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이킹이 뭐길래?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스웨덴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패한다. 스웨덴은 그 대가로 650년간 지배해오던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넘겨주고 엄청난 허탈감에 빠진다. 그래서 스웨덴은 지난 시대 선조들이 이루었던 업적들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지난 영광을 오늘에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에서 시작한 스웨덴의 자구책 마련은 바이킹 신화에서 그 해답을 찾는다.
지난 바이킹 시대에 북유럽 국가들, 즉 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은 하나의 국가처럼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그래서 또다시 북유럽이 유럽을 제패하던 바이킹 시대를 또다시 구현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기를 꿈꾼다.
그래서 1856년 스웨덴 주도하에 바이킹 흔적이 남아있는 스웨덴 감라웁살라에서 바이킹 종주국이었던 스칸디나비아 3개국 학자들이 모여 학술회의를 개최하고 바이킹 시대의 의미에서부터 바이킹이 끼친 영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를 다루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된 스웨덴의 노력은 결국 자기 역사를 올바로 아는 일부터 시작을 했고, 그 역사 속 가장 위대한 선조들의 업적과 흔적을 재현하려 노력한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선조들의 중심에 바이킹이 있음을 재확인한다.
노르웨이와 덴마크도 다르지 않았다. 1905년 노르웨이가 스웨덴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자 제일 먼저 시작한 행보는 박물관을 세우고 지난 시기, 특히 위대한 바이킹 시대를 재현하고 올바로 알리는 일이었다. 그 이유는 말할 것도 없이 위대한 선조의 후예라는 자부심을 살리고 예전의 위대한 선조들처럼 영광을 재현하기를 소망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로 개종하기 이전 전통신앙으로 존재하던 파간(Pagan)을 보존하고 바이킹의 후예임을 스스로 드러내려 한다. 그것이 지난날의 영광을 구현하는 첩경이라는 듯이 말이다.
덴마크는 바이킹 시대 그들이 믿었던 종교, 즉 북유럽 신화를 바탕으로 한 전통신앙인 파간까지도 용인하고 심지어 파간 사원을 복원하는 노력까지 묵인하면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다양한 문화를 갖추려 한다. 당연히 그 속에 바이킹의 모든 것, 즉 그토록 예전 바이킹 선조들이 따랐던 전통신앙을 포함한 모든 것들이 담겨 있었다. 더 이상 개신교 국가라는 위상만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며 새로운 미래를 발전시켜 나가려는 노력을 벌였다. 그 중심에 역시 바이킹 문화의 복원과 재현이라는 사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 북유럽 국가들의 바이킹 종주국으로서의 경쟁은 단순히 국가 간 경쟁이라기보다 북유럽 국가들 공동으로 스스로의 위상을 제고하고 자국의 미래를 구체화하기 위한 마일스톤을 찾으려는 노력과 연계되어 있다. 이러한 노력들은 이미 공개적으로, 하지만 은밀하고 치열하게 진행 중이다.
2. 뿔과 날개 달린 투구를 쓴 바이킹
험상궂은 얼굴에 긴 수염을 휘날리며 뿔 달리고 날개 달린 투구를 눌러쓴 사람들, 바로 바이킹이 연상된다. 이들은 외모만큼이나 무서운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해적질을 일삼으며 바다를 누빈다. 게다가 육지에 오르면 무차별 살상은 예사로 한다. 이처럼 온갖 부정적인 이미지를 지닌 바이킹에 대한 소개를 듣다 보면 문득 정말 그렇게 험악하고 무서운 바이킹이 존재했을까라는 의문이 스친다.
사실 바이킹이 쓴 뿔 달린 투구에 대한 과장과 오해의 출발은 엉뚱하게도 리처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겐의 반지('Der Ring des Nibelungen')라는 예술적 행위가 상당 부분 영향을 미쳤다는 게 정설이다. ‘니벨룽겐의 반지’ 의상을 담당한 디자이너 칼 에밀 뒤플러(Carl Emil Doepler)는 임의로 오페라에 출연하는 캐릭터들이 사용할 투구를 만들면서 멋진 뿔과 날개를 투구에 장착해 사용한다.
그뿐 아니라 스웨덴 예술가 아우구스트 말름스트룀(August Malmström)이 종종 바이킹을 묘사하면서 그가 그린 그림 속에 특이한 모자나 날개 달린 투구를 쓰고 있는 사람들을 그렸는데 이것이 퍼져나가면서 진짜와 다른 투구에 대한 오해가 확산된다. 모두가 바이킹을 더 힘세고 괴력을 지닌 존재로 부각하기 위해 과장된 모습으로 치장한 데서 비롯된 것들이다.
이런 바이킹에 대한 잘못된 묘사들은 결국 잘못인 줄 알면서도 멋있다거나 그럴싸한 가정을 전제로 더욱 강인한 모습으로 바이킹을 표현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발상이기에 쉽게 사그라들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는 분위기이다. 바이킹들은 날개가 달리거나, 또는 뿔이 달린 투구를 착용하지 않았는데도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로부터 기인한 단순한 묘사가 최근까지 그럴싸한 역사적 사실처럼 퍼지고 있다는 사실은 바이킹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다행히 천 년 전 바이킹들이 실제 사용한 투구가 1943년 노르웨이 동부의 링거리케(Ringerike)와 스웨덴 스톡홀름 인근 바이킹 정착촌이었던 비르카(Birka)에서 발견되었다. 뿐만 아니라 천 년 전 바이킹들이 사용한 최고의 예술품이라는 찬사를 받는 바이킹 전함 ‘롱쉽’ 등도 발굴되어 바이킹에 대한 궁금증을 조금씩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바이킹에 대한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에는 올바른 바이킹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실정이다.
3. 바이킹은 무법자인가?
먼저, '바이킹'이라는 용어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직업’을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바이킹‘이라고 말할 때는 이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바다와 강, 호수 등 다양한 영역으로 항해를 하면서 어떤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집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이 공동으로 특정 지역에 정착해 농작물을 가꾸거나 다른 문화나 문명을 교류하기도 했기 때문에 바이킹이 마치 하나의 종족처럼 인식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바이킹족‘이라는 표현은 그렇기 때문에 전적으로 잘못된 표현이기에 삼가야 한다. 바이킹은 단지 공동의 목적을 지닌 집단일 뿐이다. 따라서 마치 하나의 혈통을 지닌 종족으로 구성된 집단으로서 ‘바이킹족’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말이다.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바이킹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 또는 여러 지역 출신의 남자뿐 아니라 여자, 그리고 각종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두 참여 가능한 열린 집단이었기에 마치 직업군인 같은 집단, 또는 용병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당시 북유럽 인구의 대다수는 주로 농부, 어부, 대장장이, 선박 항해사 등이었는데 이 중에서 실제 바이킹으로 나서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일부에 불과했을 뿐이다. 따라서 모든 중세 초기의 북유럽 사람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정확한 용어는 '바이킹‘(Vikings)이 아니라 ’북유럽 사람들'(Norsemen)이라는 단어이다.
한편, 바이킹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1세기경에 발견된 로마의 기록물에서 볼 수 있다. 역사가 타시투스(Tacitus)는 그의 책 게르마니카(Germania)에서 바이킹을 일컬어 “북부 유럽의 게르만 부족들 중 상당히 환상적인 엘리트 전사들”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6세기에는 로마의 역사가 프로코피오스(Prokopios)가 "야생의 무법자 헤룰리“(heruli and herless heruli)를 썼다. 그는 자신의 책에서 바이킹의 전투 모습을 마치 벌거벗은 채로 싸움을 하는 듯이 묘사를 했다. 그들은 투구나 갑옷 같은 것을 착용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단지 방패만을 사용했다고 썼다. 이처럼 바이킹을 강인하고 용맹스러운 모습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바이킹(Vikings)이라는 단어가 지니고 있는 의미도 여러 가지가 있다. 먼저, 항구(Vik)라는 의미, 협곡(fjord)이라는 의미 등 여러 의미가 포함될 수 있다. 또한 전투를 한다는 뜻으로 빅(Vig)이라고 하거나, 떠돌아다닌다는 뜻으로 비크야(Vikja)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북유럽에서 사용하는 단어들은 바이킹이란 말의 의미를 해적행위 또는 기습공격을 의미하는 비킹그르(Vikingr)라고 사용하기도 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비킹그르(Vikingr)는 어떤 직업을 나타내는 말이거나, 기습을 감행하는 특별난 행위, 또는 해적질을 하는 행위 일 수는 있어도 결코 일반적인 삶의 방식을 의미하는 뜻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학자들은 바이킹(Vikings)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으로 "해적"이라는 뜻을 지닌 북유럽 용어 ‘vikingr’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바이킹이라는 용어는 해외 원정을 전제로 하는 말이며, 북유럽 사람들이 이 단어를 주로 전통적으로 시간을 보내는 과정으로서 명사가 아닌 동사로 사용했다는 사실이다.
실제 많은 북유럽 사람들이 바이킹이라 부르는 원정대에 들어가 해안을 따라 산재해 있는 수도원과 도시들을 습격하고 재물을 약탈했다. 이처럼 원정대원이라고 부를 수 있는 바이킹이 자신들이 목표로 하는 재물을 얻기 위해 마치 외국인 용병처럼 바이킹으로 자원입대해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물론 처음에는 대부분(북유럽 사람들만 바이킹이 아니란 의미이다.) 바이킹들이 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 출신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살았던 지역에서 농부나 상인, 그리고 대장장이나 기타 특별난 기술을 가진 장인으로서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선단을 꾸려 해외 원정에 참여했다. 이들은 북유럽이라는 척박한 삶의 터전에서 벗어나 보다 양질의 토지와 삶의 조건을 찾아 나선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바다를 건너가 마을과 교회, 그리고 수도원을 습격했다. 그들이 습격한 대부분의 마을과 수도원 등은 대개 해안가에 위치해 있어 공격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운 편이었다. 따라서 배를 타고 이동을 하면서 공격을 하고 신속하게 또 다른 곳으로 이동을 했다. 다른 곳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과 약탈을 했다. 그들은 상대방이 역습을 해오기 전에 재빠른 후퇴와 기습을 반복하면서 약탈을 하고 도주를 했다. 그야말로 ‘히트앤드런’ 작전을 구사하듯 신속하고 기동력 있는 전투력을 과시한 것이다. 이런 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바이킹 전함 ‘롱쉽’(longship)이 있어 가능했다.
해외 원정에 나선 이들은 무리를 지어 조직적으로 선단을 꾸리고 체계적인 지휘 아래 마치 잘 훈련된 정예부대처럼 전투를 했다. 이들은 그리하여 바이킹이라는 이름을 알리게 된다. 바이킹에 참가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래 농사를 짓거나 고기를 잡는 어부들이었기 때문에 해외 원정을 나간다 하더라도 때가 되면 고향마을로 돌아와 농사를 짓던가 추수를 하거나 하는 등의 일을 했다.
그렇게 자신의 고향에서 하던 일과 바이킹으로서의 일을 병행하며 그들은 해외 원정에 나섰다. 그러나 해외 원정을 통해 약탈과 습격으로 많은 재물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자 점차 그들은 더욱 공격성을 보이며 자신의 원래 직업이던 농부나 어부로서의 일보다 해적으로서의 바이킹 생활에 몰두하게 된다. 그들은 이제 본격적으로 장거리 해외 원정길에 오른다. 바이킹 전함 롱쉽을 타고 칼과 도끼를 휘두르며 그들은 어디까지 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