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산, <바퀴벌레>
그레고르 잠자는 어느 날 아침 눈을 떴을 때 벌레가 된 자신을 발견한다. 가족을 부양했던 그레고르는 그 후 어떤 일도 하지 못한다. 점차 인간이었던 그의 흔적은 지워지고 이내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인간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존엄한 죽음은 없었다. 벌레로 기억됐고, 벌레로 죽었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벌레로 변해버린 한 인간의 존엄과 소외에 관한 기괴한 이야기다.
여기 충(蟲)이라 불리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다양한 이름의 벌레로 불린다. 불과 30여 년 만에 급격한 변화를 겪은 한국의 신 풍속도는 수많은 벌레들을 양산해냈다. 우리는 이제 스스로를 인간 이하인 벌레라 서로를 지칭하며 경멸한다. 이제 세상에 벌레만도 못한 놈, 벌레 같은 놈, 벌레보다 더한 놈만 있을 뿐이다. 그 어느 자리에도 ‘인간’의 자리는 없다. 어느새 우리 모두 그레고르 잠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늘 어두운 사회 단면을 다루는 조금산의 웹툰 <바퀴벌레>는 현 대한민국의 벌레 같은 상황을 다룬다. 사건의 발단은 흔히 홀로 사는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살인하는 발바리 사건이다. 발바리 사건과 엮어 부패 경찰, 특종을 잡으려 경계를 넘는 기자, 성매매업을 하는 포주까지 다양한 형태의 벌레가 등장한다. 이 바퀴벌레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은 종을 단정할 수 없는 다양한 형태를 하고 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도에서 주인공은 발바리 사건 피해자 여성의 남자친구다. 그는 스스로 발바리를 처단하려고 한다. 범인인 발바리 또한 자신의 모든 비관적인 상황은 그저 가정환경 탓으로 돌려버린다. 벌레가 되려고 했으나 인간으로 남은 주인공과, 인간이 되고자 했으며 벌레도 될 수 없었던 발바리. 그리고 그들에게 기생하는 수많은 바퀴벌레들의 군상극이 바로 <바퀴벌레>다.
이 만화를 보면서 나는 진정 인간이 벌레보다 못한 존재인가라는 의문을 계속해서 가졌다. 특히 마지막 여운운이 남는 장면은 곱씹어 볼수록 혐오스럽다. 그러다 문득 나는 어떤 형태의 벌레로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을까란 실존적인 질문도 슬쩍 던졌다.
단어의 정의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겠지만, 대략 진지충이나 한남충쯤 정도일까. 혹 내가 모르는 또 다른 벌레로 불릴지도 모르겠다.
한편, 제목이 <바퀴벌레>인 이유는 인간과 가장 가까이 살고 있으며 어디서나 볼 수 있고, 가장 혐오스러운 모습을 가진 벌레가 바퀴벌레이기 때문이지 않을까. 뿐만 아니라 생존력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해, 이 지구 상에서 인류는 사라질지언정 바퀴벌레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말까지 있을 정도니 뭐 더 말해 무엇하랴.
어쨌든 이제 한때 벌레를 손가락질하고 인간이길 자처했던 모든 이들은 자신이 벌레라 불리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레고르 잠자와 같이 벌레로 기억되고 잊히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나아가 타인을 벌레라 지칭하는 이들은 자기 자신이 진정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 아닌지 고민해 볼 때가 된 것 같다. 내 짧은 소견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에서 벌레가 된 그레고리 잠자보다 그를 벌레 취급하는 가족과 지인들이 더 벌레만도 못한 존재처럼 느껴졌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