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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06. 2018

바이킹 사회는 얼마나 권위적인가?

1. 바이킹 사회의 구조     


바이킹 시대 초기 북유럽에는 지금의 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이라는 나라가 아직 왕권 국가로서 완성되지 않은 상태였다. 북유럽 지역은 왕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영주가 여러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고, 각 영주들은 지역을 통치하는 왕이 아니라 ‘알’(jarl)이라고 부르는 군주 신분이었다. 그 후 바이킹 시대가 끝날 무렵인 12세기부터 서서히 지금의 북유럽 국가들은 강력한 왕권 국가로 자리를 잡으면서 단일 왕권 국가로 성장하게 된다.     


왕권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 ‘알’이 다스리던 영주 시대에 비록 작은 영지이지만 이들 지역은 정립된 법질서체계에 따라 조직화된 사회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특히 팅(Thing)이라는 법체제를 통해 질서체계를 갖추고 자신들의 조직과 사회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이킹 시대가 시작하는 서기 800년 경을 전후해 군대 조직을 갖춘 집단들이 서서히 부각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지역의 수장을 중심으로 정비된 조직의 면모를 갖춘 바이킹 조직들이 드디어 부각되기에 이른다. 이들이 바로 바이킹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신호탄을 쏘게 된다. 그런데 이 조직에서 바이킹 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는 계층은 다름 아닌 전투를 담당하는 전사들이다.      


바이킹 시대가 전개되면서 전사들은 가장 먼저 조직의 엄격한 규율을 띠리야 했다. 특히 이들에게 엄격히 요구된 것은 누구라도 전우애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중세 유럽 왕들이 그랬듯 이들에게도 권력을 유지하고 강화하는 주요한 과제로서 전사들 관계를 우호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사항이었다.     


더구나 바이킹들이 해외 원정을 나서기 시작하면서 전투를 벌이게 되자 이들은 스스로 가장 기본적인 조건으로서 서로가 조직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노력을 한다. 그 과정에서 전사들은 조직을 장악하기 위해 권력이나 무력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조직을 유지, 보전할 수 있는 결속력을 더 중요시했다. 따라서 바이킹이 선택한 것은 바로 바이킹 전사들 간에 전우애였다.      


이것은 바이킹 조직을 위해서 뿐 아니라 죽음을 목전에 둔 바이킹 전사들 서로를 위해서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조건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용맹스러움을 자랑하지만, 반면 그들의 동료들에게는 누구보다 순하고 착한 형제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전우애는 바로 바이킹의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는 기본적 규율처럼 작용을 했다. 따라서 바이킹 조직의 가장 큰 특징은 수직적이기보다 수평적 관계를 중시하는 비 권위적 관계를 보여준다.


바이킹 시대의 사회구조를 간략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계급구조를 형성하고 음을 알 수 있다.

1. 왕(The Kings/ Konnungar) : 그들은 계층적 피라미드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하고 통치자로서 소유한 땅에 대한 완전한 권력을 행사했다.

2. 알(Earls/ Jarls) : 그들은 왕국으로 통일하기 이전 작은 영지를 통치했고, 특정 지역의 족장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왕 다음의 계급이다.

3. 칼스(The Carls/ Karls) : 그들은 노예가 아닌 자유 시민으로서 농민이나 어부, 대장장이, 목수, 건축업자 등 대다수의 부족민으로 존재했다.

4. 트랄(The Slaves/ Thralls) : 그들은 노예 계급으로서 재산이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결정권이 없는 부자유한 상태로 존재했다.     


       


2. 바이킹 사회의 특징     


바이킹 시대가 끝나갈 무렵 서서히 북유럽 국가들은 절대왕권 국가로 자리를 잡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들 국가와는 달리 바이킹들이 정착한 아이슬란드와 페로제도는 민주적인 사회로 자리를 잡는다. 흔히 이들 두 나라는 가장 먼저 의회제도를 발달시킨 나라로 꼽힌다.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는 분명 특별한 사례를 보여준다. 중세 초기에 이미 바이킹 시대를 열면서 시작된 이들 지역에서 민주적인 사회구조는 모든 사회 구성원들이 평등을 지향하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결정을 지도자나 수장이 독단으로 결정하지 않고 언제나 모든 사안이 발생할 경우에는 전 주민이 한자리에 모여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는 대 원칙을 고수했다. 이로써 직접 민주주의라는 가장 발달한 의회제도가 정착되고 이 지역의 주민들은 가장 민주적인 사회를 구성할 수 있었다.     


이들 사회, 특히 아이슬란드에서 발전한 의회제도는 알팅(Alþing)이라고 한다. 서기 930년에 처음 시작한 알팅은 아이슬란드의 수도 레이크야비크에서 동쪽으로 약 40킬로미터 떨어진 곳인 팅벨리어(Þingvellir: 팅이 열리는 계곡이라는 뜻)에서 2년에 한 번씩 여름에 전 아이슬란드 주민들이 모여 회의를 하던 의회제도이다. 회의를 할 때는 아이슬란드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말을 타거나 걸어서 회의 장소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한편, 페로제도에서는 뢰그팅(Løgting)이라고 하는 의회제도를 발전시켰는데 아이슬란드의 알팅과 이름만 다를 뿐 모든 의사진행 절차나 형식, 진행방식 등이 똑같다. 이처럼 두 나라가 의회제도 이름만 다르고 그 내용적 측면이 같았다는 것은 이 두 지역이 모두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이 설립한 정착지였기에 자연스레 같은 의회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오늘날에도 이 두 지역을 포함해 노르웨이 역시 여전히 같은 이름, 즉 팅(Thing)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의회를 구성,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세 초기의 아이슬란드와 페로 제도는 다음과 같은 계급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1) 호프딩기아르(Höfðingjar(pl.)/ Höfinging(sg.) : 사람들이 선출한 수장(족장)

2) 고다르(Goðar(pl.)/ Goði(sg.) : '팅'(의회)의 회의 진행을 맡아하는 소위 위원장 격인 사제들, 이들 역시 전체 회의에서 선출했다.

3) 본드르(Böndr(pl.)/ Bóndi(sg.) : 법에 따라 자신의 땅에서 일을 하는 자유로운 사람들

     

아이슬란드 알팅 건물과 페로제도 뢰그팅 건물
노르웨이 트론헤임 '팅'하우스


단, 수장과 사제는 특별한 권한이나 권력을 행사하기보다 자신의 역할에 충실해야만 했기에 왕과 노예가 없는 아이슬란드와 페로제도의 주민들은 거의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수평적인 자유로운 시민사회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의 의회제도는 흥미롭게도 영국의 맨섬(The Isle of Man)에 있는 의회 제도와도 거의 유사하다.(이곳 역시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이 지배하던 곳이다.) 이곳 맨섬에는 틴왈드(Tynwald)라고 부르는 의회제도를 가지고 있는데 현재에도 그 제도를 유지하고 있다. 아이슬란드의 알팅이나 페로제도의 뢰그팅, 그리고 맨섬의 틴왈드 모두 바이킹 시대부터 내려온 의회제도이지만 현재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는 오래된 의회제도라는 사실은 흥미롭기만 하다.      


그런데 또 한 가지 재미난 사실이 눈에 띈다. 초창기 북유럽 신화와 여러 다른 무용담에서 왕이나 수장들의 경호원은 일반적으로 '12'라는 숫자를 기초로 조직을 구성했다는 사실이다.(* 북유럽 신화에서 절대자 오딘이 머무는 전당 발할라를 지키는 주요 신들도 12 신이 주축이고 기독교의 예수 제자도 12명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뿐만 아니라 바이킹의 일반 병사들도 12명씩 편제를 이루고 있는 것도 흥미롭다.(* 기독교가 자리를 잡기 위해 토속 종교와 부분적으로 접목되는 과정으로 이해해도 되지 않을까?)     


그러한 예는 바이킹 전투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즉, 바이킹이 바다에서 전투를 벌일 때 가장 엘리트 병사라고 할 수 있는 전사 12명을 뱃머리에 배치하고 공격의 선봉장 역할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노르웨이 통일전쟁으로 알려진 하프스피요르드(Hafrsfjord) 전투에서(872년)도 그들은 용맹스러운 바이킹 지도자 하랄드 호르파그(Harald Hårfagre)는 12명의 특수부대원의 보호를 받은 것으로 묘사하기도 했다.


또한 초기의 바이킹이 운영하던 팅(Thing)은 이미 현대 의회, 또는 법원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바이킹 사회에서 특정한 안건이나 중요한 결정을 내려 심판해야 할 경우에도 12명의 위원을 뽑아 이들로 하여금 현재의 배심원처럼 그 역할을 수행하도록 했다.      


올라프 1세 트리그바손 왕과 트론헤임 시내 중심에 설치된 그의 동상(손에는 성배를 들고 있다)
올라프 1세 트리그바손 왕은 니다로스 성당을 세우고 트론헤임 시를 노르웨이 수도로 정했다.



3. 바이킹 사회의 구조적 특징     


바이킹 사회의 가장 큰 구조적 특징은 수직적이기보다는 수평적이고 비 권위적인 사회구조라는 점이다. 바이킹 시대가 진행되던 시기에 아직 기독교(당시 가톨릭)가 북유럽에 정착되지 않았다. 북유럽 주민들은 바이킹 시대가 전개되는 시기에 여전히 토속 종교 파간을 신봉하는 오딘의 신하들이었고, 오딘이 거주하는 발할라를 동경하며 전우애를 유지하며 전투를 했다.

     

그러나 점차 그들을 지도하고 다스리는 단순한 지도자가 아니라 왕이 출현하고 지배하면서 지배자가 추종하는 종교, 즉 가톨릭으로의 개종(16세기 초반에 이르면 개신교로 개종)이 강제로 북유럽 사회 전체로 확산되는 현상이 진행된다. 위로부터의 개종이 강제로 시행된 것이다. 그 결과 왕이 출현하는 10~11세기를 전후한 시점에 이르게 되면 대부분의 북유럽은 가톨릭으로 개종이 이루어지고 더 이상 토속 종교 파간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이러한 종교적 전환의 결과(개종의 결과)는 단순한 개인적 종교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의 구조적 특성까지 변화시켜 더 이상 바이킹 시대를 발전시키지 못하는 수직적 구조로 변화되고 만다. 이것은 바이킹 사회에서 종교의 영향이 가장 부정적으로 나타난 예가 될 것이다.     


그동안 단합된 바이킹들의 조직적 특성의 가장 큰 특징은 수평적이고 비 권위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조직적 특징은 그동안 바이킹 시대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기에 실크로드를 통해 전달된 동양의 문화를 서양으로, 그리고 북유럽까지 전파, 확산시키는 엄청난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런데 왕권이 강화되고 이로 인한 가톨릭으로의 종교 개종이 이루어지면서 더 이상의 문화 가교로서의 바이킹 네트워크 역할은 보이지 않게 된다.     


여하튼 북유럽에 가톨릭이 전파되고 정착되는 11세기 중반 이후에는 거의 바이킹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게 된다. 다만 신화의 영역과 예술이나 민속 등에 국한되어 그 형태와 의미가 전승되고 맥을 잇고 있을 뿐이다. 간단히 말해, 바이킹 흔적은 바이킹 시대가 끝날 무렵 기독교 전파와 함께 그 자취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말이다. 정말 특이한 현상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덴마크 문화부 장관은, 지난 덴마크 역사에서 가장 최악의 역사가 바로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어쩌면 기독교라는 종교가 지닌 유일신을 강조하는 특징이 수평적 관계보다 수직적 관계를 유지 발전시키는데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일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만든다. 따라서 북유럽 여러 사회 구성원들이 기독교로 개종을 하고 왕권 강화를 위해 더 이상 바이킹이라는 수평적, 비 권위적 조직의 유지 발전에 기여할 수 없다는 점이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 이러한 절대왕권의 자리잡음으로 인해 해외 원정이나 다른 문화와의 교류 협력이라는 네트워크의 유지 발전 역시 불필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겠다.          


스웨덴과 덴마크에서 발굴된 8세기에 제작된 바이킹 장식물인 토르의 망치와 소뿔로 만든 술잔(덴마크 리베 박물관 소장)



4. 북유럽 사회의 변화     


중부 유럽의 절대 권력자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카를로스 대제라고도 부른다.)는 서기 800년 로마 교황에게서 로마 황제라는 직위를 받는다. 그동안 그는 스페인의 아스투리아스 왕국과 이탈리아 남부와 브리튼 제도를 제외한 서유럽의 모든 기독교 지역을 사실상 하나의 초강대국으로 통일한다. 그러나 그가 건설한 '제국'은 아쉽게도 그의 아들 세대에 이르러 소멸하고 만다.      


여하튼 샤를마뉴 대제는 그가 살아있을 때 무력으로 이교도들을 기독교(가톨릭)로 개종시킨 성과를 이룬다. 특히 노르망디에 거주하는 바이킹에 대한 가톨릭 전파는 폭력 없이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바이킹에 대한 개종이 시작되었음을 암시하게 되고, 저항 없이 개종이 이루어진 점 역시 중요한 관심 대상이다.     


그런데 바이킹이 가톨릭으로 개종한 데는 사실상 특별한 사유가 있었다. 즉, 바이킹 시대 초기 바이킹 상인들은 거래 상대가 가톨릭 신자일 경우 무역 계약과 거래에서 손실을 덜 입었다고 한다. 가톨릭 상인들은 이교도와 모슬렘을 차별하면서 다른 가톨릭 신자들에게 더 많은 사업과 더 나은 거래를 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유럽의 가톨릭 세력이 중부 유럽을 지배하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한다면, 가톨릭 세력이 상권 지배와 거래 과정에서 적지 않은 영향력 행사가 있었을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바이킹 상인들은 사회적 교류 과정에서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리고 가정에서는 평소대로 토르의 망치를 추종하는 파간 신도로서 활동을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에는 북유럽인들이 가톨릭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고 이중적 종교인 태도를 견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바이킹은 자신의 신을 사랑했고 북유럽 신화의 절대자 오딘에게 만족했기 때문이다.

     

한편, 잉글랜드와 프랑크 출신 가톨릭 사제들은 서기 7~800년대에 본격적으로 바이킹 땅으로 선교 여행을 떠난다. 그러나 바이킹 전사들이 가톨릭으로 전환하는 데에는 그로부터 수세기의 시간이 걸린다. 덴마크 왕과 스웨덴 왕이 가톨릭 신자가 되었을지라도 그의 백성들까지 동시에 기독교인이 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이교도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토속종교를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바이킹 시대가 끝날 무렵에 이르러 대부분의 북유럽인들이 가톨릭 신자로 개종을 했고 세례를 받아 새로운 종교인으로 거듭나게 된다.     


덴마크 왕국 초기 바이킹 출신 왕 하랄드 클락(Harald Klak)은 서기 826년에 세례를 받는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나면 하랄드 블루투스(Harald Bluetooth, 935-986) 왕이 서기 965년에 세례를 받는다. 이 때는 100여 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가톨릭이 덴마크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덴마크가 가톨릭 국가로 자리를 잡았다고 생각하기에는 여전히 이른 듯했는지 당시 하랄드 블루투스 왕은 “새로운 믿음(가톨릭)이 다음 몇백 년 동안 예전의 믿음(파간)과 함께 살아가면서 조만간 모든 덴마크인들이 기독교인이 되리라”라는 것을 선언하는 ‘옐링 스톤’(Jelling Stone: 옐링은 블루투스 왕의 고향이기에 옐링 스톤은 그를 상징하는 기념비이다.)을 세운다.  

   

여하튼 덴마크 바이킹들은 가톨릭을 서서히 받아들였다. 서기 1110년, 덴마크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리베(Ribe)에 최초의 옐링 스톤을 설치하면서 시작된 종교 개종 문제는 서기 1134년이 되자 완성된다. 이때가 되면 대부분의 덴마크인들이 드디어 전통신앙(파간)에서 기독교(가톨릭)로 개종을 한다. 동시에 이교도(파간)는 엄격히 금지된다.     


한편, 노르웨이에서 기독교(가톨릭)로 개종이 이루어진 것은, 올라프 트리그바손(Olaf Trygvason, 960-1000)이 파간 신도인 하콘 알(Hakkon Jarl) 왕에 대한 반란을 성공적으로 이끈 서기 995년의 일이다.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은 하콘 알 왕의 뒤를 이어 올라프 1세(Olaf I)로 즉위하자 강제로 노르웨이 국민들을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엄명을 내린다.      


그는 파간 사원을 불태우고 개종하지 않은 시민들은 잔인하게 모두 죽여버린다. 트리그바손 왕의 이러한 폭력적 개종 방법은 과연 종교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또 다른 철학적 문제를 제기하지만, 어쨌든 이러한 폭력적 방법을 통해 노르웨이 대부분 지역에서 파간은 자취를 감추고 기독교(가톨릭)로 개종을 완수하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에 저항하는 바이킹 전사들이 아이슬란드로 떠나기 시작하고 심지어 북아메리카까지 탐험길에 나선다.    

 

뿐만 아니라 10세기부터 11세기 사이에 바이킹 활동이 가장 가열차게 진행되는 이유가 바로 트리그바손 왕의 폭력적인 개종에 맞서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까지 나오고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기독교(가톨릭) 개종에 대한 강요가 심하면 심할수록 전통신앙인 파간에 대한 상대적 보호본능이 높아지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그래서 올라프 트리그바손 왕의 후손인 올라프 2세가 대를 이어 계속 폭력적인 개종 정책으로 북유럽 주민들에게 종교 개종을 강요하자 주민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노르웨이를 떠나 해외 원정(바이킹)에 나선다.

     

올라프 2세는 노르웨이 남쪽 사롭스보르(Saropsborg)에 안착해 도시를 세운다. 시내 곳곳에 왕이 되기 전 청년 시절의 그를 기리는 동상들이 설치되어 있다
성인으로 추대된 올라프 2세가 다른 성인들과 함께 니다로스 성당 벽면에 왕관을 쓰고 도끼와 성배를 든 모습으로 서 있다.


당시 올라프 2세가 주민들을 기독교도로 개종시키기 위해 행한 폭압적 행위는 그가 죽은 후 역설적으로 가톨릭 전파 공로를 인정받아 성인으로 추대되는 요인이 된다. 폭압적인 왕 올라프 2세의 모습은 니다로스 성당에 설치된 그의 동상에서도 느껴진다. 그는 성인으로서 현재 트론헤임 니다로스 성당 벽면에 여러 다른 성인들과 함께 자리하고 있는데 바이킹 군주로서 왕이 되었기에 바이킹 상징인 도끼를 든 모습으로 부조되어 있다. 올라프 2세 왕은 죽은 후 트론헤임(당시 노르웨이 수도)의 니다로스 성당에 안장되고 성자로 추대되었다.

      

한편, 스웨덴 역시 후기 바이킹 시대에 이르는 11세기가 되면 스웨덴의 주교회의가 본격적으로 입장을 표명하기 시작한다. 당시 스웨덴 왕과 주교회의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스웨덴을 기독교(가톨릭) 국가로 전환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취한다. 우선적으로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스웨덴 국민들로 하여금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압력을 행사한다.     


그러나 여전히 북유럽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스웨덴 국민들 역시 빠른 시간 내에 기독교로 개종을 하기보다 서서히 파간에서 기독교로 개종을 해 간다. 그러나 결국 한 세기가 지난 12세기에 이르게 되면 스웨덴 역시 대부분의 시민들이 기독교(가톨릭)로 개종을 한다.     


바이킹 사회의 구조적 특징은 어쩌면 이렇게 전통신앙 파간에서 가톨릭이라는 종교로 전환을 하는 과정에서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 과정은 다른 말로 하면, 비 권위적이고 수평적인 사회에서 바이킹의 출현과 발전이 가능했고, 수직적이고 권위적인 사회를 지향하는 왕권이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바이킹 시대의 몰락이 진행되어 갔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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