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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담 Sep 07. 2023

사건의 해석

무능과 너그러움  사이에서

24세에 남자 중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학교에서 제일 어렸고 초임 기간제라 어른의 권위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하루는 청소지도를 해야 해서 내가 가르치지 않는 앞반에 가 있었다. 댄스 동아리 지도교사라서(춤을 가르쳤다는 게 아님) 한두 명은 나를 알지만 다른 학생들은 나를 몰랐다. 그때 내 앞에 서 있던, 마른 체형에 파란 렌즈 안경을 쓴 아이가 친구에게 뭔가를 호소하고 있었다. 어딜 다쳤다고 아프다고 하더니 바지를 허벅지까지 내리고 아픈 곳을 보여줬다. 아픈 부위가 허벅지와 골반 사이였다. 주변은 청소하느라 어수선한 가운데 나는 상당히 벙쪘다.


나는 그때 남자 중학교의 생태계에 상당한 문화 충격을 받으며 열심히 적응하는 중이라서 어떤 장면을 보든 '원래 이런가? 내가 이상한 건가?'라는 생각을 했었다. 기간제는 연수를 받진 않으니까 초년에는 구체적인 행동지침에 약하다. 시시때때로 유혈이 낭자한 남자애들의 야생성을 볼 때마다 혼란스러웠다. (연수받았다고 이런 내용이 있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나는 그 학생의 눈에만 시선을 맞추고 3초 정도 쳐다봤다. 뭐 하는 거냐고 물었는지 그냥 알아서 처신하게 기다렸는지 기억이 안 난다. 남학교 애들은 남자 선생님 시간에는 더우면 옷을 벗고 수업을 듣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맥락인가?’


그때 이 반 소속인 동아리 학생이 나타났다. 나에게 인사를 하려다가 황당한 표정을 보더니 그 학생한테 "야 이 또라이 새끼, 너 무슨 짓 했어? 죄송합니다. 선생님."하고 꾸벅 인사를 하고 친구를 나무라며 데려갔다. 중3 아이들이었다.


요즘에 이때 일이 자꾸 떠오른다. 바지군 사건은 지금 같았으면 큰 문제가 됐을까? 지금의 나는 다르게 반응할까? 음란 전화는 경찰을 동원해서 해결할 일이었을까? 그때는 지금 같은 문제 해결 방법이 상상의 영역 밖이었다. 그때의 나에겐 그런 일이 큰 사건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바지군의 표정이나 분위기가 기억나는데 그냥 아무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떠한 의도도 안 느껴졌다. 그냥 기능 적으로 바지를 접어 올리는 것보다 벨트를 끌러 보여주는 게 편해서 한 행동 같았다. 나는 애가 황당할 정도로 생각이 없다는 생각만 했다.


지금 이 사건들을 다시 떠올리면 내가 잘 대처한 건지 혼란스럽다. 그렇다고 확실히 어떻게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그때 기준으로 그 학생들을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 중3 남학생이 24세 여교사 앞에서 그랬다고 하면 다르게 반응할 것 같긴 하다. 그게 언론에 알려지면 어떻게 될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온갖 혐오 표현에 양쪽 다 만신창이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게 그럴 만한 일인가? 그렇게 두들겨 패면 아이가 제대로 교육될까? 그때는 그럴 만한 일이 아니었다. 아닌가? 내가 너무 순진했던 건가?


그 일이 내가 교사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외면한 사건이었다는 생각을 이번에 처음 하게 됐다. 그때는 이후의 영향까지 생각 못했다. 감당이 안 되니까 적당히 넘어간 것 같기도 하다. 그걸 내가 너그럽게 참아준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바지군은 그 사건과 내 반응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본인이 어릴 때 진상짓 했다고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됐을까? 영웅담 펼치듯 낄낄대며 자랑하는 한심한 어른이 됐을까? 기억도 못할까? 중3인데도 그런 행동을 제재받지 않아서 이후에 더 큰 문제를 일으켰을까?


지금은 행동과 말을 정형화해서 죄의 유무를 나누고 스토리를 생략한 채 의도를 판단하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런데 모든 상황은 너무나 개별적이고 특별해서 현장에 있는 당사자가 아니면 판단하기 힘들다. 내가 어떻게 했어도 어쨌든 그걸 받아들이는 당사자에 따라 지도의 결과도 달라진다. 그래도 내가 따로 불러서 주의 정도는 줬어야 했다. 수치심을 느낄 정도로 강하게 대처했으면 오히려 덧났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건 그때의 사건이니까 그렇다.


지금은 그렇게 넘어갈 수는 없는 시대가 돼 버렸다. 중3이 그렇게까지 생각 없기 쉽지 않고 초등학생부터 너무 많은 일을 저지르고 있으니까. 옛날에는 웃기는 해프닝이었고 지금은 심각한 전조일 수도 있는 일이다. 시대가 그렇게 변했다. 그게 속상하다. 애들이 너무 어릴 때부터 너무 많을 것을 알고 보고 모방하고 자극받고 너무 일찍부터 오염돼서 ‘몰라서 그럴 수 있는 존재’로서 보호받는 시간이 짧아지고 있다는 것이.


발달 장애 초등학생에게도 권리처럼 혐오를 드러내는 걸 보다 보니 내가 아는 건 상식이 아니란 생각마저 든다. 애들을 너무 어리게만 보면 교육의 기회를 놓친다. 하지만 실수를 실수로 보는 냉정함도 필요하다. 아이가 저지른 일을 어른이 경험한 삶을 기준으로 판단하는 건 너무 끔찍하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여기까지 써 놓고 몇 주 동안 다시 만져봤는데 결론이 안 난다. 그래도 오늘은 그런 생각이 든다. 그때 나는 성숙하고 노련한 사람이 아니라 제대로 못 했지만 어떤 면에선 그래서 다행이었다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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