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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Nov 14. 2023

명상에 빠지면 인생이 재미 없어진다.

Q : 명상 좋죠. 그런데 그렇게만 사는 건 인생이 너무 재미없는 거 아닐까요?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면 물론 괴로움도 동반하겠죠. 하지만 그래도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것에도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게 아닐까요?”


licsiren

라고 물어온 것은 50대 중반의 두 장년 여성이었다. 사회의 일반적인 편견으로 보면 ‘사랑’과는 거리가 멀어진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나이란 것은 그야말로 숫자에 불과하다. 인간의 정신적 성숙도는 나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다. 하물며 50대가 아니라 60, 70대가 되었어도 설레는 사랑은 누구든 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50이라는 나이는 예부터 ‘지천명’이라고 했다. 하늘의 뜻을 알게 되는 나이. 이리저리 휘둘리던 불안정한 청춘의 시기를 지나 마음이 전반적으로 안정기에 접어드는 나이다. 실제로도 그렇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가진 게 많아진다. 물질도 물질이지만, 특히 마음이 그렇다. 소위 말하는 삶이 가치관이 생기니, 이를 지키고 싶어진다. 그래서 어른들은 일반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생물학적으로 변화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랑’이란 안정과는 거리가 먼 감정이다. '사랑'이란 감정을 정의하자면 '서로 다르게 살아온 두 삶이 하나로 얽히고설키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서로 둘이 잘 섞여 온전한 '하나'가 될 때까지는, 필연적으로 불안정한 시기를 지나야 한다. 


하지만 불안정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불안정은 외려 사람을 설레게도 만든다. 사랑의 경우, 상대방에게 잘 보이고 싶어 평소 안 하던 쇼핑도 하고 화장도 하는 것 등의 노력이 여기에 속하는데, 어찌 보면 피곤하지만 다르게 보면 설레는 일인 것이다. 즉, 불안정하지만 그만큼 설레고 재미있는 것이 '사랑'이다. 아무 특별한 일도 없이 굴러온 삶에 갑자기 시작된 사랑은 내 무료한 삶을 드라마로 바꿔준다. 


아마도 두 장년은 이런 점에서 그와 같은 말을 한 게 아닌가 싶다. 장년이 되었다는 것은 어느덧 '사랑'의 감정도 무뎌져 삶이 안정된 것이다. 하지만 다르게 보면, 사랑이 없고 설렘이 없으니 삶이 무료해진 것이기도 하다. 만약 안정적인 감정보다 무료함이 더 지배적이라면, 오히려 장년일수록 더 설레고 가슴 두근거리는 풋풋한 사랑이 그리울 수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와, 나는 되레 그들의 말에 십분 공감했다. 명상을 비롯한 수행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던 때로 돌아가보면 정말 그랬다. 남들에게 얘기하진 않았지만 나는 종종 내가 수행을 시작한 것을 후회했다. 수행을 시작하면 다시는 가질 수 없는 것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연애가 그렇다. 충실한 연애를 할 때에는 상대방이 곧 나의 전부여야 한다. 너를 위해서라면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을 전복시키고 바꿀 정도로 '나'보다 '너'가 중요해지는 게 '사랑'이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시쳇말로 정말 ‘찐하게’ 사랑하는 것이다. 나 스스로도 그 찐함이 선명히 느껴진다. 


하지만 수행을 시작하고 나면 더 이상 그런 형태의 사랑을 할 수 없게 된다. 무릇 온전한 사랑은 내가 상대방에게 흠뻑 빠져야 한다. 그런데 어디에라도 빠져버리면 집착이 생기고, 집착은 모든 괴로움의 근원이다. 이별 이후 더 아플수록 더 많이 사랑했다는 말은 그래서 참이다. 더 많이 사랑하면 더 많이 집착하게 되고, 더 괴로워진다. 때문에 '명상 수행'은 기본적으로 이러한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본질이다. 사람이 어디에라도 빠지려고 할 때 그걸 알아차리고 벗어나는 게 명상 수행이다. 그러니 참된 명상 수행자에게 '사랑'이란 제 무덤을 파는 꼴이다. 사랑에 빠졌다가도 어느 순간 문득, 상대가 아름다워보이는 게 아니라 '내가 괴로움으로 가고 있구나'싶은 생각이 든다. 제대로 된 사랑을 하기가 어려워진다. 




찐한 사랑의 자극적인 맛을 아는 나는 그런 현실이 무척 아쉬웠다. 

‘그러면 이제 나는 그런 사랑을 다시는 할 수 없게 되는 건가? 아직 졸업할 정도로 충분히 즐긴 것 같지도 않은데. 괴롭긴 해도 그 설렘이란 게 진짜 재밌는 건데.’

물론 사랑하면 언젠가 필연적으로 아플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머리로는 잘 안다. 다만 마음에선 여전히 끌렸다. 인간은 늘 자신이 갖지 못 하는 걸 아쉬워하게 마련이니까. 지지고볶고 하는 게 궁상 맞고 괴로울지라도, 그 나름의 재미가 있는 것이다. 즉, 두 장년이 하는 말에 과거의 나는 완전히 해당 되었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날 얘기가 되어버렸다. 이젠 더 이상 그때가 그립지 않다. 

똥을 모으는 사람은 그게 똥인 줄 모르기 때문이다. 코가 막혀서 눈으로만 보면 된장하고 비슷하게 생겼으니 자꾸 모으는 것이다. 반면 손가락으로 찍어 먹어봐서 그게 똥인 줄을 알게 되면, 더 이상 모으지 않게 된다. 

사랑이란 것도 그러하다. 사실 사랑이 그립다고 했을 때는 여전히 사랑의 아픔과 괴로움보다 사랑이 주는 '설렘'을 크게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마음을 먹었어도 실제 사랑을 해보고, 그로 인해 아파보면, 세상이 이것보다 더한 괴로움은 없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뭘 준비했건 사랑의 아픔은 늘 상상 이상인 것이다. 


결국 언젠가부터는 그 아픔의 기억이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압도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연애를 마음껏 하던 때가 그립다는 마음이 올라오면, 동시의 과거에 했던 모든 연애의 결과가 절로 떠오른다.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아팠던 경험들. 그 경험들이 선명해지면, 오히려 사랑에 몸서리가 쳐진다. 다시는 하고 싶지 않은 괴롭디 괴로운 경험들. 또 항상 비슷한 것의 반복임을 알게 된다면, 이미 아는 것을 굳이 다람쥐 쳇바퀴 굴리듯 반복하고 싶은 마음은 사라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 없이 명상으로만 살아가는 삶이 재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결국 수행의 큰 목적 중 하나는, 내 안에 이미 있는 순수한 행복을 발견하는 것이다. 수행이 깊어지면, 언젠가 무엇을 얻거나 누군가와 함께 하지 않아도, 온전히 '나'라고 하는 존재만으로 삶이 충분히 행복하고 완전해진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일상적 삶의 일희일비와는 다른 종류의 행복이다. 이전에 경험하지 못 해본 더 큰 지복()을 알게 될 때, 자연히 시시콜콜한 것들에게는 관심을 끊게 된다. 


결국 자신이 몸으로 경험을 해봐야 알 문제다. 누구에게도 어떤 형태의 삶은 강요할 수 없기 마련. 살다가 더 이상 이 괴로움에 살고 싶지 않다거나, 이렇게 반복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면, 한 마디로 모든 것이 결국은 ‘부질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수행자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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