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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r 03. 2024

세상은 참 아름다워!

레이크 루이스로 가는 여행

      

1. 레이크 루이스에 울려 퍼지는 소리 없는 아우성

     

오랜만에 밴프 국립공원을 찾은 나는 한 겨울의 레이크 루이스가 궁금해 차를 몰고 그곳으로 간다. 레이크 루이스 입구를 지나 호수 곁으로 난 길을 따라 빅토리아 산(3,464m)으로 향한다. 빅토리아 산으로 가는 길은 엄청난 눈으로 뒤덮여 있어 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불가능해 보인다. 레이크 루이스를 지나 1Km 정도 지점에 휴게소 찻집이 있으니 그곳까지 갈 수 있다면 다행이라 여기고 계속 간다.      


레이크 루이스를 막 벗어나 휴게소 찻집이 있는 곳으로 오르는 언덕길로 접어드는데 문득 어디선가 인기척이 느껴지고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만 귀를 기울여보니 생소한 흐느낌 같은 소리가 들린다.          


“어허이 어허이야 어허이”

“에헤야 어허이 에헤야”     


분명 가냘프지만 주문을 외우는 듯한 소리였다. 가까이 다가 갈수록 그 소리는 점점 더 빨라지고 애절함을 더해간다. 내 발걸음도 그에 맞추듯 더욱 빨라지고 숨이 턱에 닿을 듯 거칠어만 간다. 드디어 소리 나는 곳에 당도했다. 그곳에는 누군가 엎드려 애절한 통곡을 하듯 작은 소리지만 날카롭고 또렷한 외침을 부르짖고 있었다.     

그녀가 준비한 선조들을 위한 상(?)차림

중년쯤 되어 보이는 여인네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는 맑은 눈동자를 가졌다. 반백의 머리털을 바람에 날리고 있다. 어느 영화에서 본듯한 그녀의 모습은 마치 벌판을 달리는 백마처럼 느껴진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나는 기가 꺾여 카메라를 들이댈 자신이 없었다. 단지 그녀가 무얼 하는지, 그녀의 행동거지 하나하나를 유심히 바라볼 따름이었다. 

     

오래전부터 그녀는 이곳에 와 자신의 선조들을 위해 노래를 하며 영혼을 달래는 일을 해 왔다고 한다. 캘거리 인근에 있는 인디언 보호구역에 거주하고 있는 그녀는 자주 밴프국립공원 지역을 들른다고 했다. 레이크루이스 호수는 물론 민네왕카 호수도 자주 찾는다고 했다. 밴프국립공원 일대는 이 지역에 살던 선조들이 백여 년 전 영국군에게 학살을 당한 곳이라고도 했다.  그녀의 선조들도 모두 그때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

   

와치키예(Wahchegiye: "창조주와 가까운"이라는 의미)로 불리며 나코다 지역의 위대한 추장(1922~1932)인 헥터 크롤러(1850~1930s), 그는 1850년 나코다(Iyãhé Nakoda)에서 태어났다. 헥터는 그의 형 죠지 크롤러(George Crawler)와 함께 1877년 밴프지역을 캐나다 정부에 넘긴다는 ‘제7 조약’에 강제로 서명을 해야만 했다.


이제 헥터는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땅을 잃게 될 뿐 아니라 그가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마음의 고향까지 잃게 된 것이다. 그 후 헥터 크롤러는 캘거리 인근의 몰리 보호구역으로 쫓겨나 집단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간간이 영적 치료를 위해 밴프지역을 찾아온다.  이곳은 바로 와치키예 추장이 자주 찾으며 그들만의 소리 없는 아우성을 외쳐댄 곳이었다.               


와치키예 추장 사진(밴프민속박물관), 레이크 루이스 풍경
밴프 인근에 있는 민네왕카 호수 풍경들, 그들만의 고향이다

        


2. “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가거나 혹은 뛰어가다가 잠시 멈춰 서서 달려온 길을 되돌아 바라본다고 한다. 너무 빨리 달려 영혼이 못 따라오지나 않을까 해서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인디언들이 지닌 회한과 여유, 이것은 결코 다른 말이 아니다. 한을 삭이고 고유한 가치를 지키기 위해 영혼을 부르는 인디언의 속삭임은 인디언들의 가장 큰 울림으로서 그들만의 가치를 공유하려는 고귀한 인디언들의 내밀한 문화 형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의식화된 행위는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오랜 기간 모든 것을 빼앗기고 변절을 강요받은 인디언들의 고유 문화는 남아있기는 한 걸까? 하지만 거대하고 아름다운 아메리카 대륙, 이 거대한 땅덩어리에서 벌어진 굴욕과 굴종의 사건들 속에서 그 흔적은 쉽사리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인디언 보호구역’, 이곳을 기억하면 어느새 아파치, 코만치, 모히칸, 나바호, 샤이엔, 체로키, 카탕카 등등 쓰러져간 수많은 인디언 부족들 이름이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컬럼부스 동상(스페인 바르셀로나) 그가 가리키는 곳이 아메리카

1492년 컬럼부스라는 망나니가 아메리카 대륙에 발을 내딛으면서 이들의 운명은 이미 예견되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에 거주하던 인디언 부족은 500여 부족, 500만 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그러나 그 후 1875년 미국 남서부 지방의 비옥한 땅에서 살던 인디언 부족은 강제로 캘리포니아의 어느 덤불 우거진 황량한 산기슭으로 이주를 해야만 했고, 이때부터 비극은 시작된다.      


유럽인들이 인디언들과 맺은 각종 조약은 휴지조각처럼 무시된 채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창살 없는 감옥처럼 ‘보호구역’이라는 곳에 갇히게 된다. 그걸로 끝난 게 아니라 보호구역에 갇힌 인디언들은 끝내 학살을 당하고 만다.     


1876년 12월 15일 미군 제7기병대는 몇 해 전 빅혼전투에서 제7 기병대를 전멸시킨 용맹한 인디언 ‘앉은 소’ 추장을 불온한 ‘망령의 춤’을 확산시켰다는 어처구니없는 혐의로 체포해 처형한다. 그뿐 아니라 제7 기병대는 1890년 드디어 마지막 학살 전쟁을 치르는 운디드니에서 라코타족 ‘큰 발’ 추장을 포함해 부족민 300여 명을 무참히 학살하기에 이른다. 그렇게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하늘의 별이 되어 사라져 가야만 했다.     


그 결과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로 들어온 지 400여 년이 지난 1890년도에 이르면 250개 부족, 10만여 명 만이 ‘인디언 보호구역’ 274곳에 수용되어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들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그 후로도 자신들 고유의 언어조차 사용하지 못하고 강제로 영어를 배워야 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라는 낯선 곳에서 새로운 신을 섬기고 예배를 보아야만 했다. 새로운 유럽식 문화를 접하게 되면서 인디언들 정체성은 점차 변해가게 된다.      


인디언들의 일상을 그린 Peter Whyte(1905-1966), 1931(밴프민속박물관 소장)


그러나 인디언들은 다행히 자신들 고유문화를 은밀히 보존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는다. “속삭여라!” 이 한마디로 상징되는 내밀한 의식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만의 고유문화를 지켜갈 수 있도록 했다. 죽은 자와 살아남은 자에게 전하는 은밀한 메시지, 속삭임으로 전하는 무언의 언어야 말로 인디언들만의 의식적 행위로서 오늘도 여전히 큰 울림으로 전해오고 있다.          



3. 제노사이드는 현재진행형이다     


인종청소를 하려던 것이었을까? 2021년 5월 캐나다 남서부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 있는 옛 캠루프스 인디언 기숙학교 부지에서 아동 215명의 유해가 발견된다. 이중에는 세 살배기 어린아이들도 있었다. 얼마 후 그 세 배가 넘는 751구의 어린이 유해가 새스캐처원주에 있던 매리벌 원주민 기숙학교 터에서 발견된다. 그곳에도 묘비나 그 어떤 표식이 없었다. 

    

그뿐 아니었다. 캐나다 원주민 단체인 '로어 쿠테네이 밴드'도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크랜브룩 근처에 있는 옛 세인트 유진 선교학교 부지에서 표식 없는 무덤 182기를 찾았다고 밝힌다. 이곳에서 교육받던 원주민 어린이들 무덤으로 추정됐다. 계속해서 브리티시 컬럼비아주 페넬라쿠트섬에 있던 기숙학교 '쿠퍼 섬 원주민 공업학교' 터에서도 표식과 기록이 없는 무덤 160기가 발견된다.     

유해와 함께 발견된 신발들을 비롯한 물품들 

이렇게 2021년도에 캐나다 원주민 어린아이들 유해를 1천3백여 구 이상 찾아낸다. 이들이 거주했던 기숙학교들은 대부분 가톨릭 교회가 운영한 곳이었다. 캐나다 정부와 가톨릭교회는 1883년경부터 1996년에 이르기까지 100여 년간 139곳에 이르는 기숙학교를 세우고 강제로 원주민 아이들 15만 명 이상을 이곳에 수용한다. 가톨릭교회는 특히 정부를 대신해 70%에 이르는 학교들을 운영한 것으로 알려졌다.

     

캐나다는 과거 원주민인 인디언과 이누이트족, 그리고 심지어는 유럽인과 캐나다 원주민 혼혈인 메티스 까지 기숙학교에 집단 수용하고 영어와 유럽 문화를 교육한다. 그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백인 사회에 동화시키려는 것이었다.     


그를 위해 우선적으로 원주민 언어 사용을 강제로 금지시키고 원주민 문화 말살 정책을 자행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원주민 어린이들이 육체적, 정신적, 학대는 물론 심지어 죽임을 당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캐나다 원주민 기숙학교는 그 대표적 장소이다.      

부끄러운 역사를 기록한 기사

캐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지난 2015년 7년간 원주민 기숙학교 문제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했는데, 원주민 학생 4천100명이 영양실조, 질병, 학대 등으로 숨지거나 실종됐다고 밝힌다. 그리고 이는 분명 캐나다 정부가 공공연하게 자행한 문화적 제노사이드(집단·인종 학살)라고 규정한다.     


이후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지난 2017년 원주민 기숙학교가 "캐나다의 부끄러운 역사"라며 정부 차원에서 공식으로 사과한다. 또한 캐나다 의회 역시 매년 9월 30일을 원주민 기숙학교의 어두운 역사를 추념하기 위한 법정 공휴일, '진실과 화해를 위한 국가 추념일'로 제정한다.     


어쩌면 이를 미리 예견한 와치키예 추장이 레이크 루이스를 찾아와 그리도 구슬피 “속삭여라!”라고 침묵의 아우성을 외쳐댄 게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이지 않았을까? 문득 어디선가 루이 암스트롱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I hear babies cry

I watch them grow

They'll learn much more

Than I'll ever know

And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Yes, I think to myself

What a wonderful world

Ooh, yes          


벤프 중심가, 밴프는 지금  유명 관광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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