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이킹 시대의 여성들
바이킹 시대의 여성들은 남성 지배 사회였음에도 불구하고 북유럽 사회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 또한 가정과 지역 사회의 기능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남성과 여성 사이에 별도의 사회적 역할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남자들은 농지를 경작하고 식량을 제공하는 데 초점을 맞추게 된다. 필요한 경우 남자들은 지역 사회의 모든 사람들을 외부의 적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투까지 수행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대부분의 여성들은 주로 가사를 돌보는 일을 했다.
이러한 상황을 볼 때 만일 바이킹 무덤을 발굴할 때 여성 무덤에서 여성이 사용하는 물품이 아니라 전투와 관련된 물품이 나올 경우 주목을 끌기에 충분할 것이다. 여성이라면 흔히 노리개나 장신구 같은 물품들을 소지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테고 남성들의 경우에는 전투장비나 무기 등을 주로 함께 매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바이킹 시대에 남녀 간의 결혼은 대개 두 가족이 협상을 통해 결정을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상호 간에 결혼 생활에 필요한 희망사항을 수용하고 합의에 이르렀을 때 결혼을 했다. 결혼에 이르게 될 때까지 당사자들은 거의 동등한 관계를 유지했는데, 신부는 보통 지참금을 가져왔고, 남편은 신부에게 일정한 대가를 결혼 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남녀 간에 제대로 그 관계가 이어지지 못하는 경우는, 대개 결혼 지참금과 신부에 대한 지불조건이 서로에게 부담이 되는 경우에 대부분 결혼은 성립되지 못하고 말았다.
결혼을 했다고 하더라도 가정생활을 꾸려가기에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면 여성들은 이혼할 권리가 있었고, 결혼 계약서에는 그러한 경우에 서로가 공유한 재산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등에 대해 합의할 수 있도록 문서화하기도 했다. 비록 여성들이 공공 생활에서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않았지만 가정 내에서 여성들은 노예와 부양가족에 대한 권위를 행사했으며 가족에게 영향을 미치는 주요 결정에 항상 밀접하게 관여를 했다.
여성이 남편과 떨어져 있거나, 전쟁 중이거나 또는 사업을 하러 떠나 있는 경우, 아내는 남편을 대신해 집과 농장 운영에 대한 전적인 책임을 져야 했다. 그녀가 만일 미망인이라면 그녀는 남편의 자리를 지켜야 했다. 이처럼 가족의 명예는 당시 여성들에게 남성들만큼 절대적인 관심사였다.
그런데 때로는 여성들이 남성들처럼 전사로서 싸웠다는 것을 암시하는 여러 증거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9세기 후반 서유럽에서 활동해 온 위대한 바이킹 군대의 전사들은 그들의 아내와 가족을 동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여성들은 군대에 도움을 주고, 상처를 치료하고 돌보는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의 바이킹 정착지에서는 특히 다른 지역보다 여성들 활약상이 훨씬 더 눈에 띄었다.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에 정착한 여성들은 어찌 보면 처음부터 그들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여성들은 북유럽의 다른 지역 여성들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위를 누린 것으로 보이며 강인하고 용맹스러운 여성들이 북유럽 신화의 발키리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특히 여성들의 사회적 참여와 활동에 대한 것이 다른 지역과 달리 노르웨이 바이킹 활동에서 여러 사례들이 발견된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이킹 장례선에서 여성의 시신과 유물이 발견된 일이다. 일반적으로 북유럽 여성들이 장례선에서 유물들과 함께 발굴되는 일이 흔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노르웨이 지역에서는 어느 정도 일반적인 현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상대적으로 노르웨이를 제외한 다른 북유럽 지역에서 여성의 장례선이 발굴된 경우는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여성들이 지금의 러시아 지역인 키예프 루스에서 바이킹 활동을 했다는 증거나 흔적이 발견된 경우 역시 전무하다. 그동안 루스의 대부분 지역에서 여성들의 활동 흔적을 발굴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들 지역에 바이킹들이 정착을 하고 나면 대부분 현지인과 동화되어 버리기 때문에 그 흔적을 찾는 일이 쉽지 않다. 따라서 여성들이 바이킹 고유의 전통과 생활양식을 유지하면서 전통방식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발굴한다는 것은 더더욱 쉬운 일이 아니다.
2. 바이킹 여전사 신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발키리들은 거의 바이킹 여전사들과 비슷한 느낌을 준다. 북유럽 신화의 절대자 오딘의 명을 받아 죽은 자를 거두워 들이는 일을 하는 발키리들은 어쩌면 남성 바이킹들이 해야 할 일을 도맡아 했는지도 모른다. 그만큼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에서 그들이 감내해야 하는 일이 벅차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튼, 일부 학자들은 그녀들의 행위 중 상당 부분이 허구라고 말을 하지만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 역시 아무도 증명할 수가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오늘날 우리는 여성들도 남성들 이상으로 감내하기 힘들고 놀라운 행동까지 할 수 있음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예는 얼마든지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오늘날 군대에서 많은 여성들이 실제로 남자들과 똑같이 훈련을 하고 똑같이 힘든 내무반 생활을 하면서 모든 고통을 견뎌내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바이킹 시대의 여성들 역시 모두가 똑같지는 않았겠지만 몇몇 여성들은 분명 대단한 여전사로서 전투에 앞장섰을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바이킹 시대 초창기에 라게르타(Lagertha)라는 강인한 여전사가 있었다.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전해주는 이야기들은, 라게르타가 노르웨이 출신의 진짜 바이킹 여전사였다고 한다. 그녀는 전설적인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록(Ragnar Lothbrok)의 첫 번째 부인이었다.
라게르타에 관한 것은 대부분 삭소 그라마티쿠스(Saxo Grammaticus)가 쓴 문헌을 통해서 알려졌는데, 12세기에 게스타 다노룸(Gesta Danorum)이라는 문헌에 수록된 "Deeds of the Danes"라는 부분에 수록된 내용이 그것이다. 이 부분은 또한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역사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문서 중 하나이기도 하다.
삭소는 라게르타가 로드브록과 함께 스웨덴 왕 프뢰(Frø)와 치열한 전투를 수행했다고 기록을 했다. 이 전투는 라그나르 로드브록의 할아버지 시워드(Siward) 왕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치른 전투였다. 당시 스웨덴 왕 프뢰(Frø)는 노르웨이를 침략해 시워드 왕을 죽이고 왕의 여인들을 인질로 잡아다 굴욕의 제물로 삼았다.
당연히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프뢰 왕이 저지른 만행에 분노를 했을 것이고 그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모은다. 프뢰에게 학살당한 가족들 중 살아남은 사람들은 모두 라그나르에게 왔고, 특히 프뢰 왕에게 인질로 끌려간 여인들 가족들까지도 지원을 했다. 그들은 칼과 방패를 가지고 프뢰 왕을 금방이라도 치러갈 기세였다. 드디어 스웨덴 프뢰 왕과 전투가 벌어지고 인질로 끌려간 가족들이 중심이 된 로드브록의 군대는 대승을 거둔다. 그 결과 로드브록은 자신의 할아버지 시워드 왕의 복수를 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라게르타가 대단한 무공을 세운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삭소(Saxo)는 라게르타를 대단히 단련된 여전사로 표현을 하면서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했다. 특히 그녀의 전투 장면에서는, 라게르타가 머리를 묶고 늘어진 머리를 어깨 뒤로 넘기고 맹렬히 칼을 휘두르며 전투를 했다고 묘사를 했다. 그녀가 여자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치열한 전투를 벌인 라게르타에 대해 감탄하는 글을 볼 수 있다.
아직 앳된 여성의 체구를 지닌 라게르타의 엄청난 용기와 전투력에 대해 모두가 놀라게 된다. 더구나 당시에 전설적인 바이킹 라그나르 로드브록은 전혀 알지도 못하는 가녀린 여성이 보여준 열정적인 전투 모습을 보자 그녀에게 그만 빠져버리고 만다. 그러나 삭소는 라게르타가 처음에는 로드브록에 대해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커다란 곰 한 마리와 그녀의 집을 지키고 있는 큰 사냥개 한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맹수들에게 갑자기 라그나르를 공격하도록 명령을 한다. 다행히 라그나르는 즉시 곰에게 창을 던져 무지막지한 곰을 죽이고 또다시 달려드는 사냥개를 그의 근육질 팔뚝으로 숨통을 조여 죽여버리고 만다. 라게르타는 그녀 앞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라 잠시 당황했으나 로드브록의 당당한 모습에 탄복해 그의 청혼을 받아들인다. 라게르타는 로드브록과 결혼을 하고 세명의 자녀를 낳는데 프리리프(Fridlief)라는 아들과 두 딸을 낳는다.
그러나 로드브록은 아직도 그때의 일에 대해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결국에는 말다툼 끝에 라게르타와 이혼을 하고 만다. 라게르타는 고향으로 돌아가 재혼을 하고 라그나르도 라게르타와 헤어진 후 스웨덴 국왕 헤르라우드르(Herrauðr)의 딸과 재혼을 한다. 그런데 로드브록이 덴마크에 있는 그의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또 다른 내전에 직면한다.
라게르타는 이때 라그나르를 돕기로 마음을 먹고 120척의 바이킹 선박을 지원한다. 그녀는 여전히 라그나르를 사랑했고 비용에 관계없이 그를 도우려 했다. 그녀와 그녀의 전사들은 라그나르와 그녀의 부상당한 아들을 구하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전투가 끝난 후, 라게르타는 로드브록과 헤어져 또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로드브록을 도왔다고 질투하는 그녀의 남편을 창으로 찔러 죽인다. 삭소는, 그녀가 남편과 함께 권좌에 앉아 있기보다 남편 없이 혼자서 권좌를 차지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고 기록을 했다.
라게르타처럼 바이킹 전사로서 위용을 떨친 여전사를 쉽게 찾을 수는 없지만 최근 인터넷에 떠도는 바이킹 여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간혹 만날 수 있다. 여전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합해 보면, 바이킹 전사들의 신원에 대한 기사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역설적으로 여성이 바이킹 전사로서 과연 그 역할을 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최근 9세기 후반에 영국 동부로 이주한 이민자들을 찾는데 여러 가지 유형의 증거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자료들이 공통으로 강조하는 것은 북유럽 여성들이 남성들 숫자보다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매장된 북유럽인들의 뼛조각을 발굴해 유전자 분석을 한 결과는 실제 놀라울 정도로 여성 유전자가 많이 발굴되고 있다고 한다. 특히 바이킹 부대의 전사들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기사가 자주 보이는데 당시 여성의 역할을 탐구하려는 관심의 척도로 이해하면 좋을 듯 하다. 물론 그녀들이 모두 바이킹 전사라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이들 중에는 적지 않은 바이킹 여전사들도 존재했을 것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아무튼 바이킹 시대 초창기부터 바이킹들이 장악한 잉글랜드 지역에서 남성들 보다 여성들 유전자를 지닌 뼈조각들이 더 많이 발견이 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혹자는 당시에 상당수 여성이 바이킹을 위한 위안부 역할이었을 것이라는 가설을 암시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연구 결과는 다른 한편 “바이킹들이 여성들을 확보하기 위해 해외원정을 했다”는 주장과도 맞물려 있다. 최근 아이슬란드에서 진행된 유전자 연구 결과는 그런 주장을 뒷받침 하고 있다. 아이슬란드에 바이킹이 정착하는 1000년 전 이후에는 사실상 특별한 이민 역사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현재 아이슬란드 남성들 중 75%가 노르웨이에서 이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여성의 절반 이상이 실제로는 영국 출신인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궁금증을 자아내게 한다.
이 결과에 따른다면, 바이킹 남성 전사들이 잉글랜드의 여성들과 짝을 이루어 대거 아이슬란드로 이주하였다는 이야기가 성립된다. 그래서 스웨덴 웁살라 대학의 닐 프라이스(Neil Price) 교수는,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강제성이 있었을 것인지를 밝혀야 한다.”라고 지적한다. 만일 지금까지 바이킹 연구에서 주목받지 못한 여성 문제가 바이킹 해외 원정의 중요한 요인으로 그 관련성을 밝혀낸다면 앞으로 바이킹 연구에서 분명 새로운 관점을 확립하게 될 것이다.
3. 바이킹 여전사 DNA 확인
최근 바이킹 여전사에 대한 관심은 얼마 전 발굴된 바이킹 전사의 유골에 대한 유전자 감식 결과에 온통 쏠려 있다. 바이킹 연구자들이 마침내 타스(Tarth)에서 발굴된 바이킹 여전사 브리네(Lady Brienne)의 X 염색체를 찾아냈다. 한 세기 이상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이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스톡홀름 인근의 바이킹 마을 비르카(Birka)에서 발견된 무덤 중 하나에서 출토된 유골이 남자의 것이라고 추정을 해 왔다. 그러나 사실이 아닌 것으로 최종 확인되었고, 최근에 시행한 유전자 검사로 바이킹 전사의 유전자가 여성임을 밝혀냈다.
웁살라 대학(Uppsala University) 발굴팀을 이끈 고고학자 카로테 헤덴스티르나-욘슨(Charlotte Hedenstierna-Jonson)은 "실제 유골의 임자는 30세 이상이고 170cm 정도 되는 상당히 큰 골격을 가진 여성으로 판명되었다고 밝혔다. 이 연구결과는 2017년 9월 8일 <the American Journal of Physical Anthropology>지에 게재되었다.
그녀의 유골을 발굴하면서 바이킹 여전사와 함께 "칼, 도끼, 창, 화살, 방패, 그리고 두 마리 말이 함께 발굴되었다. 이외에도 그녀가 무릎에 올려놓고 할 수 있는 보드게임 같은 놀이기구도 함께 발굴되었다. 이 놀이기구는 단순한 놀이기구가 아니라 가상 전쟁놀이를 시험해 볼 수 있는 도구로 의미 있는 놀이기구라고 판단된다. 이런 유물들을 볼 때 그녀가 강력한 군사 지도자임을 보여주는 유력한 증거들이라고 볼 수 있다.
헤덴스티르나-욘슨(Hedenstierna-Jonson)이 세계의 "궁극적인 바이킹 무덤"이라고 묘사한 무덤은 스웨덴 고고학자 할마르 스톨프(Hjalmar Stolpe)가 19세기 말에 발견을 했다. 당시 무덤에서 발굴된 전사들이 사용하는 장비 때문에 그동안 입증된 사실보다 더욱 남성 바이킹 전사의 유물일 것이라고 추정을 해왔다.
그러나 스톡홀름 대학의 안나 켈스트롬(Anna Kjellström)은 몇 년 전 유골을 연구하는 중 특이사항을 발견한다. 뼈 구조가 남성이 아닌 전형적인 여성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이다. 유골의 광대뼈가 남자보다 크고 얇으며 엉덩이 뼈가 보통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 사실은 골격에 대한 보다 자세한 연구를 촉발시켰고 그 결과 더욱 바이킹 전사가 여성일 것이라는 의심을 갖게 했다. 드디어 DNA 분석을 통해 바이킹 전사가 남자가 아니라 여자라는 것을 밝혀낸 것이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 전사의 이미지는 그동안 바이킹에 대해 갖고 있던 고정관념과 현대의 선입견에 의해 강화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개인의 생물학적 성은 당연히 남성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 연구에 참여한 8명의 연구자들이 학술지에 적어놓은 내용이다. 아울러 연구자들은, "그동안 일부 바이킹 여성들이 무기를 가지고 매장된 사례가 있기는 했지만 이번처럼 여성이 중요한 지위에 있는 바이킹 함대는 별로 없었다. 따라서 더욱 바이킹 전사가 여성일 것이라고 생각하기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라고 밝혔다.
바이킹 여전사에 대한 연구는 갈수록 흥미로운 사실들을 밝혀내고 있다. 남자와 다를 바 없는 여성들의 바이킹 활동은 당시 스칸디나비아 여성들의 일반적인 행동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나 필요한 경우 여성들의 절대적인 지도자로서의 위상은 제한 없이 수행 가능했다는 점은 당시 사회의 계급적이고 권위적인 상황을 불식시키는 중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의 빠른 사회적 안정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이유가 어쩌면 오래전부터 남녀 간의 수평적 사고가 밑바탕이 되었던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