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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r 08. 2024

흐르는 강물처럼

레이크 루이스로 가는 여행 2

백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약속을 했다. 그러나 지킨 것은 단 하나. 우리 땅을 먹는다고 약속했고, 우리 땅을 먹었다.” - 오글라라 수우족 추장 붉은 구름- 



1. '작은 물고기들의 호수'


록키산맥에는 참 많은 명소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록키의 여왕이라 할만한 캐나다 밴프 국립공원은 한 겨울 새하얀 빛을 발하는 풍광이 가히 절경이라 할만하다. 더구나 밴프 국립공원의 중심이랄 수 있는 루이스 호수(Lake Louise)는 맑은 날 에메랄드 빛을 띠는데, 산 위에서 루이스 호수를 내려다보면 그 빛의 오묘함에 탄성을 자아내게 된다. 

     

아그네스호수를 지나 빅비하이브스봉에 오르면 보이는 루이스호수

루이스 호수는 빅토리아 산이 자리 잡은 빙하 일대가 녹아 흘러내린 물이 모여 호수를 이루고 있다. 이 호수 주변에는 2천 미터를 넘나드는 산과 빙하가 호수를 둘러싸고 있어 호수는 그 모양새 자체가 이미 지체 높은 귀공자 같은 느낌을 준다.      


유네스코는 이 호수를 세계 10대 절경의 하나로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잘 알려져 있지 않던 유키 구라모토라는 피아니스트가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라는 피아노곡을 만들어 유명세를 얻기도 했다. 그는 1986년 첫 앨범으로 ‘레이크 미스티 블루(Lake Misty Blue)’라는 타이틀을 가진 시디(CD)를 제작하는데 여기에 실린 "레이크 루이스(Lake Louise)"라는 곡이 히트를 치면서 성공적으로 데뷔를 한 것이다.   

루이스 호수의 겨울, 멀리 중앙에 빅토리아산, 우측 높은 봉우리가 성 피란산

밴프에서 60㎞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세계 10대 절경 중 하나인 루이스 호수, 길이 2.4㎞, 수심 70m나 되는 제법 큰 규모의 빙하호수, 그런데 루이스 호수 일대를 유심히 관찰하면 특이하게도 온통 영국왕실 관계자들 이름으로 빼곡하다는 것을 알 게 된다.   

   

루이스 호수(Lake Louise)는 원래 이 지역에 살던 캐나다 원주민들이 '작은 물고기들의 호수'(ho-run-num-nay, Lake of the Little Fishes)라고 불렀다. 그러나 “작은 물고기들의 호수”라는 이름은 졸지에 빅토리아 여왕과 그녀의 남편 앨버트 공의 넷째 딸 ‘루이스 캐롤라인 앨버타’(Louise Caroline Alberta: 1848~1939년)의 이름으로 바뀐다.      


이처럼 유럽의 정복자가 캐나다를 지배하기 전부터 사용하던 이름들이 있었을 텐데 루이스 호수 주변은 온통 영국에서 건너온 통치자들 이름으로 가득하다. 더구나 그걸 시위하듯 게시판을 만들어 관광객이 잘 볼 수 있도록 해 놓았다. 마치 우리네 창씨개명하듯 말이다.     

레이크 루이스 주변에 붙은 이름의 주인공들을 적어놓은 안내판

루이스 공주, 그녀는 1871년 3월 당시 론 후작이며 아가일 공작 후계자인 존 캠벨과 혼인을 한다. 왕실공주가 신하와 결혼을 한 것은 1515년 이래 처음 있는 일이다. 존 죠지 에드워드 헨리 더글라스 서더랜드 캠벨(John George Edward Henry Douglas Sutheland Campbell), 다소 긴 이름을 가진 그는 결혼을 하자 영국 귀족 아가일 가문의 공작이 된다.   

   

캠벨 공작은 1878년부터 1883년까지 제4대 캐나다 총독으로 부임한다. 빅토리아 여왕이 존 캠벨을 캐나다 총독으로 임명하자 루이스 캐롤라인 앨버타 공주는 부마인 캠벨을 따라 캐나다로 간다. 


그러나 캐나다 생활을 달가워하지 않던 루이스 공주는 남편이 캐나다 총독으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도 캐나다 생활을 지겨워한다. 결국 그녀는 임기도중 홀로 런던으로 돌아가 버린다. 더구나 존 캠벨은 그 당시 동성애자로 소문이 나 있었고, 그래서인지 둘 사이에는 자녀도 없었다.     


루이스 공주는 다소 심술궂고 신경질적인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었는데 왕실가족의 일원임을 그녀의 남편에게까지 보란 듯 내보인 것이다. 사실 루이스 공주가 그만한 오기와 지나치다 싶을 만큼의 자기주장을 앞세운 데는 그녀의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겠다.     


루이스 공주의 어머니 빅토리아 여왕, 그녀는 1861년 여왕의 부군 앨버트공이 42세 젊은 나이로 장티푸스에 걸려 죽음을 맞는 바람에 오랜 시간 칩거생활을 한다. 그러나 빅토리아 여왕이 프랑스와 경쟁하듯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이름을 떨치게 된다.      


레이크 루이스 주변 풍경들, 아침햇살이 눈부시다.

특히 아메리카 대륙에서 본격적인 침략전쟁에 뛰어든 빅토리아 여왕은 레이크 호수 인근을 포함한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와 앨버타 주를 차지함으로써 엄청난 업적을 이루게 된다. 그 때문인지 앨버타 주와 브리티시컬럼비아 주 경계를 이루는 제일 높은 산봉우리를 빅토리아 여왕의 이름을 갖다 붙여 ‘빅토리아 산(Mt. Victoria: 3,464m))이라고 한다.     


뿐만 아니라 영국은 캐나다를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행정구역으로 이 호수가 속한 지역의 이름을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 앨버타 공의 이름을 갖다 붙여 앨버타주라고 부른다.     

 

이 처럼 루이스 호수 주변에 있는 크고 작은 산 봉우리들과 산속에 숨어있는 호수들 대부분 영국인들 이름을 갖다 붙인다. 특히 트레킹 코스로 유명한 아그네스 호수의 이름은 물론 그곳으로 오르는 길 주변의 산봉우리들 대부분이 창씨개명을 한 결과물이다.     


왼쪽 아래가 빅토리아산, 중앙 맨 위쪽에 성 피란산, 큰 호수가 루이스호수, 그 위쪽에 아그네스호수



2.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이


루이스 호수를 출발해 우측으로 산길을 따라 오르면 마치 벌집을 닮은듯한 빅 비하이브(Big Beehive: 2,270m)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계속 오르면 미러 호수(Mirror Lake)를 만나게 되고 조금 더 가면 찻집 휴게소(Tea House)가 나온다. 바로 그 앞에 아그네스 호수(Agnes Lake)가 있다.      


그리스어로 아그네스가 ‘순결’을 뜻한다고 했으니 얼마나 그 모습이 순결했으면 아그네스란 이름을 붙었을까 생각할 테지만 이건 단지 신화적 상상일 뿐이다.      


1890년 산 위의 호수를 “아그네스 호수(Lake Agnes: 해발 2,100m)”라고 이름을 붙인다. ‘아그네스’라고 부르게 된 계기는 당시 캐나다 첫 번째 총리의 부인 수잔 아그네스 맥도널드(Susan Agnes Macdonald)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고 한다. 당시에 그녀가 이 호수를 찾은 적이 있다고 하는데 이를 계기로 아그네스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것이다.     


“눈 녹은 호수는 에메랄드빛으로 고혹적으로 빛나고 흰 눈으로 뒤덮인 백색의 호수는 그야말로 눈부신 천사의 날개 같은 느낌으로 다가온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은 아그네스 호수. 그 호수를 보기 위해 쉬지 않고 오르막 길 4.8Km를 가야 한다. 눈이 없다면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을 듯한데 눈이 1m 이상 수북히 쌓인 한겨울에 오르기에는 절대 녹녹지가 않다. 그래도 주변 산 이름들이 궁금해 계속해서 아그네스 호수가 있는 저 높은 곳을 향해 올라간다.   

 

루이스 호수 오른편으로 아그네스 호수로 가는 오르막길을 따라 간다


오르막 길 중간쯤 오르면 드디어 루이스 호수 건너편 에버딘 산(Mt. Aberdeen: 3,152m)이 보이고 발아래로 레이크 호수가 보이기 시작한다. 오르는 길목에는 하늘까지 맞닿은 침엽수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고 간혹 급경사 지역에 이끼 낀 쓰러진 나무들도 보인다.     


미러 호수 표지판이 있는 곳에 다다르면 바로 그 앞에 미러 호수를 만나게 된다. 여름에는 작고 예쁜 산정호수를 만날 수 있을 테지만 겨울에는 온통 흰 눈으로 뒤덮여 호수는 보이지 않고 단지 숨어있는 ‘하얀 거울’만 보일 뿐이다.

      

미러 호수 표지판 앞이 미러호수, 그 뒤로 벌집처럼 생긴 빅비하이브 산봉우리
찻집휴게소(Tea house)에 올라 바라본 미러호수와 레이크 루이스, 휴게소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서있을 장소조차 없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오르면 드디어 눈앞에 마치 벌집처럼 생긴 우뚝 솟은 봉우리를 만나게 된다. 바로 빅 비하이브 봉우리(2,270m)이다. 이곳을 지나면 잠시 후 찻집 휴게소가 나온다. 바로 휴게소 앞에 아그네스 호수를 만나게 된다.      


아그네스 호수를 품고 있는 봉우리들이 마치 아그네스 호수를 감싸고 있는 호위병들처럼 빙 둘러 서 있다. 그런데 그중 한 봉우리의 이름이 특별나다. 아그네스 호수를 사이에 두고 "성 피란 산(Mt. Saint Piran)"과 마주하고 있는 “악마의 엄지손가락(Devil's Thumb 2,458m)"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면 바로 이 악마의 ‘엄지손가락’과 대적할 기운찬 이름이 필요했기 때문에 영국의 수호성인 성 피란(St. Piran)의 이름까지 가져다 붙인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다. 성자와 순결함의 상징인 아그네스, 그리고 악마의 엄지손가락, 그리고 성자인 피란 신부. 무언가 원래 이곳에 그럴싸한 이야기가 있었을 것 같은 분위기가 감지된다. 당연히 그래서 성자와 성녀의 이름이 자리한 것처럼.  

    

흰 눈으로 덮여있는 아그네스 호수


아그네스 호수 뒤편에서 호수를 감싸고 있는 봉우리들에는 당시 캐나다 지질탐사대장이었던 르프로이(J.H.Lefroy) 대위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붙여 르프로이 산(Mt. Lefroy: 3,423m)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 곁에 있는 산 이름을 니블럭 산(Mt. Niblock 2,976m)과 와이트 산(Mt. Whyte 2,983m)이라고 명명한다. 이들 이름은 당시 태평양 연안철도 부설 책임자와 부책임자였던 자들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것이라고 한다.   

Peter Whyte(1905-1966)가 그린 Pitarmigan Peak(1933)

이렇게 아그네스 호수로 오르는 길목에 있는 산 이름들 모두 영국인들 이름을 붙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런 이름이었던 것처럼...            


그런데 1545년부터 영국의 지배자들은 그들이 만든 지도와 책에 현재의 캐나다 지역을 ‘Canada’라고 표기한다. 캐나다(Canada)라는 명칭은 원주민 언어로 "마을"이라는 뜻의 카나타(Kanata)에서 유래했는데, 16세기 중반 유럽인들이 지배하기 시작하면서 발음이 같은 지금의 캐나다(Canada)라는 표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지 캐나다라는 단어만을 남기고 루이스 호수 주변은 온통 지배자의 흔적이 지워지지 않고 각인되어 있다. 레이크 루이스 지역을 비롯한 밴프국립공원 지역이 빅토리아식 느낌을 간직하게 된 건 그래서 우연이 아닌가 보다.     


멀쩡하게 부르던 이름을 졸지에 천방지축 망나니 같은 ‘루이스’라는 이름으로 바꾸어 놓기 시작하면서 오랫동안 간직해 온 원주민들의 문화적 가치가 한순간에 짓밟히는 행위는 '창씨개명'에 다름 아니다. 이런 행위는 그 자체가 지배와 피지배 관계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말과 글에는 당연히 그 민족의 얼이 담겨 있으니 지배자가 제일 먼저 하는 짓거리는 언제 어디서건 다 똑같이 그 문자와 이름을 지배자의 언어로 바꾸려 한다. 우리나라에서 그랬고 북유럽의 사미족이, 그리고 그린란드와 캐나다의 이누이트들이 사는 곳에서 그랬다.      


원주민의 모든 문화적 가치를 말살한 영국 지배자들, 오직 원주민들이 그들의 땅을 ‘캐나다’라고 부르던 이름만을 지금까지 사용할 뿐 원주민들과의 약속이나 조약은 물론 그 어떤 문화적 징표나 의식들 모두를 무시한 채 그들 방식대로 강압적이고 일방적인 지배 문화를 강요할 뿐이다.      

 

밴프국립공원 지역을 관통 하며 흐르는 바우강, 이곳이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 촬영지


문득 밴프국립공원 지역을 관통하는 바우강에서 플라잉 낚시를 하는 장면이 인상적인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이 떠오른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에서 이 영화를 찍은 걸까? 언제나처럼 역사는 결국 그렇게 매번 똑같이 흘러가기에 “A River runs through It"이라고 한 게 아닐지...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오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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