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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27. 2018

바이킹 장례식은 어떻게 치렀나?

1. 바이킹 장례식   

  

바이킹 영화의 거의 마지막 장면은 대개의 경우 장례식 장면으로 끝이 난다. 순간 시선이 고정되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긴장감이 흐른다. 바이킹 선박에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놓고 그 위에 죽은 자를 올려놓는다. 그리고 배를 바다로 떠나보내고 잠시 후 주인공 측근쯤 되어 보이는 사람이 배를 향해 불화살을 한방 날린다. 배에 불이 붙고 타기 시작하면 잠시 후 배는 바닷속으로 서서히 가라앉는다. 그리고 영화는 대개 끝이 난다.     


그런데 이런 영화 속 장면을 보면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바이킹들은 모두 그렇게 배에 실어 화장을 했을까? 바이킹은 불교도가 아닌데 왜 화장을 했을까? 이런저런 의문들이 생겨난다. 영화처럼 바이킹 배에 불을 지르고 거행하는 장례식에서 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바이킹 수장이 죽게 되면 대개의 경우 그를 배에 태워 장례를 지낸다. 죽은 자를 배에 싣고 바다로 나가 배에 불을 붙여 태울 때 화염에 휩싸이게 되면 사람들은 내세로 떠나는 위대한 전사가 화염 속에서 춤을 추며 하늘로 올라간다고 믿었다.     


만일 현대에 그런 장례식을 한다면 아마 음향효과도 필요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쨌든 고대 바이킹 선박을 불태우는 장례문화는 그 자체가 훌륭한 의식이었다. 특히 바이킹 장례식에서 배가 불타는 장면과 샤먼(무당)이 주술을 외우며 장례를 진행하는 과정은 장례문화를 더욱 엄숙하고 진중한 분위기를 만들어 효과적이기 까지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장례식은 당시에 누구나 할 수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선박에 실어 화장을 하는 의식, 즉 바이킹 장례식은 사회적 지위를 반영했다. 뿐만 아니라 재산이나 가문의 크기 등이 고려되어 장례식이 진행되었다. 따라서 바이킹 선박을 이용해 화장을 하는 풍습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다.    

  

바이킹 선박에 매장하는 장례문화는 위대한 바이킹 전사들을 위해 마련된 의식이었다. 그동안 발굴된 고고학적 증거들에 따르면 장례 선박이나 마차 등은 대개 부자들과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게만 허용된 의식처럼 보인다. 이런 유형의 장례식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이나, 지위가 높은 바이킹 수장, 또는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 주로 선박을 이용해 장례를 치렀을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고대 시대에 장례용 선박을 건조하는데 일정한 시간과 비용이 들었기 때문에 사전에 예약을 받아 선박을 제조해야 했을 것이다. 또는 갑자기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이 죽었을 경우에는 기존에 사용하던 바이킹 전함을 장례용으로 사용하기도 했을 것이다. 따라서 일정한 지위나 재산이 없다면 선박을 미리 주문해 제작하는 등 그 비용을 감당하는 데도 어려움이 따랐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바이킹 장례 문화는 일반인의 경우라기보다 사회적 계급이 높은 귀족이나 재산이 많은 부유층, 그리고 정치적으로 신분이 높은 일부 계층의 사람들이 주로 전통 바이킹 장례를 치렀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인들의 경우는 대부분 매장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극소수 만이 바이킹 선박을 이용해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바이킹 시대 초기에 거행된 장례문화는 죽은 자를 선박의 장작더미에 올려놓고 불에 태우는 방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점차 바이킹 시대가 진척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바이킹 선박에 죽은 자를 싣고 바다로 나가 배와 함께 화장을 하는 장례식을 선호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불에 탄 주검과 선박은 그대로 바다에 수장시키는 것이 일반적인 것처럼 보였다. 이런 형식의 매장은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던 장면과 거의 유사한 형태이기도 하다. 바이킹 시대에 흔히 보이던 전형적인 장례문화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장례식을 진행하면서 바이킹 선박에 쌓아놓은 장작더미의 높이에 따라 사회적 신분이나 지위가 달랐다고 한다. 장작더미가 높을수록 그 사람은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장작더미의 높이를 임의로 정하는 게 아니라 일정한 사회적 지위나 수준에 따라 그 높이도 어느 정도 정해져 있다는 사실이다.    


바이킹(장례선 포함) 선박이 발견된 지점과 장례식 장면

 

장작더미를 높이 쌓아 놓은 것은 이미 사회적 지위가 반영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일반적으로 장작 더미는 3미터에서 10미터 정도 높이까지 쌓는데 높이가 10미터 정도 높이가 되면 의식에 필요한 가장 멋진 화염을 만들어 준다고 한다. 따라서 밝기나 화염의 정도를 고려해 3m 정도가 기본이고 신분이 높을수록 더 높이 장작을 쌓게 된다는 것이다.      


한편 바이킹 선박 매장을 하는 사람들의 경우 재산이 많거나 사회적 지위가 높기 때문에 장작더미만 높이 쌓는 게 아니라 부장품도 함께 배에 실었다. 금이나 은, 또는 개인이 아끼던 물품이나 때로는 살아있는 개나 말같이 자신이 직접 기르고 아끼던 짐승들까지도 함께 수장을 하는 경우가 있다.(* 오슬로 바이킹 선박 박물관에 전시된 유품들 중에는 개와 말의 뼈가 발굴되어 전시 중인 것도 있다.)     


바이킹 선박의 화장뿐만 아니라 모든 장례의식은 대개 공개적으로 진행을 했다. 또한 이들 장례식은 미래에 대한 기대와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를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따라서 죽은 자가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 멋진 항해를 하기를 바라면서 살아있는 자들과 이별을 고하는 예식이기도 하다.     


그런 이유로 장례식이 진행되는 동안 간혹 특별한 장치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바이킹 선박을 태우면서 일부러 연기와 냄새를 유발하기 위해 특별한 향료 같은 재료들을 불속에 던져 넣는 경우가 있었다. 더 많은 연기와 더 좋은 냄새를 퍼트리기 위해 특별한 식물이나 향신료 같은 것들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화장 진행과정은 단순히 바이킹 선박을 불태우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해 충족시킬 수 있도록 조작하고 의식의 완성도를 높여가는 하나의 종합예술작업과도 같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매장 의식은 신중하게 선택된 장소에서 거행되었다. 바이킹 선박을 태우며 화장장을 거행하는 장소는 임의의 장소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대개의 경우 특정의 정해진 장소에서 거행되었다. 더구나 장작더미를 쌓아 놓는 장소 역시 아무 곳에서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정해진 장소에서 해야 했다. 또한 장례를 치르고 나서 고인의 잔해를 거두고 매장하는 일 역시 장소를 정해 진행했다고 한다. 영화처럼 그냥 바닷속에 가라앉게 내버려두는 게 아니란 말이다.     


따라서 장례의식은 단순히 화장을 하고 불이 꺼지면 끝나는 게 아니라 그 후에도 정해진 절차에 따라 나머지 적절한 의식을 더 진행했다. 불타는 것 이상으로 다음 과정도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음식을 준비해 죽은 자에게 바쳐야 했고, 불에 탄 배에서 죽은 자의 뼈를 수거해 땅에 묻어야 했고, 동물이나 무기 같은 애장품들을 주검과 함께 묻어야 했다. 그리고 나서야 죽은 자가 지상에서 땅속으로 들어가 편히 쉬게 되는 것으로 여겼다. 


발굴된 바이킹 장례선 오세베르그 호 설명 그림(톤스베르그 박물관)
장례선 오세베르그 호 발굴 장면
오세베르그 호에서 발견된 부장품들, 머리빗과 목각인형 등


고고학자 헨릭센(Henriksen)은 지난 30년 동안 무덤을 발굴하는 작업을 해 왔는데 그의 연구를 통해 볼 때 고대 바이킹 무덤은 단순하지가 않고 상당히 역동적인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이킹 시대의 장례문화는 장례를 치를 때 함께 매장하는 애장품도 중요하지만 장례의식 그 자체에 비중을 두는 경향이 점점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 된다.  

   

우리가 오늘날 무덤이라고 부르는 것은 죽은 자의 육체가 들어있는 특별한 공간이기는 하지만 이미 생명이 없는 공간이기에 정적일 수밖에 없는 개념이다. 그러나 헨릭센은 고대의 무덤은 상대적으로 정적인 개념이라기보다 오히려 역동적인 개념이라고 말한다. 바이킹들의 무덤은 언제나 열 수가 있고, 그가 아끼던 물건과 함께 묻히기 때문에 물건을 꺼낼 수도 있고, 다시 넣을 수도 있다. 그러니 바이킹 시대의 무덤은 닫힌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이라는 주장이다. 

     

오늘날에도 바이킹 시대처럼 바이킹 선박을 불태우며 장례의식을 거행하는 축제를 볼 수 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하고 멋진 장례식이 축제처럼 진행된다. 바로 스코틀랜드 북쪽에 있는 셔틀랜드 러윅(Shetland Lerwick)에서 매년 1월 마지막 화요일에 진행하는 ‘헬리 에이(Helly Aa) 축제’가 바로 그렇다. 이 축제에서는 실제로 바이킹 선박을 불태우고 죽은 자에게 축복을 기원하는 의식을 거행한다. 이 축제는 예전 바이킹 시대의 장례문화를 거의 똑같이 재현한다. 해마다 진행되는 이 축제는 1881년 처음 시작했는데 바이킹 선박을 불태우기 시작한 것은 1889년에 처음 시작했다고 한다.  

    

셔틀랜드 제도는 예전 노르웨이 바이킹들이 정착해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살고 있다. 따라서 주민들이 지금까지 예전 바이킹 문화를 그대로 답습하며 살고 있는 특이한 지역이다. 뿐만 아니라 인근에 있는 오크니(Orkney)  제도 역시 노르웨이 출신 바이킹들이 지배했던 지역이었다. 셔틀랜드 제도와 오크니  제도는 1468년 노르웨이가 스코틀랜드에게 소유권을 모두 팔아넘겨 현재는 스코틀랜드 관할이지만 여전히 노르웨이 풍습을 따르는 특이한 지역이다.(* 노르웨이 국경일 등에는 노르웨이 국민들처럼 노르웨이 국기를 내걸고 시가행진을 하며 기념일을 즐긴다. 또한 특정한 행사가 있을 때는 노르웨이 여왕이 직접 이곳 행사에 참석해 축사를 하기도 한다.)  

   

셔틀랜드에서 벌어지는 축제 “Helly Aa”는 다른 바이킹 축제들과는 달리 예전 바이킹 시대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준다. 한편, 셔틀랜드 축제가 매년 1월 마지막 화요일에 열리는 이유는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 천둥신 토르(Thor)를 기리기 때문이다. <Thursday>는 ‘토르의 날’(thōrsdagr)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는데, 당시 바이킹들에게 천둥신 토르는 수호천사와 같은 존재였다. 


셔틀랜드에서 매년 1월 마지막 화요일에 열리는 'Helly Aa' 축제(2017년도)



2. 바이킹 선박 장례 문화   

  

노르웨이에서 발굴된 장례 선박들을 보면서 선박 장례 문화가 생각보다 오래된 문화적 전통이었음을 알 수 있다. 바이킹 장례 선박 풍습은 스칸디나비아의 고대부터 내려온 전통으로서 최소한 북유럽 철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만큼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박 장례가 점차 보편화되기 시작한 것은 적어도 북유럽 청동기 시대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다른 지역보다 노르웨이 사회에서 선박 장례 문화가 점차 중요한 영적 기능을 차지하며 다른 북유럽 지역보다 많은 바이킹 선박 장례 문화 유적을 볼 수 있다.   

   

이들이 이처럼 바이킹 함선에 매장하는 장례를 선호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바이킹 선박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 때문이었다. 당시 바이킹 시대를 주도한 가장 중요한 수단 중 하나는 바로 바이킹 선박이었다. 따라서 북유럽이 암흑기에서 벗어나 바이킹을 막강한 세력으로 부각하고 먼 해외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바이킹 선박을 통해 가능했다.    

 

당시 바이킹 선박은 그야말로 바이킹에게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었다. 따라서 죽은 자가 바이킹 선박을 타고 불꽃처럼 하늘로 올라갈 수 있기를 바라는 염원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또한 사회적 지위가 높을수록 그런 염원은 더욱 바이킹 장례문화를 선호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볼 때 2017년 노르웨이 트론헤임(Trondheim)에서 새로이 발굴된 장례 선박의 경우에도 장례문화의 전통을 볼 수 있는 좋은 예라고 하겠다. 노르웨이 고고학 발굴팀은 노르웨이 중부 도시 트론헤임 시내 힌복판 올라프 1세 동상이 있는 광장 아래 깊이 4미터에 이르는 곳에서 바이킹 선박 잔해들을 발굴했다. 바이킹 선박의 목재가 남아있는 것은 아니지만 남아있는 선박의 잔해들과 배를 만들 때 사용한 못을 통해 충분히 바이킹 선박 규모를 알 수 있다.     


발굴단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당시 장례용으로 사용된 바이킹 함선의 크기는 바이킹 함선을 연결하는 못 수량으로 볼 때 대략 길이가 25m 이상은 되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따라서 지금까지 발굴된 장례용 바이킹 함선으로는 가장 큰 규모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트론헤임의 바이킹 장례선 잔해는 각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번에 발굴된 바이킹 선박 유물 중에는 청동으로 만든 스푼 조각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이 외에도 형체를 구분하기 힘들지만 사람의 뼛조각과 청동 성분의 작은 조각들도 함께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번에 발굴된 바이킹 장례 선박의 경우 서기 600년 경부터 900년경 사이에 제조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노르웨이 옛수도 트론헤임 풍경들


고고학자들은 이번에 발굴한 바이킹 선박의 잔해들은 여러 전문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트론헤임 인근 해안 트렌데락(Trøndelag)을 따라 흔히 볼 수 있었던 오피요르(Åfjord) 보트일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오피요르 선박의 가장 큰 특징은, 일반 항해용 바이킹 선박을 장례용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자를 위해 특별 주문 제작한 바이킹 선박을 마치 관처럼 사용해 죽은 자를 배에 싣고 땅에 묻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고 있다. 

     

따라서 조사팀이 주력하는 부분은 바로 관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번 발굴된 바이킹 선박의 잔해 내에 당시 이 지역 토양으로 보이는 흙이나 관련 물질이 남아있을 가능성을 찾으려는데 주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트론헤임이라는 도시 자체가 노르웨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중 하나이고 당시 노르웨이 수도로서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던 바이킹 거점 도시였기에 관계자가 죽은 후 마치 관처럼 사용하기 위해 바이킹 선박을 제조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것은 다른 어떤 중세 도시보다 트론헤임이 오래된 도시이기에 그 가능성이 높다“고 노르웨이 고고학 연구팀은 주장한다.

      

그동안 장례용 바이킹 선박이 발굴된 스톡홀름 인근의 비르카(Birka)나, 노르웨이의 곡스타드(Gokstad) 또는 카우팡(Kaupang)과 같은 다른 바이킹 정착지는 모두 당시 무역거래 중심지로 알려진 곳에서 (바이킹 선박) 무덤이 발굴되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트론헤임에서 발굴된 바이킹 선박 잔해들은 오래전 철기 시대에 제작해 사용한 바이킹 선박의 잔해들이 발견된 첫 번째 사례라는 점에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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