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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20. 2018

바이킹 최고의 작품 롱쉽

1. 바이킹 시대와 롱쉽     


바이킹 시대에 위용을 자랑하던 배가 있었다. ‘롱쉽’(longship)이라고 부르는 이 배는 일명 ‘긴 독사’(Long Serpent)라고도 불렀다. 이 배는 또한 ‘드래건쉽‘(Dragonships)이라고도 불렀는데 바이킹 시대 내내 멋진 자태를 뽐내며 바다를 주름잡았다. 이 배는 용의 머리를 깎아 만든 장식을 선수에 달았는데 이 장식은 바이킹들에게 주술적 효과를 주는 듯했다. 배의 선수에 용머리 장식을 하면 그 용의 무서운 위력이 배를 보호할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바이킹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용의 머리를 장식으로 사용한 행위는 현대 시각으로 본다면 미신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미신이란 존재하지 않는 신에게 경배한다는 의미라고 보면 절대 이런 행위는 미신의 범주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 이유는 절대적인 어떤 존재에 대한 신념과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용이란 미신적 존재에 대한 믿음이 강렬하다면 이미 그것은 신적인 존재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용의 머리는 단순히 바다에서 항해를 하는 동안 바다괴물의 영혼을 두렵게 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육지에 도착하기 전 육지의 신에 대한 경외감을 거스르지 않도록 도착 직전 배 선수에 매달았던 용의 머리를 떼어내고 빈 선수로 입항을 하기도 했다. 노르웨이 바이킹의 대표적인 바이킹 전함 곡스타드 호의 선수를 보면 바다에서는 언제나 용머리를 달았으나 항구에 도착할 때는 대개 비어있음을 볼 수 있다.   

  

사실 용은 중세시대에 이르기 전까지 그다지 나쁜 동물로 취급되지 않았는데 중세시대에 이르게 되면 점차 사악하고 괴력을 발휘하는 나쁜 동물처럼 취급을 당한다. 그 이유는 기독교 전파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의 절대자보다 힘센 동물이나 괴력을 가진 그 어떤 짐승도 존재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점차 용은 사탄이라는 이름으로 내몰리게 되고 그 피해의 직접적 대상이 된다.(* 그 예로, 가톨릭 성인 조지와 용(St. George and the Dragon) 전설이나, 중세의 대표적 판타지 소설 베어울프 참조.)     

용을 무찌르는 성 조지 (St. George) 기사

바이킹 시대는 아직 기독교로 개종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기이기에 용을 장식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따라서 용머리 장식을 배의 선수에 달고 바이킹 전함들이 위세를 떨치려 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여하튼, 바이킹 함선은 주로 왕과 바이킹 수장들을 위해 제작되었는데, 긴 독사라 부르는 이 바이킹 전함은 노르웨이 북부에서 처음 개발된 듯하다.      


이 배의 가장 큰 특징은 지금까지 제작한 다른 바이킹 선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길다는 점이다. 그리고 배의 돛대와 함미를 도금으로 장식해 아주 고급스럽고 귀티 나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긴 배의 양옆을 넓게 만들어 많은 인원을 태울 수 있도록 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용의 모습을 닮은 긴 바이킹 함선이 실제로 존재했다고 한다.     


머리와 아치형 꼬리는 모두 금테를 둘러 장식을 한 이 배가 당시 노르웨이에서 제작된 최고의 값비싼 바이킹 함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더구나 이 배의 길이가 48m, 68.5개의 섹션과 노 젓는 공간으로 34개의 섹션을 갖추고 있었고, 모든 반 섹션에는 여덟 명이 앉아 노를 젓고 그 외 30명의 선원이 탑승함으로써 이 배에는 모두 574 명의 선원이 승선해 항해를 했다고 한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규모의 바이킹 함선이었는데 노르웨이 왕 올라프 1세 트리그바손(Olav Tryggvason: 960-1000)이 자랑거리로 여겼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의 특별 명령으로 제작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멋진 자태와 위용을 지닌 바이킹 전함이 노르웨이 왕 올라프 1세를 태우고 영국을 침공해 들어간다. 그러나 조만간 올라프 1세 왕은 적들의 엄청난 공세를 견디지 못하고 전투에 패해 침몰하고 만다. 잉글랜드 노섬브리아(Northumbria) 백작인 에릭(Eric Håkonsson)과 스웨덴의 올라프(Olav) 왕, 그리고 덴마크의 스베인(Svein) 왕의 연합군이 모두 71척의 전함을 가지고 스볼더(Svolder) 협곡에서 매복을 하고 올라프 1세 왕을 기다린 것이다. 


올라프 1세 트리그바손 노르웨이 왕은 단지 11척의 전함만을 가지고 혼자 이들과 전투를 벌여야 했기에 결국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올라프 1세 왕이 자랑하는 ‘긴 독사’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와 함께 수장되고 만다. 스웨덴, 덴마크 연합군 병사들이 노르웨이 올라프 1세 왕이 바다에 빠져 서서히 사라지려는 순간 그를 생포하려 했지만 그는 방패로 머리를 덮으며 스스로 물속으로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 그때의 올라프 1세 트리그바손 노르웨이 왕의 무용담은 어느새 전설이 되었고 그의 용맹스러움은 트론헤임(Trondheim) 시내 한복판에 높이 솟은 기념탑으로 남아있다.   

       

올라프 1세가 타던 바이킹 전함(좌),  스웨덴, 덴마크, 노섬브리아 연합군과 올라프 1세가 벌인 스볼더(Svolder) 전투 장면(우)
트론헤임 시내 중심에 우뚝솟은 올라프 1세 동상 



2. 바이킹 롱쉽     


바이킹 전함은 바이킹 시대에 바다를 지배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이자 도구였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킹 선박은 그 어떤 배보다 우수한 성능을 가지고 있었고 실제로 대단한 위력을 떨쳤다. 다른 어떤 배들도 바이킹 선박과 견줄 수 없을 정도로 바이킹 배들은 위용을 자랑했다. 그래서 해외 원정을 나서야 할 때 바이킹 전함만 있으면 아무 두려움 없이 원정에 나설 수 있었다. 그만큼 바이킹 전함은 험한 바다를 극복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최상의 무기이자 수단이었다.

          

바이킹의 뛰어난 선박과 항법 기술은 육지에서 펼쳐진 전투뿐 아니라 다른 나라의 내륙까지 강을 따라 항해하는 수단과 기술을 제공했다. 바이킹의 선박 제조술과 항해술은 그야말로 바이킹을 가장 바이킹답게 만든 원동력이었다. 항해 및 선박 제작과 관련한 그들의 기술은 지금까지 기존의 항해술과 비교해 볼 때 훨씬 더 멀리, 그리고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바이킹의 가장 멋진 기술은 바로 바이킹 선단의 항해술과 롱쉽이라 부르는 바이킹 선박에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 롱쉽은 그들이 어디든 가장 빠른 시간에 손쉽게 항해하며 이동할 수 있도록 했기에 전투와 수송 시간 모두를 절약할 수 있었다.     


바이킹 전술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탐색 기술을 완벽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숙련된 선원이자 배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보트 전체 길이에 걸쳐 노를 배치한 구조는 우선적으로 얕은 바다에서도 쉽게 항해할 수 있도록 했고, 어떤 기상 조건에서도 시속 30Km의 속도를 낼 수 있도록 가볍게 만들었다. 배의 선수와 후미는 거의 모양이 같은 형태이기 때문에 방향을 바꿀 필요 없이 언제든 원하는 방향으로 쉽게 나아갈 수 있다. 이런 특징은 특히 빙산과 해빙이 숨어있는 바다에서 커다란 이점이 있다. 그렇기에 이들이 바이킹 선박을 타고 그린란드를 거쳐 북아메리카까지 항해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바이킹 선박은 아무리 거친 파도가 치거나 얕은 물에서라도 항해하는데 별다른 어려움 없이 항해할 수 있다. 따라서 바이킹 선박은 운송 수단으로서 뿐 아니라 바이킹 해외 원정을 하는 도구로서도 결정적인 수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고위층 인사나 바이킹 활동을 하면서 많은 공을 세운 사람들을 바이킹 선박에 태워 장례를 치러주는 풍습도 어쩌면 이런 바이킹 선박의 장점들로 인해 생겨나게 된 듯하다.      


바이킹 선박은 당시 국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사적인 이해에 따라 직접 제작을 하거나 바이킹 집단에서 제작을 해 사용한 것이기 때문에 그 크기나 모양 등이 다양하다. 바이킹 선박들이 지니고 있는 대부분의 특징들은 우선적으로 가볍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더해 아름다운 곡선을 가미하고 용머리나 기타 다른 짐승의 머리 모양을 장식으로 선수에 매달아 주술적 힘을 이용한 것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디자인적으로나 기능적으로나 시각적으로 전혀 오늘날의 어떤 선박과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이다. 따라서 바이킹 선박을 제조하는 기술과 제작과정은 하나의 예술작품을 만드는 일련의 과정을 그대로 갖추고 있다. 더구나 바이킹 선박은 군대 활동을 위해서가 아니라 북유럽 주민들이 장거리 교역과 탐사를 위한 사적인 도구이자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점 역시 중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오슬로 남쪽 150Km 지점에 위치한 톤스베르그 바이킹 마을, 이곳에서 멀지 않은 오세베르그 갯벌에서 바이킹 롱쉽 오세베르그 호를 발견했다
톤스베르그 조선소에서 모조 곡스타드와 오세베르그 호를 제작해 관광객을 위해 사용한다.


바이킹 시대에 존재하던 배의 종류는 여러 형태가 있다. 흔히 바이킹 전함이라고 부르는 롱쉽(longship)은 주로 전투를 하는 데 사용했고, 크나르(Knarrs, 또는 옛말로 크노르(knorrs)라고 부르는 배는 다소 느렸지만 승객과 화물을 실어 나르는 용도로 사용했다. 바이킹 선박으로 부르는 배의 규모는, 평균 길이가 100피트(30.48m)이고 평균 너비는 25피트(7.62 미터), 50개의 노를 설치한다. 이 배에는 거의 무장한 선원 200명을 태우고 11노트(또는 시간당 20.372 킬로미터) 속도로 항해를 한다.      


○ 바이킹 시대 선박 종류

카르프(Karve, 승객 탑승용 배)

스넥크(Snekke, 승객 탑승용 배)

비르딩(Byrding, 화물수송용 배)

크나르(Knarr, 화물수송용 배)

드라케(Drake, 전투용 배)

스케이드(Skeid, 전투용 배)

부쎄(Busse, 전투용 배)

수드(Sud, 전투용 배)     


바이킹 함선, 소위 ‘롱쉽’(longship)이라 부르는 배는 당시 유럽 중세 암흑기를 밝혀주는 가장 큰 기술과 예술적 업적으로 평가를 받는다. 이 배가 없었다면 바이킹 시대는 결코 진행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평가도 적지 않다. 그만큼 바이킹 선박에 대한 기대와 가치가 크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바이킹들은 강이나 바다와 맞닿은 곳에서 배를 만들었다. 선박을 제조하는 데는 주로 참나무가 사용되었고, 배의 선체는 판자를 겹쳐서 철판으로 고정시켰다. 이것은 배를 아주 강하게 했다. 또한 양모로 만든 끈을 타르에 담갔다가 누출을 방지하기 위해 널빤지 사이로 밀어 넣고 고정을 시켰다. 그렇게 하면 물의 유입을 방지하고 방수효과를 유지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세심하고 과학적으로 제작된 롱쉽은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최상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바이킹 선박 중에서 가장 유명한 배는 곡스타드(Gokstad)와 오세베르그(Oseberg) 호다. 이 바이킹 선박들은 20세기 초반 노르웨이 오슬로 남쪽 150킬로미터 떨어진 피오르 해안에서 발견되었다. 이 선박들은 서기 8~900년 사이에 바이킹 장례식에 사용되어 불에 탄 후 수장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데, 현재 이 배들은 노르웨이 오슬로 바이킹 선박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최근 보도에 따르면, 또다시 오슬로 남쪽 200km 떨어진 할덴(Halden) 근처 땅속에서 묻혀있는 바이킹 선박을 발견했다.(* The Guardian, 2018.10.15) 이 배는 길이가 20m가 넘는 것으로 보이는데, 지표면 바로 아래 0.5 미터 정도 위치에서 발견되었다고 한다. 배의 보존 상태도 양호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배가 묻혀있는 주변 농지에는 다른 3척의 배들도 함께 묻혀있다고 하는데, 별로 손상되지 않은 상태로 판명되었다.


한편 인근 농지에는 아직 발견되지 않은 또 다른 8척의 바이킹 장례용 선박들이 매장되어 있을 확률이 높은 것으로 보고 조사 중이다. 이것은 당시 오슬로 인근 피오르에 바이킹 정착촌이 몰려 있어 바이킹 선박을 이용한 장례식이 상대적으로 자주 있었을 것으로 보고 또 다른 바이킹 선박들이 묻혀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갖고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편, 연구팀은 루드비히 볼츠만 연구소 (Ludwig Boltzmann Institute for Archaeological Prospection and Virtual Archaeology)가 개발한 전동식 고해상도 지면 관통 레이더(ground-penetrating radar)를 가지고 발굴작업을 벌이고 있다.           


곡스타드 호 발굴 현장과 오술로 박물관에 전시중인 곡스타드 호
오세베르그 호 발굴 현장(좌)과 할덴에서 지면관통레이더로 찾아낸 바이킹 전함 촬영 모습(우)



3. 노르웨이 오슬로 바이킹 선박 박물관     


오슬로 바이킹 선박 박물관에 3척의 배가 전시되어 있다. 이 배들은 바이킹 시대가 한창인 9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건조된 것들이다. 또한 배와 함께 소장품 등이 발굴되어 함께 전시를 하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 중인 바이킹 선박들은 모두 오슬로 인근 피오르에서 발굴되었는데, 오세베르그(Oseberg)와 곡스타드(Gokstad), 그리고 튜네(Tune)와 보레(Borre)에서 발굴한 것들이다. 발굴지역은 모두 오슬로 남쪽 150K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오세베르그는 톤스베르그에서 배가 발견된 동네 이름이다.)

      

오세베르그 호는 서기 820년에, 곡스타드 호는 890년 경에, 그리고 튜네 호는 910년 경에 각각 제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보레(Borre) 호는 900년 경에 제조된 것으로 보이지만 배의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손되어 있고 배에 사용된 쇳조각들만 발견된 상태이다.     


오세베르그 호는 깊은 진흙 구덩이에 박혀있었던 덕분에 배의 원형이 상대적으로 덜 파손되었다. 오세베르그 호의 길이는 21.6m, 최대폭은 5.1m, 그리고 배의 깊이가 1.6m로 결코 작은 배가 아니다. 선박에는 15쌍의 노와 정사각형 돛을 사용했다. 이 배는 묘지로 매장되기 전까지 여러 해 동안 항해를 한 것으로 보인다. 배의 앞뒤 장식은 바이킹 선박 특유의 ‘긴 뱀’ 형상을 하고 있다.     


한편, 오세베르그 호를 발굴할 때 두 명의 여자 인골이 함께 출토되었다. 한 사람은 50세 정도의 여성이고 다른 한 사람은 7~80세 정도로 추정된다. 그러나 둘 중 누가 더 높은 지위에 있던 사람인지는 정확히 구분해 내지 못했다. 둘 중 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시종이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153cm 정도의 키를 가졌고 여왕처럼 귀족 장식품과 각종 가구류가 함께 발굴되었다.     


배안에서 발굴된 부장품들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다름 아닌 용머리 장식품이다. 오세베르그 호가 발견될 당시 용머리 장식품 5개가 함께 발굴되었는데, 이들 중 4개는 박물관에 현재 전시 중이고 나머지 하나는 파손 상태가 심해 박물관 창고에 보관 중이다. 또한 이들 중 1개는 은으로 된 조각들로 장식을 했는데 무척 화려한 자태를 보여준다.    

  

오슬로 바이킹 박물관에 전시중인 오세베르그, 튜네, 곡스타드 호
오세베르그 호에서 발굴된 용머리 장식품들(우측이 은장식 용머리)


곡스타드 호는 1880년에 발굴되었다. 서기 890년에 제조된 곡스타드호는 서기 900년에 정치적으로 영향력 있는 남자가 죽자 이 배에 그를 매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의 키는 제법 큰 편이었는데 181~183cm 정도이다. 그는 왕족이었거나 바이킹 수장이었을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곡스타드 호는 말 12마리와 개 6마리로 장식한 침대와 함께 발굴되었다. 그리고 이 배와 함께 소형보트 3척도 함께 발굴되었다.      


곡스타드호는 상대적으로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 발굴된 바이킹 선박 중 규모가 가장 크다. 곡스타드호의 길이는 24m, 배 중앙의 폭은 5m, 양쪽 각각 16명씩 총 32명이 노를 저을 수 있는 전형적인 바이킹 전함이다. 그리고 곡스타드호는 바이킹 묘실로 사용된 배이기 때문에 발굴 당시 바이킹 시대 유물들을 싣고 있었다.      

오슬로 바이킹 박물관에 전시중인 곡스타드 호

바이킹 선박이 지닌 가장 중요한 특징은 역시 '속도'와 관련된 부분이다, 유연하고 가벼운 선체는 배가 물 위로 떠올라 움직이도록 제작되었다. 즉 선수파 때문에 배 앞머리가 살짝 들리기 때문에 엄청난 속력을 낼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곡스타드 호의 복제선은 시속 30km 이상을 달릴 수 있다. 범선 치고는 굉장히 빠른 속도이다.


전문가들 견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바이킹 선박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선체의 판자가 매우 얇다는 점이다. 바로 이 점이 바이킹 선박의 속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라고 한다. 실제로 곡스타드 호의 판자 두께는 약 1인치 즉 2.5cm 정도였는데 24m 길이에 달하는 그 크기에 비하면 이는 굉장히 얇은 편에 속한다. 이와 함께 비교적 좁고 높은 뱃머리를 가진 선체의 외형도 시선을 모을 정도로 대단히 아름답다. 이 배를 처음 보는 순간 배 양쪽 대칭과 곡선미가 황금분할을 이루고 있어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황홀함을 느끼게 한다.


투네(Tune) 호는 1867년 오슬로 협곡 동쪽 해안 근처에 있는 프레더릭스타드(Frederickstad) 인근의 작은 섬 롤프쇠이(Rolvsøy)에서 발견되었다. 선수와 선미가 없는 투네(Tune)호는 서기 910년에 장례용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이 배의 길이는 18m, 배의 최대폭은 4m이다. 투네호는 배 밑바닥을 제외한 다른 부분이 부패된 채 발굴되어 선박의 모습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투네호는 원거리 항해용으로 이용된 듯한데 발굴 당시 배안에서 남자의 인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목관과 마차 같은 부장품도 함께 발굴되었다.          


덴마크 로스킬데 바이킹 박물관에 전시중인 6척의 바이킹 함선 잔해들
로스킬데 바이킹 박물관 인근에 있는 조선소, 이곳에서 제작한 모조 바이킹 전함을 타볼 수 있다.



4. 로스킬데 바이킹 선박 박물관     


1070년 덴마크 로스킬데 협곡에서 여섯 척의 함선들이 바다로 침범해 오는 적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항구를 결사 저지하다 끝내 침몰하고 만다. 이 여섯 척의 침몰한 배들은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1962년 발굴된다. 이 선박들은 원래 화물을 실어 나르던 화물선과 전투에 사용하는 전함들이었다. 그 용도와 배의 모양도 각기 다르다. 현재 로스킬데 바이킹 선박 박물관에 전시 중인 바이킹 선박들은 모두 6척인데 그중 형체를 분별할 정도의 선박은 3척 정도밖에 안되고 나머지는 간신히 배의 형체만 구분이 가능할 정도이다. 

     

로스킬데 박물관은 이들 배 여섯 척을 전시하기 위해 1969년 선박 전시용 박물관을 건립했다. 또한 박물관 밖에는 바이킹 시대에 위세를 떨치던 선박들을 직접 제조하는 과정을 볼 수 있도록 조선소 시설을 마련해 놓았다. 이곳에서 북유럽 국가들의 전통적인 선박들과 재건된 바이킹 함선 등을 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바이킹 선박을 직접 타볼 수 있는 기회도 즐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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