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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초원 Dec 05. 2023

보통 명상과 위빠사나 명상의 차이점(명상에 대한 오해)

명상 지도가 끝나고 한 사람이 물었다. 

"명상과 위빠사나 명상의 차이점이 뭔가요?"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명상에 대해 어느 정도 들어본 사람이라는 것이다. '위빠사나'란 단어는 비교적 전문적인 단어이니, 일반인이 알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질문은 명쾌한 답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질문 자체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 어디까지나 '명상'이란 표현을 어떻게 정의내리느냐에 따라 달라질 문제다. '명상'이란 표현을 어떻게 정의 내리는지에 의해 그 차이점의 여부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가령 '명상'을 가장 일반적인 정의인 '마음을 다루는 기술'이라고 한다면 이는 광범위한 의미다. '위빠사나'도 어떻게 보면 그 정의 안에 포함되니, 차이점을 논할 수 없게 된다. 


나아가 '명상'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다. 사실 이렇게 정의 내려도 일반적으로 말은 통한다. 사람들이 명상을 하는 이유는 결국 내적 평화를 얻기 위해서다. 편안해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면, 구태여 '명상'일 필요가 없다. 물론, 이렇게 정의 내리면 약간의 차이는 생길 수 있다. 일반적인 명상과 달리 위빠사나의 핵심은 단순한 편안함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궁극적으로는 위빠사나 역시 내적 평화를 지향하므로, 넓게 보면 역시 위빠사나를 포함하는 상위 범주다. 


논의가 어려운 결정적인 이유는 그냥 '명상'이라고 말할 때에도 그 종류가 너무 다양하기 때문이다. 실로 요즘은 단순히 '명상'이라는 한 단어로 뭉뚱그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명상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인의 마음의 병이 보편화되고 그 마음을 관리하는 것에 관심을 가짐에 따라, 명상의 영역도 더 넓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명상법 역시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알아차림'의 유무다.




일반적으로 사회에서 인스턴트로 즐길 수 있는 명상은 '알아차림'이 결여되어 있다. 가령 적막한 숲이나 깨끗이 닦아놓은 방에서 좋은 음악을 틀고, 때론 좋은 향까지 피워놓고 선정에 드는 명상이다. 감각에선 감정이 동하고, 주변의 모든 감각은 내게 '편안함'이란 감정을 유발하니, 감정적으로 편안해질 수 있다.


반면 '알아차림 명상'은 단순히 감각적 편안함을 불러오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알아차림 목적은 좀 더 깊고 전문적인 명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관건이다. 가령, 슬픔 등의 감정이 올라올 때 우리는 '나는 슬프다'라고 말한다. 말하자면 어떤 감정이 올라올 때 그 감정이 '나' 또는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고 보면 그 감정은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조건만 맞으면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다. 이에, 알아차림 명상에서는 슬픔이 올라온다고 해서 '나 슬프다'라고 하지 않는다. '마음에 슬픔이 올라왔구나'라며, 마음을 객관적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다. 알아차리면 감정에 끌려가지 않으니, 그 감정에 의해 허덕이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내적 평화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알아차림 명상'은 소위 '마음 챙김' 명상이라고도 부른다. 알아차림 명상을 할 때에는 좋은 음악도,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향 따위도 필요하지 않다. 외물에 의존해 감정적으로 편안함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으로부터 한 발 떨어지는 것으로 편안함을 찾는 것이기에, 마음만 준비 되었다면 얼마든 할 수 있다. 내 마음에 어떤 것들이 들어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 위빠사나는 이 '알아차림 명상'과도 조금 다르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보면 이를 혼동하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듯하다. 일단 '위빠사나'는 그 단어 그대로 풀자면 산스크리트어로 '본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물론 구체적으로 따지면 단순히 '본다'는 아닐 진데, 이를 있는 그대로 표현할 단어가 우리말에는 없다. 떡볶이에 대한 완벽한 영어 표현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기서 사람들이 많이 하는 착각이 '마음을 본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 마음 속에 지금 어떤 생각이나 감정들이 오고 가는지, 끌려가지 않고 객관적으로 보는 것. 그런데 이렇게 되어버리면 '알아차림 명상'과 아무런 차이가 없게 된다. 그래서 실제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위빠사나'와 '알아차림 명상'이 같은 것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어쩌면 질문자도 이런 점에서 헷갈렸던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가 있다.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본다'라는 개념은 단순히 마음을 가만히 보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앞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위빠사나의 궁극적 목적은 될 수 있어도 당장의 목적은 아니라고 말했다. 반면 위빠사나의 당장 앞에 놓인 목표는 '지혜'를 개발하는 것이다. 그 지혜를 바탕으로 내적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 위빠사나 명상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지혜가 뭐냐. 어떤 대상이 있을 때, 그 대상의 겉모습만이 아니라 '실체'를 바로 아는 것이다. 우리는 보통 겉으로 보이는 것밖에 보지 못 하니 내 눈에 보이는 게 전부인 줄을 알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껍데기 속에 진짜 알맹이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바로 그 알맹이, 실체를 바로 '보아', 껍데기에 현혹되지 않는 지혜를 기르는 것이 위빠사나가 말하는 '본다'의 진짜 의미다.


중요한 것은 그래서 그 '실체'가 뭐냐는 사실이다. 사실 이 부분이 아마도 가장 중요하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실체를 굳이 나 스스로 알아낼 필요는 없다. 이미 정답이 다 나와있는 문제고, 내가 할 일은 이미 있는 그 정답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를 테면, 주로 문제 풀기를 좋아하는 학생은 답안지를 보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풀어 그 답을 스스로 알아내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위빠사나에서는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중요한 것은 답을 머리로만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몸으로 '체험하는' 게 중요하다. 명상에 있어선 아무리 머리로는 알아도 몸으로 경험하지 못 했다면 말짱 쓸모가 없다. 정해진 답이 있으니 그걸 체험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나와 있는 정답은 소위 말하는 '무상', '무아', '고'다. 위빠사나 명상은 이른바 '부처'라고 알려진 싯다르타에 의해 개발된 것이기 때문에, 이미 그에 의해 답이 나와 있다. 여기서 '무상'은 말 그대로 세상 어떤 것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이다. '무아'는 세상 무엇에도 고정불변의 실체는 없다는 것이다. '고'는 세상의 모든 현상은 원래 내 손을 벗어나있다는 것이다.


먼저 무상. 마음에 오고 가는 감정과 생각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것들은 생겨났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진다. 시간이 지남에도 사라지지 않는 것은 결코 없다. 아무리 큰 걱정이 있어도 그것은 없던 때가 있었으며, 언젠가는 사라질 것이니, 무상하다. 이를 깨닫게 되면, 어차피 사라질 것에 연연하지 않게 될 수 있다.


둘째 무아. 어떤 감정이나 생각 같은 게 있을 때, 그것들은 저 혼자 내 마음에 찾아오지 않는다. 가령 우리를 가장 괴롭게 만드는 '걱정 거리'라고 해보자. 왜 걱정이 있겠는가? 그 걱정을 만들어내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겉으로만 보면 '걱정 자체'가 실체 같지만, 사실은 그 걱정을 만들어낸 '원인'이 실체다. 그런데 그렇다면 그 원인은 또 어디서 오는가? 세상에 원인 없이 오는 것은 없으니 그 원인에도 원인은 있을 것이다. 원인에 원인이 있다면, 그 더 깊은 원인의 겉으로 드러난 원인의 실체다. 그러면 또 원인의 원인의 원인도 분명 있을 거다. 그럼 또 그게 실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끝도 없이 논의를 물고 늘어질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정말 끝이 없다. 


이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세상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저 원인에 의해 순간적으로 생겨날 뿐, 그 혼자만의 절대적인 실체는 없는 것이구나.' 아무리 큰 걱정거리여도 그 속은 그저 텅 비어 있고, 원인에 의한 순간적 현상일 뿐이니, 더 이상 허덕이지 않게 된다. 지금까진 '걱정거리'라는 실체가 있다고 착각해 그 실체에 의해 허덕인 것이지만, '무아'를 깨달으면 나를 괴롭게 만드는 '실체'가 없음을 알게 되니, 괴로움도 사라지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 고. 가만히 명상을 하고 앉아 있는 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어떤 작용을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끊임 없이 온갖 작용을 다 만들어낸다. 우리는 그 작용을 만들어내는 것이 '나'라고 착각한다. 내 것이라 생각하기에, 내가 통제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오랫동안 앉아 마음을 바라보고 있으면 그러한 실체를 발견하게 된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기에, '나'라고 착각하지 않는다. 나라고 착각하지 않으니, 굳이 통제하려 들지 않는다. 통제하려 들지 않으니, 괴롭지 않다. 모든 괴로움은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받아들이지 못 할 때에 생겨나니, 통제하려 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은 것이다.


이러한 세 가지 사실을 알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 '위빠사나 명상'이다. 세상의 실체를 보는 지혜를 통해, 깨달음과 온전한 평화를 갖는 것이다. 거리낄 것이 없으니, 단 한 순간이라도 행복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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