는 그냥 건축상의 오류인가 했다. 옛날부터 계속 내려오던 건축물을 현대에 개보수 한것이 아니라, 기록을 보고 후대에 새로 건축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장 안내문에 따르면, 기록에 따라 정확하게 재건하였다고 한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라면, 내아를 오가는 문은 관아로만 연결된다. 용무가 없다면, 정확히는 관아에 잡혀올 일이 있거나 고소할 일이 있지 않는 한, 조선시대에 노비계급이 아닌 여인과 아이는 관아에 출입할 일이 전무했다. 즉, 병마사를 제외한 가족들은, 외부의 교류는 관아에 딸린 일꾼 등을 통해서만 하고, 그 외의 시간 대부분을 내아 담장 안에서만 있어야 했던 것 같다는 합리적 의심이 들었다. 물론, 관아를 통과하는 길이 무슨 대궐도 아니고, 병마사의 성향에 따라 격의를 크게 따지지 않는다면, 내 생각보다는 수월하게 가족들이 드나들 가능성도 있다.
조선 시대, 아니 비교적 최근까지도 많은 국가에서 비 성인남성에 대한 예우는 상대적으로 낮은 경우가 많았다. 조선 시대의 그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물론, 병마사는 꽤나 높은 관리였고, 그렇기 때문에 집안일의 대부분은 의례에 관한 것을 제외하면 일꾼들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긴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로 통하는 독립적인 문이 내아에 없다는 것은, (좋지 않은 쪽으로)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