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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TRAVEL Nov 22. 2018

잊혀진 곳에 대한 예의

ARTRAVEL VOL.33



잊혀진 곳에 대한 예의


 북러시아 | 째르베르카 | 이경택 



ⓒ 이경택



낡아 버린 목조건물 그리고 페인트가 완전히 바래 버린 맨션 사이로 한 남자의 모습이 지나간다. 영화 「피아니스트」의 포스터가 생각나는 적막하고 폐허처럼 낡은 시가지. 그 풍경 속 남자의 손을 꼭 잡고 걷고 있는 5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 첫날의 모습은 무서울 정도로 낯설었다. 그 날 저녁 마을에 들리는 소리라곤 수산물을 싣는 몇 대의 지게차 엔진소리가 전부였고, 지지 않을 것 같은 도시의 붉은 노을은 짙고 짙었다. 마치 다른 차원에 와있는 듯한 낯선 세상의 낯선 장면은 날 몹시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북반구에서 맞이하는 붉은 보랏빛 땅거미는 몇 시간씩 계속되었고, 누군가 멍하니 있다 아무 이유 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하나 없는 정경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해안에는 오로라가 펼쳐졌다.


아주 먼 마을, 째르베르카(Teriberka). 북극의 바다를 마주한 새로운 세계에 나는 와 있다.



ⓒ 이경택


무르만스크로 가는 길



내가 러시아의 겨울에 매력을 느낀 것은 시베리아 여행 직후부터다. 시베리아의 투박하지만 고결한 순백 세상은 어떻게 그 많은 예술가들을 러시아가 배출했는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시베리아 여행이 끝날 무렵 폐선이 잠긴 어느 러시아 북극권의 해안사진을 보고 그 비현실적인 풍경을 수소문 하기 시작했다. 무르만스크에서 바렌츠해로 차량으로 몇 시간 이동하면 도착할 수 있는 곳이라 했다. 이름은 째르베르카. 나중에 무르만스크에 도착해서야 그 이름을 알 수 있었던 바렌츠해 무명의 해안 마을이다. 바렌츠해는 러시아 최북단으로 북극권 바깥쪽 바다를 말한다. 째르베르카에 가기 위해선 우선 무르만스크를 거쳐야 했다.


먼 길임을 각오하고 있었음에도 무르만스크로 향하는 여정은 예상보다 훨씬 길었다. 모스크바까지 왔다면 다음 여정까지 공항에서 오랜 대기는 기본이다. 그런데 비행기가 지연되면서 대기시간이 속절없이 길어졌다. 겨우 무르만스크에 도착했을 때 엄청난 피로감이 몰려왔다. 당초 여기서 곧바로 바렌츠해로 달려갈 계획이었으나 눈보라로 인해 길이 폐쇄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얼마라도 쉴 수 있어 차라리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잠시 머물게 된 무르만스크. 러시아 북극함대가 주둔하는 곳이자 북극권 러시아에서 유일하게 독립적인 경제체계를 가진 대도시. 시내로 나가 계획에 없던 또 하나의 러시아를 프레임에 담았다.



ⓒ 이경택
ⓒ 이경택


째르베르카의 시간들   



째르베르카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이번 러시아 북극권 여행이 항구 정취가 물씬 풍기는, 서정이 가득한 겨울여행이 되리라 예상했다. 마치 위스키가 어울리는 그런 여행(물론 이곳은 보드카가 더 유명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째르베르카에서 보낸 5일은 내 기대와 전혀 달랐다.


4시간의 이동. 바렌츠해로 향한 버스가 마지막으로 멈춘 정류장이 째르베르카였다. 다행이 점심이 되기 전에 도착해 숙소에 먼저 들어갔다. 숙소 정문을 기웃거리다 식당 아주머니의 터프한 손짓에 이끌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도 모르게 점심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점심은 배식형태였는데, 메뉴는 빵과 스튜와 감자 등 투박하기 그지 없다. 다시 생각하기론 러시아에서 인기리에 팔리고 있는 한국의 컵라면이 아니었다면 5일이나 지속된 식당배식에 금세 질렸을지 모르겠다.


우선 마을이 몹시 궁금했으므로 째르베르카의 첫 식사가 끝나자 마자 마을 탐방에 나섰다. 마을의 입구는 생각보다 숙소에서 멀었다. 차단기가 설치된 길목을 건너야 했는데 특별한 제재는 없었고, 차단기 옆에는 마을에서 유일한 슈퍼마켓이 우두커니 차려져 있었다. 길목을 지나면 곧 주변에 폐건물이 하나 둘씩 본격적으로 등장하고, 저 멀리 시가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바다내음과 도시냄새가 묘하게 뒤섞인 째르베르카의 공기는 나쁘지 않았다.


진입로에서 나는 한동한 멍하니 서있었다. 시가지는 오랜 세월 보수를 받지 못하고 야위어 있었다. 전날 무르만스크에 비하면 이곳은 말 그대로 'Old-Town'. 단순히 나이가 많은 시간적 개념이 아니다. 이젠 사람들의 관심을 잃고 오래되어 잊혀진 '낡음'이었다.




ⓒ 이경택
ⓒ 이경택


오후가 되자 사람들이 하나 둘씩 보인다. 도시로 나가려는 듯 삼삼오오 모여 누군가의 차량에 올라타는 사람들, 유모차를 끌고 빙판길을 나서는 여인, 학교를 마치고 끼리끼리 손잡고 나와 눈을 마주칠 때 마다 수줍은 듯 뛰어가는 여자아이들. 이 낡고 낯선 도시를 향한 카메라 프레임 속에 사람들이 하나 둘 채워지자 난 이 도시가 조금씩 더 궁금해졌다.


다음날 째르베르카의 올드타운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시가지의 반대쪽, 숙소에서 해안으로 가는 길을 걸었다. 그 길에는 바렌츠해의 수평선이 마주보고 있었고, 저 멀리 떠있는 함선은 북극해를 탐험하는 중이었다. 이미 낡은 도시에 또 다른 올드타운이라니. 해안가에서 오래된 시가지로 들어가는 길. 그 곳엔 더 진한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이경택


모두가 떠나 버린 마을. 그리고 폐기된 배들. 올드 째르베르카라고 불린 곳은 이제 인적이 전혀 없는 허망한 거리만 남았다. 나를 이곳에 이끌었던 사진의 무대가 그곳에 있었다. 사실 난 이 소름 끼치게 잔해만 남은 시가지가 꽤나 마음에 들었다. 저 멀리 구름이 밀려오고, 우리나라에선 보기 힘든 하늘 색이 세상을 뒤덮는다. 허망한 도시. 이 초현실적 광경은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왜 여행을 끝낼 수 없는지 분명한 답을 주곤 한다.


째르베르카는 몇 백 년 역사를 가진 마을이다. 1950년대 전쟁 후에도 고래사냥이 융성했던 덕에 인구수 5천을 유지하며 북극권 마을로 생명이 꽃피는 곳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몰락과 고래산업이 쇠퇴하면서 한 두 명씩 마을을 떠나기 시작했고,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사진가인 나에게는 흥미로운 소재였고, 쉽게 접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 이경택


여전한 삶과 사람들



하루에 아침 저녁으로 두 번 무스만스크에서 버스로 왕복하는 이곳은 오로라 관측을 위한 관측소로 내가 머무는 숙소를 제외한 게스트 하우스나 호텔은 마을에 존재하지 않는다. 해마나 겨울이면 오로라를 보기 위해 손님들이 찾는 오로라 마을이다. 오로라 관측은 숙소 앞 작은 동산에서 실시된다고 했다. 관측소에 근무하는 직원이 불침번을 서다 벨을 울리면 준비태세를 갖추고 동산으로 뛰어 올라가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밤마다 신발을 제대로 벗지 못하고 술과 함께 약간의 취기로 누워 기다리는 일이 시작됐다.


숙소에서 다른 러시아 사진가들도 만났는데, 주로 오로라 촬영과 워크숍을 진행하는 이들이었다. 내가 마을에 호기심을 가지고 낮에도 움직이는 것을 신기하게 여기던 이들 사진가들 중 한 두 명이 나의 촬영을 지켜 보았다. 북극권에는 2월- 한 겨울의 해가 묘하게 졌는데, 낮은 상당히 짧아 오후 3-4시면 해가 지지만 그 땅거미 빛이 몇 시간 동안 사라지지 않고 하늘에 머물고 있었다. 그 색의 향연 속에 허허한 마을을 담는다는 발상이 러시아 사진가들에게도 인상 깊었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던 표정이 어느새 그들 역시 바쁘게 셔터를 누르는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 이경택
ⓒ 이경택


현재 남아있는 사람들 대부분은 어제 방문했던 반대편 중심가 시가지에서 수산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이따금 오는 관광객들로 외지인이 낯설지는 않은듯했다. 나중에 이 글을 쓰는 시점에 알게 되었지만, 이곳을 배경으로 한 「리바이어던(Leviafan)」이라는 영화도 있었다. 2015년 작품인데 칸 영화제 각본상을 거머쥐며 무명이었던 이곳이 좀 더 알려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마을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슈퍼마켓에서 맥주를 사서 해변 쪽을 바라보며 마시는 재미에 푹 빠져있었다. 해안바람을 맞으며 목 넘겼던 맥주 맛이 어느 때보다 강렬했던 날. 아무래도 하교 시간과 맞았던 모양인지 그날 따라 거리에는 학생들이 제법 보였다. 혹시 학교에 아이들이 남아있을까 바로 째르베르카의 유일한 학교로 향했다. 수줍어하는 아이들은 카메라에 호응하는 대신 작은 하트를 만들어 이 마을의 이름을 적어 주었다. 그리고, 'Teribetka'라고 메모에 적어 내 손에 쥐어주고 떠난 어린 소녀. 부디 이 낯선 곳을 떠나더라고 잊지 마세요 라고 말하듯 그 메세지는 어떤 언어보다도 강렬했다.


옛 영광은 이미 북극의 어느 시간 속으로 사라져 버렸지만 남아있는 사람들의 삶은 계속된다. 사람의 터전은 아무리 적막하고 황량한 곳이라도 사람의 온기를 내뿜는다. 내 사진은 풍경에 동요되어 발길을 향하게 될 때가 많지만 결국 가슴에 새기는 건 늘 사람의 온기였다. 이 북극해의 당황스런 풍경 속에도 사람들의 체온이 있었다. 밤하늘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오로라는 카메라에 담을 수 있지만, 온기를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은 오직 가슴뿐이다. 지금 키보드 앞에 아이가 그려 준 작은 하트가 놓여있다.




글│이경택

사진│이경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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