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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Oct 30. 2018

칼과 도끼로 무장한 바이킹은 악마인가?

1. 바이킹 시대가 열리다    

  

서기 793년 6월 8일 이른 새벽 세척의 선박을 앞세운 바이킹이 영국 에딘버러 남쪽 15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린디스판(Lindisfane) 섬을 기습 침략한다. 이날 아침은 기록에 의하면 안개가 자욱하게 끼였다고 한다. 짙게 깔린 아침 안개를 뚫고 바이킹 선박들은 바닷물을 가르며 조용히 린디스판 수도원이 있는 해안가에 당도한다. 그러나 린디스판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그 누구도 수도원으로 다가오는 배들을 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했다.     


9세기 말  노섬브리아 왕국, 에딘버러 아래 린디스판 섬 

그들은 칼과 도끼, 그리고 방패로 무장한 사나운 몰골을 한 바이킹 전사들이었다. 수도승들은 전투에 대비한 어떤 준비도 하지 않았다. 단지 수도승들은 무장을 한 사나운 전사들을 맨몸으로 맞아들였을 뿐이다. 그들은 재물을 약탈하고 거의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수도원을 파괴해 버린다. 또한 그들은 이곳의 수도승들을 죽이거나 노예로 끌고 갔다. 그 후 수도승들은 바이킹 전사들을 완전히 피에 굶주린 짐승 같은 놈들로 묘사한다.     


바이킹 습격으로 수도원은 물론 린디스판 섬은 향후 300년 동안 유럽 역사를 지배하게 되는 바이킹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여기게 된다. 영국 동쪽 해안가에 위치한 ‘신성한 섬’(지금은 린디스판이 아닌 ‘Holy Island’라고 부른다.)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 섬에는 지금 폐허가 된 수도원과 수백 년 세파를 견뎌온 오래된 성이 하나 남아있을 뿐이다.      


수도원과 성의 이름은 린디스판(Lindisfarne)이라고 한다. 린디스판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사이 접경지대에 위치해 있다. 예전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간에 전투가 자주 벌어지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중세시대에는 이곳에 바이킹 침공이 빈번했다. 바이킹이 린디스판 수도원을 공격할 당시에 성은 없었지만 나중에 린디스판 수도원이 파괴된 후 수백 년이 지난 1550년부터 성을 짓기 시작했다. 성은 부서진 수도원 건물 잔해들을 이용해 건립했는데, 이 성은 그 후 1570년 경 현재 모습으로 완성된다.     


린디스판 성

 

그런데 ‘바이킹 시대’(vikingatid)라는 스웨덴 단어가 19세기 말부터 사용되기 시작한다. 고고학자들이 스웨덴 스톡홀름 인근의 바이킹 정착지 비르카(Birka)와 맬라(Mȁlar)에서 유물을 발굴하던 1870년대에 바이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바이킹 시대’라는 말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한편, 역사 학자들도 북유럽 사람들이 유럽을 포함해 아이슬란드와 그린란드, 그리고 러시아로 격렬한 팽창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킹 시대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바이킹들은 모든 주변 국가들을 그들의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바이킹들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아일랜드, 프랑스와 이탈리아 남부, 그리고 심지어 내륙에 위치한 러시아 연안까지 모두 침공해 들어갔다. 사람들은 이들을 바이킹이라 불렸으며, 그들이 거쳐간 지역은 당연히 약탈과 정착이라는 이중적 행태를 보여주었다. 바이킹 흔적은 곳곳에 여러 형태로 남아 있는데 그 흔적은 그대로 바이킹의 세력 범위가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많은 학자들이 바이킹의 공격 배경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데, 과연 이들의 목적과 목표가 무엇이었을까 라는 점에 대해 집중 토론을 벌였다. 그 결과 대부분 결론적으로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북유럽 지역의 농업 생산성 감소에 따른 이유가 가장 큰 것으로 보았다.      


북유럽 지역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험악한 지형과 기후들이 차갑고 가혹한 집을 떠나 보다 나은 다른 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을 찾도록 유도했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이다. 그 결과 대부분의 북유럽 사람들이 바이킹에 참여해서 그들의 혹독한 계절과 생활조건을 견디기 위해 그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보물과 여러 물품, 더구나 노예를 포함한 전리품들을 그들의 고향으로 가지고 돌아갔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한편, 바이킹 시대가 막을 내리는 11세기 말에 이르게 되면 북유럽에서는 잠정적으로 해외 원정을 중단하게 된다. 이 시기에 그들은 덴마크와 스웨덴, 그리고 노르웨이라는 강력한 왕국으로 변모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해외보다는 자국 내 통치에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할 필요성을 절감했기 때문이다.      


북유럽 국가들이 이처럼 절대왕권을 지닌 국가로 자리를 잡아가는 순간 그들에게는 사회통합의 수단을 필요로 했다. 지금까지는 해외 원정을 하면서 그들에게 무지막지한 용맹스러운 모습을 얻기 위해 전통 신앙인 파간(pagan), 즉 오딘을 주신으로 하는 북유럽 신화를 기조로 바이킹의 규율로 삼고 가치를 부여했지만 이제는 왕권을 강화하고 사회안정을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이고 세계적인 종교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이를 토대로 왕권을 강화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에 따라 이후 가톨릭 이외의 종교는 모두 이교도(특히 토속 종교인 ‘파간’ 신도들)로 취급하면서 박해를 가한다. 따라서 이교도로 내몰린 사람들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지 않으면 모두 극형에 처하는 참사를 겪어야 했다. 이로써 구세계의 다신론적 가치는 철저히 약화되고 북유럽의 토착 종교(pagan)는 몰락하고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다.     


심지어 바이킹의 일원으로 해외 원정에 참여하고 현지에 정착한 북유럽 출신 사람들 조차 차츰 현지 문화와 그 사회에 동화되어 갔다. 잉글랜드를 침략한 덴마크 바이킹은 영국 문화에 동화되어 갔고, 노르망디에 정착한 북유럽 사람들은 프랑스 전통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키예프 루스(Kievan Rus)를 지배하던 바이킹 역시 슬라브 사람이 되어갔다. 그렇게 북유럽 출신 바이킹 전사들이 현지 문화에 적응, 동화되어감으로써 그동안 용맹스럽고 잔인한 바이킹 전사로서의 정체성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린디스판 수도원 유적지

     


2. 조작된 이미지인가 사실적 이미지인가?     


역사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의 진실만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역사가 분명하든지, 또는 불명확하든지 간에 이를 소개하고 정보를 선택하는 경우 역사가 존재하던 시기에 있었던 사실과 다른 경우가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더욱이 과거의 명명백백한 역사적 사실이라 할지라도 현재의 상황 윤리에 따라 직접적인 왜곡과 조작을 통해 지난 일들을 해석하는 경우까지도 공공연히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니 우리가 역사를 받아들이고 해석하는 방법의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     


더구나 역사란 다양한 방법으로 해석하고 활용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처럼 역사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일지라도 때로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활용하기도 한다. 역사에 대한 이러한 활용의 극단적인 예가 바로 여러 시기에 걸쳐 형성된 바이킹 이미지일 것이다.    

 

오늘날 북유럽 국가들은 ‘바이킹’을 단순한 역사적 사실로서 뿐 아니라 국민적 감정을 통합하고 새로운 미래를 위한 분위기 조성에 필요한 중요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최근에 이르러 “강력한 스웨덴을 위해 바이킹이 필요하다"라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돌고 있을 정도이다. 뿐만 아니라 북유럽과 연관된 모든 역사에서 바이킹은 이제는 빠져서는 안 되는 가장 중요한 상징적 개념으로 활용된다.     


이러한 노력은 스웨덴 뿐 아니라 노르웨이와 덴마크 등도 자국의 위상을 높이고 국민통합의 수단으로 바이킹에 대한 가치를 중요시하고 활용방안을 마련하고 있음은 마찬가지이다. 그러한 예의 하나로 기독교 국가인 덴마크가 토착 종교 파간(Pagan)을 추종하던 바이킹들을 위해 새로운 바이킹 박물관뿐 아니라 파간 사당 건축을 허용하고 바이킹 축제를 시작한 것을 들 수 있다.     


이런 상황은 어쩌면 북유럽 국가들이 선사시대 이후 북유럽에 거주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미천한 역사와 주변국들에 대한 이해의 갈등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필요 과정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스웨덴을 비롯한 덴마크나 노르웨이가 독립국가로 확립되는 역사적 과정에서 자국의 존재와 자국민들의 자존감 제고를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슬로 인근에서 발굴된 바이킹 롱쉽 오세베르그 호와 함께 발굴된 바이킹 검
스톡홀름 인근 바이킹 마을 비르카의 소녀 밀랍인형과 바이킹 루네스톤 포스터


그동안 다행히 바이킹에 대한 역사적 가치가 있는 여러 유적지를 발굴하고 문화적 흔적들을 규명함으로써 차츰 북유럽의 오래전 역사와 문화적 행태에 대한 규명이 가능해졌다. 이와 함께 바이킹에 대한 연구도 상대적으로 충실해졌다. 따라서 북유럽에서 바이킹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생활방식이나 그들의 해외 원정 과정의 의미와 특징,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문화적 흔적 등도 더 많이 알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연구들을 통해 역사에 묻혀 있던 스웨덴의 바이킹 마을에 관한 이야기들, 특히 웰란드(Ȍland)의 지도자나 비르카(Virka) 출신의 소녀, 그리고 벤델(Vendel) 출신의 지도자와 같은 역사 속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들은 바로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북유럽 사람들의 또 다른 모습이다. 따라서 이들의 인간상을 통해 북유럽인들의 미래를 예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난 바이킹 시대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바이킹에 대해 악랄하다거나 험악한 면모를 지녔다고 부정적 이미지를 강조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어떻게 오늘의 바이킹 이미지를 구축하고 활용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해진다. 역사 속 이미지는 시간의 흐름과 함께 그야말로 시시각각 변하기 마련이다. 동일하고 변하지 않는 이미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이미지가 현재 바이킹에 대해 따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바이킹은 그동안 재물을 탈취하고, 또는 정착지를 건설하고 정착을 하는 과정에서 대부분 당시 가톨릭 수도사들이 있는 곳을 공격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수도원에 재물이 많았기 때문이란 단순한 사실 때문이다. 그리고 수도원이 위치한 곳은 대부분 좋은 경작지와 해안가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기에 바이킹 선단이 정착을 하거나 공격을 하기에 최적의 장소였음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분명 가장 큰 피해자는 수도승들이었을 것이며 문자해독률이 가장 높은 수도사들이 당시 상황을 기록했을 것이란 사실이다. 따라서 바이킹의 잔악한 침략행위에 대한 기록과 역사의 대부분을 바이킹의 희생자인 당시 유럽 성직자들이 기록했을 것이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당연히 바이킹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 이미지가 강조되었을 것이란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바이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그대로 유지할 것인지, 또는 바꿀 것인지를 선택하는 문제가 남는다. 이것은 바이킹들이 이루어 놓은 긍정적인 역사 발전 과정을 과연 언제까지 그대로 묻어둘 것인가라는 문제와도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다. 따라서 바이킹의 긍정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주장을 곱씹어볼 일이다.     


최근에 바이킹에 관한 새로운 증거들이 속속 밝혀지고 있고, 이러한 정황들은 지금까지 바이킹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 이미지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만들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역사는 대부분 승자에 의해 쓰이지만 그 반대편 입장에 있는 역사의 희생자가 펜을 가지는 경우라면 과연 역사의 흐름은 어떤 식으로 표현이 되는지 상상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수세기 동안 그들의 기록은 언제나 자신들의 희생을 정당화하고 있었고 바이킹의 행위는 대부분 부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 신부와 수도사들의 눈으로만 바라본 바이킹 역사는 그렇기 때문에 또 다른 신화로 자리하게 되고, 그 역사는 특정의 방향으로 이미 내용이 왜곡될 가능성이 예정되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바이킹 롱쉽 선수와 바이킹 투구들

          


3. 바이킹의 양면성     


유럽의 발전과정에서 바이킹이 기여한 공로와 가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에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게 된다면 문제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최근에 이런 시각을 비판하고 바이킹에 대한 다른 시각을 제기한 앤더슨 윈로스(Anders Winroth)는 ‘바이킹 시대’(The Age of the Vikings)라는 책에서 그런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우리는 오랫동안 바이킹을 완전히 오해했을 뿐 아니라 바이킹들이 유럽을 구한 사실 조차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이킹에 대해 “우리는 그동안 너무 일방적인 주장에만 노출되어 사실을 확인하고 진실을 추구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한다.     


"특히, 바이킹이 글쓰기에 대한 독점력을 가진 이들을 공격했기 때문에 바이킹 이미지는 자연스레 역사상 악명 높고 비합리적이며 피에 굶주린 무리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이킹의 부정적인 이미지는 결국 ”언제나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비이성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바이킹이 문화적이거나 기타 정상적인 사회적 존재로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를 공격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에게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비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그 대상이 종교적인 시설이나 관계자일 경우 이들에 대한 공격은 누가 뭐라 하든지 부정적인 폭력 이외에 그 어떤 표현도 용납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처음 바이킹이 출현했을 당시 그들의 무자비한 행위는 물론이고 그 후에 이루어진 바이킹의 약탈과 침략 행위들은 모두 원주민들을 무참히 짓밟고 그들의 거주지를 황폐화시킨 못된 해적질로 밖에 달리 평가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이킹의 부정적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정적 행위의 이면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긍정적 결과들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바이킹의 가장 큰 공로는 당시 활성화되지 못한 유럽 국가 간 교역을 활성화시키고 이를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공로는 분명 유럽을 새롭게 만드는 윤활유와도 같은 효과를 지닌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바이킹 습격으로 비참하고 파멸적인 결과도 발생했을 테지만 북유럽 바이킹들의 항해는 예기치 않게 침체되었던 그간의 유럽 경제를 자극하고 활성화시키는 업적을 이룬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주장도 어느 면에서는 타당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긍정적 결과, 즉 바이킹 네트워크 효과가 나타난 것은 바로 바이킹 덕분이라고 윈로스(Winroth)는 강조한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국가 간 상업적 이해를 추구하는 무역거래가 거의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다행히 바이킹 시대가 시작되고 겨우 3세기 정도의 짧은 기간이기는 하지만 바이킹 시대가 끝나기 전에 어느 정도 예전에 있었던 유럽 국가들 간의 교역 네트워크가 회복되고 무역거래도 어느 정도 활성화된다.     

그러나 두 가지 만은 여전히 회복되지 못하고 침체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하나는 샤를 마뉴 왕국과 그 지역 전체에서 무역이 마이너스 상태를 유지한 것이다. 이것은 주로 화폐가 금과 은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발생한 일인데 귀금속, 특히 아프가니스탄 동부에서 나온 금과 은을 원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화폐사용 문제를 쉽사리 해결하기 어려웠다.     


두 번째는, 통화를 사용할 수 없는 지역이 존재했기 때문에 이런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경제 성장을 제한하는 물물 교환 시스템을 통해 거래를 해야만 했다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물품교역 종류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는 단점이 발생한 것이다. 바로 이런 상황에서 바이킹은 두 가지 문제를 모두 해결하는 묘수를 찾아낸 듯 보였다. 첫 번째는 귀금속으로 화폐를 대신하는 일이, 역설적이게도 수도원과 교회를 공략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이킹들이 유럽에서 유일한 귀금속의 원천을 찾아낸 듯이 보였다. 즉, 바이킹이 유럽 무역 네트워크와 연결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유럽 연안 국가에서 약탈한 귀금속들은 결국 부족한 화폐를 조달하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과 은으로 만든 장신구들
바이킹 해외 원정 지도


바이킹은 그런(약탈한) 화폐를 가지고 지금의 프랑스 지역에서 검을 사고 파는데 이용하거나 직접 귀금속을 사용해 현지 화폐, 즉 금화나 은화를 주조하는데 이용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런 사실들은 분명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뿐 아니라 바이킹은 중서부 유럽에서 중세 시대의 유럽 중흥을 위해 가장 큰 공을 세운다. 이것은 바이킹들이 실크로드를 통해 무역거래를 하면서 중앙아시아에서 은을 가져온 것이다. 바이킹이 서쪽의 그린란드와 아이슬란드에서부터 동쪽의 동슬라브 지역과 볼가강에 이르기까지 그 영향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바이킹이 서쪽의 유럽에서 가져온 막대한 수출품들, 주로 모피와 생선 말린 것들을 동쪽 유럽시장에서 노예와 귀금속 등과 교환하는 거래를 통해 "서유럽과 동유럽 간의 무역 균형을 일방적으로 조정했다"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극동지방에서 가져온 비단과 도자기 등을 유럽의 노예와 귀금속 등과 교환함으로써 유럽과 아시아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는 효과를 야기한 점 역시 특기할 만하다. 따라서 당시 침체되어 있던 유럽의 경기 회복은 윈로스의 말 대로라면, "바이킹 시대였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바이킹은 분명 어떤 사람들에게는 흉악한 해적처럼 두려움의 대상일지 몰라도, 다른 한편으로는 바이킹 덕분에 동서 간 화합과 교류가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커다란 행운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언제나 역사적 사실은 대개의 경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기억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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