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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Oct 23. 2018

북아메리카에서 러시아까지 공략한 바이킹

 1. 북대서양과 슬라브 지역 바이킹 흔적들      


바이킹은 그들의 고향 북유럽을 떠나 멀리 떨어진 곳으로 원정을 나갔다. 먼저, 서쪽으로 향한 노르웨이 바이킹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슬란드를 발견하고 그린란드를 거쳐 빈란드(Vinland)라고 부르는 북미 대륙을 발견한다. 이들은 탐험가와 정착민으로서 모두 성공하는 대단한 성과를 올린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아이슬란드 이외에도 북대서양 섬들에 상당한 규모의 정착촌을 설립하기도 한다.   

   

가장 대표적인 곳으로 당시 무인도나 마찬가지였던 페로제도(Faroes)가 있다. 페로제도는 북대서양 상에 있는 아이슬란드와 노르웨이 서쪽 해안 사이에 있는 인구 5만이 조금 넘는 작은 섬들 10여 개가 모여있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스코틀랜드 북동쪽에 있는 오크니 제도와 셔틀랜드 제도 역시 노르웨이에서 온 바이킹들이 정착촌을 건설한다.     


서기 825년, 아일랜드 신부가 기록한 바에 따르면, 북유럽 사람들이 수세기 동안 페로제도에 거주했으며 이들은 전통신앙 파간(pagan)을 따르던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북유럽 사람들은 이곳을 페레이야(Færeyjar)라고 불렀으며, 이 섬에는 나무가 없기 때문에 정착민들은 잔디와 바위로 집을 지었다고 한다. 섬에 사는 사람들은 당시에 가축을 길렀으며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 특히 고래와 새 등을 수확했다고 한다.     


페로제도와 마찬가지로 바이킹이 아이슬란드로 이주해 오기 전 이미 아일랜드 출신 가톨릭 신부 여러 명이 아이슬란드에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860년 경 바이킹이 아이슬란드에 첫발을 내디딘 후 아이슬란드는 바이킹의 식민지가 된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나자 아이슬란드는 바이킹 정착촌으로 완전히 자리를 잡는다.   

   

정착민 중 반이 넘는 사람들이 노르웨이 베르겐 인근에서 왔다고 한다. 그들이 처음 아이슬란드로 이주해 온 동기는, 9세기 말 당시 노르웨이를 통일하고 왕위에 오른 하랄 페어헤어(Harald Fairhair)가 지나치게 정치적 압박을 가하자 도망치듯 이곳으로 왔다고 했다. 그리고 또다시 10세기 말 당시 노르웨이를 통치하던 올라프 1세와 올라프 2세가 주민들을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려 하자 대거 탈출을 시도해 아이슬란드로 이주를 단행한다. 그 결과 10세기 말에는 아이슬란드에 정착한 주민들이 수 만 명을 넘는다.     


노르웨이 바이킹이 아이슬란드로 대규모 이주를 단행하자 이곳에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파파르족이 저항을 하는데 역부족으로 패하고 만다. 그 결과 더 이상 원주민들은 바이킹과 갈등을 일으키지 않게 된다. 이제 바이킹 수장들은 마음 놓고 가족과 하인들까지 아이슬란드로 불러들인다. 아이슬란드로 이주한 주민들은 최초의 의회제도라고 하는 ‘알팅’(Althing)을 만들고 이주민들 거주지역을 알팅의 지배를 받는 네 개의 연방으로 재편한다.     

‘알팅이 열린 계곡’이라는 뜻의 아이슬란드  ‘팅벨리르’(Thingvellir) 국립공원
그린란드 수도 누크시 포구와 거주지, 바이킹들은 바로 이 도시 근처까지 항해를 했다.


아이슬란드 원주민은 켈트족과 혼혈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아이슬란드로 이주한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이번에는 켈트족과 결혼을 하게 되면서 점차 섞이게 된다. 정착민들 가운데 기독교인과 이교도의 비율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독교인의 숫자가 눈에 띄게 증가한다. 공식적으로는 서기 1000년 경이 그 분수령이 된다. 아이슬란드는 수세기 동안 자유 국가로 남아 있었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이 초기 정착민으로서 아이슬란드에 상당수가 정착함으로써 아이슬란드의 문화와 정치제도에 모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아이슬란드는 바이킹 시대가 끝나자 1262년 공식적으로 노르웨이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된다.   

  

여하튼, 아이슬란드를 정복한 바이킹 수장 ‘붉은 털 에릭’(Erik the Red)은 계속해서 해외 원정에 나서서 이주자들과 함께 새로운 식민지를 개척해 나간다. 아이슬란드에 정착해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었는데도 붉은 털 에릭은 서기 985년경 또다시 거의 사람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그린란드에 당도해 식민지로 만든다.      


빈번한 해외 원정으로 바이킹 탐험가라는 별명이 붙은 붉은 털 에릭은 어느 날 새로운 정착지에 대한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아이슬란드로 돌아온다. 붉은 털 에릭은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그가 발견한 곳을 "그린란드"(Old Norse: Grœnland)라고 불렀다. 그린란드라는 이름은 사실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섬의 남쪽 부분에 몇몇 해안 지방은 충분히 정착해 가축을 키울 수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땅은 빙하와 얼음으로 덮여 있어 거주하기가 쉽지 않았다. 아이슬란드보다 훨씬 추웠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에릭의 설득이 먹혀들자 985년 여름 25척의 배가 그린란드로 향한다. 그러나 바다는 이들을 순순히 항해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결국 14척의 배만 그린란드에 당도한다. 다른 배에 탄 사람들은 되돌아 갔거나 배가 침몰해 사라졌다. 그린란드에 도착한 사람들은 섬의 남쪽 피오르에서 약 600Km 정도 떨어진 두 지역에 정착해 동부와 서부 거주지를 만든다. 이 지역은 그 당시 이누이트들이 멀리 떨어진 북쪽 지역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바이킹들이 도착한 지역에는 아무도 살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먼저 추운 곳에서 견딜 수 있도록 노르웨이 전통가옥 형태인 지붕에 떼를 입힌 가옥을 짓고 건초를 만들 충분한 땅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린란드가 정착지로서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바다는 바이킹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풍부한 어류와 해마, 물개, 고래와 같은 그린란드 연안 해역에서 서식하는 많은 바다 생물들이 유럽에서 매우 좋은 반응을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서 자라는 여우나 곰, 순록 등 야생 동물들도 그들에게는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      


이 동물들 덕분에 그린란드에 정착한 바이킹은 유럽과 무역을 하면서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척박한 기후조건으로 좋지 않은 토지 대신에 그린란드 바이킹은 기본적인 재화를 얻기 위해 외부 세계와 무역에 더욱 치중하게 된다. 다행히 그린란드의 자연조건은 이들에게 필요한 만큼의 자원을 제공했다.     


바이킹이 10세기 후반 그린란드에 정착한 후, 붉은 털 에릭의 아들 라이프 에릭손은 이번에는 아버지를 대신해 계속해서 서쪽 땅을 향해 항해하기로 결심한다. 그린란드의 가혹한 기후에서 생활하는데 필요한 목재와 기타 자원을 찾기 위해서였다. 25세의 젊은 바이킹 지도자 라이프 에릭손(Leif Ericsson)이 이끄는 무리들이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한다. 서기 1000년 경 드디어 지금의 캐나다 뉴펀들랜드(Newfoundland)에 도착한다.      


아이슬란드 레이크야비크와 노르웨이 트론헤임에 있는 라이프 에릭손 동상
페로제도 라이프 에릭손 1000년 경 미국발견 기념우표와 1968년도 미국 발행 우표

     

라이프 에릭손(Leif Ericsson)은 975년 경 아이슬란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985년 처음 그린란드를 발견하고 정착촌을 설립한 붉은 털 에릭(Eric the Red)의 아들이다. 처음에 노르웨이 올라프 1세 왕은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하고 노르웨이를 떠난 바이킹 주민들에게 붉은 털 에릭이 그린란드에 정착한 후 그들에게 가톨릭 전파를 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라이프 에릭손은 아버지가 하려는 일을 알아차리고 그린란드 대신 아메리카를 찾아 떠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라이프 에릭손과 그의 동료들은 북미에서 처음으로 헬류랜드(Helluland)라고 부르는 장소에 도착했는데 그곳은 산과 빙하로 둘러싸인 황량한 땅이었기에 "평평한 돌의 땅"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어쩌면 캐나다 북동부 연안에 있는 배핀섬이었을지도 모른다. 거기서부터 또다시 라이프 에릭손과 그의 동료들은 남쪽으로 항해했고, “숲의 땅”(Forest Land)이라고 부르는 마크랜드(Markland)에 당도한다. 이곳은 아마도 래브라도 해안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곳에서 또다시 이틀을 더 항해해 드디어 남서쪽에 있는 빈랜드(Vinland)에 당도한다.      


빈랜드는 원래 뉴펀들랜드에서 뉴브런즈윅까지를 말하는데 기본적으로는 캐나다 동부의 세인트 로렌스(St. Lawrence)만의 해안 지역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인다. 라이프 에릭손과 그의 동료들은 빈랜드에서 그린란드로 돌아가기 전까지 몇 년간 이곳에서 거주를 한다. 그 후 몇 년 동안 다른 사람들이 라이프 에릭손이 지나온 길을 따라 이곳으로 이주를 하려고 시도를 했지만 이곳에서 바이킹들은 스크랠링스('Skrælings)라고 하는 아메리카 인디언 부족과 마주치게 된다. 그래서 이곳에 정착하려던 바이킹들은 모두 아메리카 원주민 인디언들에게 추방되고 만다.     


북미대륙에 도착한 라이프 에릭손 일행과 원주민 인디안(그림: Angus McBride)


라이프 에릭손과 그의 일당이 이곳에 그리 오래 머물지는 않았지만 북미에 도착한 바이킹들은 고고학적으로 유의미한 흔적을 남겼다. 최근에 캐나다 고고학자들이 예전 바이킹들이 남겨놓은 바이킹 유적지 세 곳을 캐나다 북부지역에서 발견한다. 캐나다 북쪽 배핀 섬(Baffin Island)과 뉴펀들랜드(Newfoundland) 지역에서도 유적지 두 곳을 발견했는데, 배핀 섬 유적지에서는 바이킹들이 사용한 무기와 생활용품을 만들기 위해 조성한 인공물과 바이킹들이 축성한 건축물 등의 잔해를 발견한다. 이러한 탐사 결과들은 바이킹의 해외 원정이 어디까지 인지를, 그리고 그들은 해외에서 어떻게 정착하고 지냈는지 등을 알게 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바이킹 시대에 사용하던 노르웨이 동전이 현재 미국 메인(Maine) 주에 있는 인디언 정착촌에서 발견이 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바이킹들이 그 지역에 정착하려고 시도한 결과로 그곳에 도착했을 수도 있고, 인디안과 바이킹 간에 교역의 산물로 동전을 주고받았을 것으로 추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흔적들을 가지고 바이킹 정착에 대한 결정적 단서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다만 이곳까지 바이킹이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바이킹 유적지의 흔적이 단순히 그들의 지배영역에 대한 자료뿐 아니라 그들의 행적에 대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기도 한다. 바이킹 선단에 참여한 북유럽인들은 유능한 상인으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이는데 고향에서는 전문적으로 농사를 짓는 농부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해외 원정에 나설 때는 자신들이 살던 북유럽 남쪽 지방에서 가져온 금이나 은, 또는 향신료 등을 가지고 다른 지방에서 가져온 짐승의 털가죽이나 생선, 철재, 목재 등의 해산물이나 임산물 등과 물품을 교환함으로써 결과적으로 문화교류를 촉진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한편, 덴마크(데인인) 바이킹은 서유럽 가톨릭 국가를 침략하는데, 843년에 유럽 본토로 진격을 한다. 또한 878년에는 약 3만 명의 덴마크계 바이킹이 200명의 기사가 지키는 파리를 공격한다. 프랑크 왕국을 약탈한 바이킹은 마침내 센강 하류 지역에 나라를 세우는데, 롤로(Rollo)를 수장으로 하는 ‘노르망디 공국’이 그것이다.     

롤로는 프랑크 왕과 조약을 체결하고 노르망디 지역에 봉토를 받는데, 그 대가로 롤로는 더 이상 파리를 침공하지 않고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프랑크 샤를 왕의 봉신이 된다. 이들은 그 후 지중해까지 원정을 가기도 했는데, 1066년에는 잉글랜드에 이어 시칠리 섬을 비롯한 이탈리아 남부를 정복하고, 지중해 연안에 있는 안티오크에 대한 지배권도 확보한다. 


덴마크의 스벤 1세(Svend I Tveskaeg, 960~1014) 때인 1013년 덴마크 바이킹이 잉글랜드를 잠시 정복한다. 그러나 그의 아들 카누트 왕(Canute the Great, 994~1035)이 즉위하는 11세기 초에는 영국을 대대적으로 침공해 영국을 완전히 장악하고 북대서양의 섬들과 아일랜드 등을 지배함으로써 북해제국을 건설하기도 한다. 이때 그는 덴마크와 잉글랜드, 그리고 노르웨이의 왕위를 겸하는 대 왕국을 이루고 통치를 한다.    


이처럼 노르웨이와 덴마크 바이킹들이 서유럽에서 침략전쟁을 벌이고 있을 때 스웨덴 바이킹은 동쪽으로 진출해 핀란드와 지금의 러시아 지역까지 점령하고 식민지를 개척한다. 러시아 지역으로 침투해 들어간 스웨덴 바이킹은 ‘루스’(Rus)라는 부락 출신 왕자이자 바이킹 수장인 루리크(Rurik)가 중심이 되었다. 그는 서기 862년 당시 동슬라브 지역에 있는 노브고로드에 도착해 정착을 한다. 그 후 계속해서 지금의 우크라이나 키예프(Kiev)로 세력을 확장하고 이곳에서 루리크 왕조(Rurik Dynasty)를 세우고 그 시조가 된다.      


Kyi Rurik(그림: H. W. Koekkoek)

전설에 따르면, 동슬라브는 5 세기 경에 설립된다. 그 후 외세 침략이 극심해 지자 맏형 키(Kyi)와 세크(Shchek), 코리브(Khoryv), 그리고 여동생 리비드(Lybid) 4 자매가 동슬라브를 통치하기 위해 온다. 이들은 당시 러시아 북부에 있는 노브고로드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하는데 얼마 후 키예프에 도착해 키예프 루스(Kievan Rus) 제국을 건설한다. 키예프는 맏형의 이름을 따 지은 것이며 루스는 그들의 출신지역 이름을 땄다고 한다.   

   

루리크 왕조는 러시아 제국 시대에 짜르(Tsar) 시대를 열고 본격적인 제국시대를 맞이한다. 그 후 루릭 왕조는 13세기 중반 몽고족의 침입으로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그 후손인 러시아 바실리 4세가 사망(1612년)하고 로마노프 왕조가 성립할 때까지 750년간 러시아를 통치한다. 한편, 루스 지역에서 건너간 바이킹 덕분에 ‘러시아’라는 지명도 생겨나게 된다. 즉 지명의 끝에 붙는 ‘-ia’라는 어미는 땅의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Russia’라는 말은 ‘Rus’ 족의 땅이라는 의미이다.   

   

1982년 키예프시 설립 1500년 기념으로 바이킹 롱쉽을 타고 있는 키예프 창시자인 루리크 형제들 동상을 세운다. 그리고 1992년에는 이 동상을 넣은 화폐를 발행한다.
2000년 키예프시 독립광장에 세운 우크라이나 창시자 루리크 형제들 동상

    

키예프 중심에 자리한 세카비타샤(Shchekavytsia)와 코르비타샤(Khorvytsia) 산맥 지명도 세크(Shchek)와 코르비(Khoryv)의 이름을 딴 것이며. 여동생 리비드(Lybid)는 키예프를 가로지르는 드니프로(Dnieper) 강의 오른쪽 지류 이름이기도 하다. 한편, 리비드(Lybid)는 슬라브 신화에 나오는 여신 조르야(Zorya: Danica)처럼 ‘백조’나 ‘흰새’와 동일시 된다. 신화에서 백조는 남성성을 의미하고 다산을 의미한다. 그래서 2000년에 이들을 기념하는 또 다른 모습의 동상을 키예프 시내 중심 우크라이나 ‘독립광장’에 설치하는데, 이 동상에는 여동생 리비드가 두 마리 백조와 함께 있고 키는 투구와 방패, 칼을 들고 서있지만 그의 어깨에는 사냥꾼처럼 맹수를 사냥해 걸쳐놓았다. 또한 두 동생 셔크와 코르비 앞에는 각각 바이킹 무기 대신 밭을 가는 쟁기를 들고 있고 활은 들었지만 헤임달이 불어대는 나팔을 들고 있어 바이킹이 아니라 북유럽 신화 속 주인공들처럼 다산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신화적 인물들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스웨덴 바이킹이 우크라이나의 전설적 인물에서 신화적 인물들로 승화된 모습을 볼 수 있다.     


한편, 서기 907년 스웨덴 바이킹은 그들이 ‘미클리가르드르’(위대한 도시)라고 부르는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얼마 지나지 않아 스웨덴 바이킹은 비잔틴 제국의 가장 강력한 군대, 즉 ‘바랑기안 부대’(Varangian Guard)를 결성한다. 이 엘리트 전사 계급은 비잔틴 황제를 보호하는 책무를 지닌 용병으로 활약해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런데 훗날 이 용병을 지휘하던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 전사가 노르웨이 왕으로 귀환을 한다. 그가 바로 잉글랜드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 참가해 눈에 화살을 맞고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는 노르웨이의 마지막 바이킹 전사 하랄 하르드라다이다.  

   

여하튼 스웨덴 바이킹은 실크로드를 따라 개설된 노예시장에서 노예 거래를 하기도 했다. 동양의 끝머리에서 시작한 실크로드가 서양의 시작 지점이라고 할 수 있는 곳에서 마치 연속된 네트워크처럼 동서양의 문화와 문물을 교류하고 전파하는 문화교류 네트워크를 연결한 공은 당시로서는 상상 이상의 결과를 얻게 되기에 그들이 이룩한 업적은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바이킹들의 활약상은 단순한 침략전쟁이 아니라 물품 거래를 통한 문화교류를 이룩한 상상 이상의 대단한 거래를 한 것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마디로 바이킹들은 그들이 만들어놓은 네트워크를 통해 동서양 문화를 상호 전파하는 견인차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연도별 바이킹 해외원정 지도


          

2. 바이킹 문화의 영향  

   

바이킹 해외 원정에서 가장 많은 영향을 미친 경우는 바이킹이 영국 제도를 정복했을 때이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그리고 아일랜드로 이주한 북유럽 바이킹들은 이들 지역의 문화를 바꾸어 놓을 정도였다. 그래서 바이킹이 정착을 하면서 이들이 심어놓은 문화적 특성들이 현지의 문화적 성격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9세기 말 당시 노르웨이는 웨섹스(Wessex) 외에 영국의 거의 모든 지역을 통치했으며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 대부분 지역도 관리했다. 

     

이처럼 10세기 이후 계속되는 바이킹들의 영국 정복 결과는 비록 11세기 초 잠시 앵글로 색슨 족이 정복자 북유럽인들을 제치고 또다시 영국을 장악하지만 여전히 그 후에도 많은 북유럽 정착민들이 남아 있게 된다. 더구나 11세기 말이 되면 또다시 북유럽 출신인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암 2세 공작이 영국 왕 윌리엄 1세로 등극을 하고 영국 왕족의 시조가 되는 일이 벌어진다.    

 

이런 상황들은 결국 이 지역에서 영국인들이 사용하는 지명이나 법률용어, 그리고 일상적인 관습과 관련된 언어들까지 적지 않게 영국 사회에 스며들어 남아있게 된다. 예를 들어 현대 영어에서 사용하는 일상적인 용어들, “cast”, “knife”, “take”, “window”, “egg”, “ill”, 그리고 “die” 같은 단어들을 포함해 예전 노르웨이 사람들이 사용하던 단어 600개 이상을 차용해 사용한다.     


이처럼 바이킹들은 영국 내에서 적지 않은 문화적 영향력을 전파했는데 이것은 스코틀랜드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스코틀랜드는 특히 노르웨이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침공하기 위한 전략적 전초기지처럼 여겼다. 그 때문에 스코틀랜드에 대한 관심은 그 어느 지역보다 높았다. 바이킹은 이미 9세기에 이 지역을 발견하고 그들의 정착지처럼 지역을 다스리고 그들의 가족들을 데려와 이주를 했다. 따라서 스코틀랜드와 인근 섬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바이킹의 영향은 다른 어느 지역보다 매우 높다.    

  

특히 스코틀랜드 북동쪽에  위치한 오크니 제도(Orkney Islands)와 셔틀랜드 제도(Shetland Islands)의 주민들은 19세기까지 구 노르웨이의 방언인 노른(Norn)을 사용했고 오늘날까지 노르웨이 문화를 즐기고 심지어 노르웨이 국경일에 노르웨이 국기를 내걸고 노르웨이 국가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벌이는 퍼레이드까지 한다. 참으로 식민지라 하기에는 거시기하지만 이보다 문화적 연대감이 강한 지역은 찾아보기 쉽지 않을 듯하다. 

    

한편, 9세기에 이르게 되면 아일랜드에 정착한 바이킹들은 점차 아일랜드 사회로 통합되어 간다. 심지어 바이킹들은 아일랜드 지도자들을 대신해 전쟁을 치루기도 하면서 아일랜드인과 결혼을 하고 기독교도로 개종을 한다. 당시 아일랜드 사람들은 바깥세상과 연계된 특별한 무역을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진취적이고 외부세계를 잘 아는 바이킹들의 도움으로 국제 시장과 연계된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조만간 아일랜드 게일족이 덴마크계 바이킹과 손을 잡고 노르웨이계 바이킹을 축출하면서 아일랜드에 있던 무역거래를 주로 하던 바이킹 정착촌이 해체 위기를 맞는다. 무역을 주로 담당하던 바이킹은 결국 아일랜드에서 다른 곳으로 가야만 했다. 따라서 무역거래를 하던 바이킹 거주지역은 당시에 엄청난 변화를 겪으며 사회 변동을 겪는다. 그중 한 곳이 더블린인데 이 도시는 현재 아일랜드 수도이다.   

  

이처럼 북유럽 바이킹들이 해외 원정을 한 결과 인접 지역은 물론 멀리 떨어진 지역까지 진출을 하자 북유럽인들 유전자가 널리 퍼지는 효과도 나타난다. 바이킹 유사 유전자 형태 분포도를 보면 북유럽인들과 같은 혈통이 어디에 얼마나 퍼져 있는지 쉽게 알 수가 있다. 예를 들어, 셔틀랜드 제도 사람들은 스칸디나비아 DNA가 44%, 오크니 제도 주민들은 30%, 스코들랜드 서부 섬 지역에는 15% 정도가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바이킹 유사 유전자 형태 분포도

     

북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된 바이킹의 해외원정은 북유럽은 물론 중부 유럽과 심지어 지중해 연안과 러시아 지역, 그리고 그린란드와 아메리카 대륙까지 진출하는 성과를 올린다. 이런 상황을 볼 때 북유럽 출신 바이킹과 유사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의 분포도는 적지 않은 지역에 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구결과에 따르면, 북유럽은 물론 인근 나라들 거주민들 유전자가 북유럽인들과 유사한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북유럽 북쪽은 추운 지방이라 그런지 거의 바이킹들과 혈연관계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북유럽 최북단 지역은 대부분 예전이나 현재나 원주민으로 알려진 사미(Sápmi)인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이곳과 마찬가지로 지중해 연안 쪽으로 내려가면 역시 비유전적 혈통을 보여주는 분포도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바이킹들의 해외 원정이 어디까지 이루어졌고 어떤 영향을 끼친 것인지를 알 수 있다.    

 

바이킹들은 흔히 보물을 약탈하고 여성들을 납치하기 위해 다른 국가들을 습격한 야만인으로 간주되기도 하지만, 흔히 바이킹(Vikings)이라 부르는 사람들의 행위 동기와 그들의 문화는 실제 알려진 것보다 훨씬 다양한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바이킹의 침략과 정착이 야기한 여파는 경제 분야뿐 아니라 정치나 사회, 문화 분야에 까지 적지 않은 변화와 영향을 끼쳤다. 심지어는 바이킹들로 인해 유럽 사회가 문화 변동을 야기하는 견인차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를 하기도 한다.     

 

앞으로 더 많은 자료와 논의를 통해 살펴보겠지만, 이처럼 바이킹이 야기한 사회변동의 궁극적 결과는 바로 바이킹 네트워크의 결성이라는 결과를 이루게 하는 초석이 되었고 이 네트워크는 현대적 의미의 사이버 네트워크 기능과 유사한 의미를 지니고 대단한 성과를 나타내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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