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un Londoners Run
지난 일요일 (4/24)에는 런던 마라톤이 있었다.
달리기를 딱히 좋아하지 않는 나와는 그다지 상관없는 이벤트라고 할 수 있었지만, 런던 마라톤은 구경하는 이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한다고 하기에 응원도 할 겸 보기로 했다.
마침 마라톤 코스가 동네 앞 큰길을 지나간다고 하니, 무시하기에는 너무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세계 4대 마라톤 중 하나로 꼽히는 이 대회는 그린위치 공원에서 시작해서 템즈강을 따라 런던 시내를 구석구석 돌다가 버킹엄 궁 앞에서 마무리하는데 무리 4만 명의 참가자가 뛴다고 하니, 실로 엄청난 규모의 이벤트다.
이 대회가 구경하는 이들에게도 즐거움을 선사하는 이유는 바로 참가자들의 익살스러운 복장들 때문인데, 직접 보니 정말이지 마라토너들의 창의력들에 감탄했다.
특히 재밌던 복장들 사진 몇 개 모음.
재밌는 복장을 입지 않은 참가자들도 번호표가 달린 조끼에 자신의 이름들이 적혀있어서, 길가에서 응원을 하는 우리들은 그들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면서 (Come on Steve! Let's go Mike! You can do it Julie!) 박수를 치며 응원을 해줬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 함성소리는 내게 뭔가 가슴 찌릿한 느낌을 주었고, 그 응원의 소리들이 조금이나마 마라톤 도전자들이 더 힘이 났길 하는 바람이었다.
헌데, 다음날 신문을 장식한 마라톤 소식은 다름 아닌, 마라토너들을 위해 준비했던 물병들을 박스채로 훔쳐갔다는 몇몇 실망스러운 시민 의식에 대한 내용이었다. 신사의 나라 영국은 옛말인가 보다.
앞서 말했듯, 난 달리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운동의 가장 기본이라고 하지만 수영이나 자전거 타기에 비해 너무 단순하기도 하고 달리다 보면, I could stop now, or now? or now? 아 이제 멈출까? 아 지금 멈출까? 아님 지금? 아님 지금? 같은 생각이 끝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끈기의 문제일 수도 있으니, 참 한심한 노릇이다.
그럼에도 달리기와 '친해지려' 노력을 몇 번 해왔는데, 이번 런던 마라톤을 구경하다 보니 그때 생각들이 나면서 다시 한번 달리고픈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는 Track and Field Team, 즉 육상부에 속해 있었는데 절대 잘 뛰어서 뽑힌 게 아니라 하고 싶은 학생들은 누구나 낄 수 있는 방과 후 과외활동이었다. 주변의 다른 학교들과도 시합이 있기도 했는데, 더 1등을 많이 한 학교가 이기는 식이었다.
그러다가 shin splints -정강이 통-라는 걸 얻어버려서 달리기를 그만둔 채 잊고 살다가 최근 몇 년 사이 다시 달리기에 대한 열정의 불꽃이 생겼다.
아마도 하루키의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읽다가 그랬던 것 같다. 같은 책을 읽고 마라톤에 도전하게 된 룸메이트의 영향도 물론 컸다.
워싱턴 디씨의 알링톤 국립묘지 옆에서 살았던지라 룸메와 함께 그 주변을 뛰어다니면서 훈련을 하다가 참가한 첫 레이스는 5km 짜리였다. 장소는 미국 서부의 유명한 와인 생산지인 Napa valley 의 한 마을인 Santa Rosa. 내가 좋아하는 스누피의 작가가 살던 곳이라 했는데 그의 뮤지움에 못 간 게 약간 아쉽다.
가까운 동부의 도시들을 제쳐두고 멀리 서부까지 간 이유인즉, 룸메의 조사에 따르면 이곳의 마라톤이 가장 평평 (flattest) 하면서 자신이 꿈꾸는 보스턴 마라톤에 참가자격을 주는 레이스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정작 뛰고 보니 평평하다는 게 사실 평균적으로 평평하다는 뜻이었다.....)
아무튼 룸메를 따라간 김에 와인만 마시지 말고 나도 좀 뛰어야지 싶어서 참가한 것이었기에 큰 부담 없는 5km를 뛰었는데, 30분 정도 뛰는 레이스였지만 '아, 이 맛에 레이스에 참가하는구나'를 느낄 수 있었다.
다음 레이스는 살짝 업그레이드해서 미군 해병대가 주관하는 Marine Corp 10km 에 도전했는데, 당시 살던 집 근처에 있는 뾰족한 연필 탑 Washington Monument에서 출발해 Iwo Jima Memorial에서 마치는 코스였다.
특이하게도 많은 군인들이 참가하는 대회여서 전쟁에 대한 기억과 상처들이 묻어나는 대회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전쟁에서 잃은 아들 사진을 등에 붙이고 뛰는 엄마 그리고 그 엄마를 응원하며 같이 뛰던 지인들,
한쪽 다리를 잃어 의족을 끼고 달리는 군인
그리고 길가에서 큰 성조기를 들고 응원하는 사람들.
뛰다가 몇 번이나 왈칵했던지 모른다. 달리기에 대한 도전이 또 이렇게 감성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걸 느낀 레이스였고, 온전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내면서 그 상처들이 치유되었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두개의 짧은 레이스였지만 분명히 인상 깊게 남아있는 기억들이 수면 위로 떠올라, 달리기에 대한 열정이 다시 살아난 것 같다. 일 년 동안 착실히 준비해서 내년 런던 마라톤에 도전하고픈 마음도 살짝 들기 시작했다.
작심삼일이라고, 며칠 있다가 사르르 녹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말이다.
하루키도 서른셋의 나이에 첫 마라톤을 오리지널 코스인 아테네에서 완주하고 그 이후로 계속 뛰어왔으니, 나도 결코 늦은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나저나 그럼 난 무슨 복장으로 뛸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