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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작가 Mar 21. 2021

세상에서 가장 유쾌한 구라

김언수, <캐비닛>

천국에서 권 박사가 물었다.

"요즘 어때?"

"아주 나빠요 도대체 이 섬에서 제가 뭘 할 수 있겠어요?"

"글쎄, 꼭 뭘 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냥 자네의 시간을 견뎌봐. 인생이란 그저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그릇에 불과한 거니까."

"캐비닛처럼요?"

"그래, 마치 캐비닛처럼."



김언수의 '구라'를 좋아한다. 굳이 소설이 아니라 구라라고 말한 이유는 김언수가 참 구라를 잘 푸는 소설가이기 때문이다. 내가 처음 김언수라는 인간에 대해 인지했던 소설은 <캐비닛>이었다. 정말 그가 말한 구라들이 너무 그럴싸해서 연신 '진짜?' 이런 인간들이 있다고 믿기까지 했다. 그는 캐비닛 마지막 장에서 앞선 내용에 대해 또 하나의 멋진 멘트를 날린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대부분의 정보는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거나, 오염된 것이므로 권위 있는 학술지를 비롯해 술자리 논쟁에 이르는 모든 곳에서 정당한 논거로 사용될 수 없음을 밝힙니다. 또한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특정 이름, 특정 지명, 가짜 학술용어들과 가짜 이론들, 그리고 신문기사들과 역사적인 사건들은 사실과 아무런 상관도 없으며 역시 창작, 변형, 오염의 단계를 거쳐 재활용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혹시라도 이 소설의 내용을 사실적이거나 과학적인 논거로 사용할 시에는 이점에 특별히 유의하시어 망신당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푸핫, 이토록 멋진 구라를 만들어낼 수 있다니, 나는 <캐비닛>을 보면서 때론 낄낄거렸고, 때론 찔끔거렸다. 이야기의 완성도도 좋았다. 특유의 따뜻하게 관철된 사람 냄새나는 이야기가 좋았다.  별거 아닌 듯 툭하고 가슴을 후벼 파는 내용들이 좋았다. 조심스럽게 건네는 위로의 문장들이 좋았어. <캐비닛>을 읽을 때 내 일기장에는 캐비닛의 문장들이 빼곡하게 차지하고 있었다.


<캐비닛>은 뭐 단순한 이야기다. 한 연구소의 한량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월급을 받아 가다, 문득 너무 무료해 열지 말아야 할 13호 캐비닛을 열어서 그 문서를 읽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13호 캐비닛에 있는 문서들은 돌연변이나 초능력자, 마법사 등에 관한 것이다. 


그는 그 문서를 보면서 매일 낄낄대는 것이 하루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뿔싸! 그러다 그 모습을 연구소장인 권 박사에게 걸린다. 권 박사는 그에게 13호 캐비닛 관리자가 되든지, 회사를 떠나든지 결정하라고 말한다. 어쩔 수 없는 월급쟁이인 나는 결국 13호 캐비닛 관리자가 된다. 그로부터 일어나는 에피소드 등이 주요 내용이다.


다양성을 가진 수많은 이들을 만나고 그에 대한 보고서를 쓰며 '나'는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지, 그리고 타인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는지를 때론 아름답게, 때론 섬뜩하게, 때론 기괴하게 보여준다. 


김언수 특유의 능청스러운 구라가 너무 일품이어서 한 번 손에 잡으면 그 끝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놓지 못한다. 나는 오늘도 <캐비닛>을 손에 들고는 두 시간 만에 끝장을 넘기고 말았다. 오랜만에 끝을 보며 드는 단상은, '음 몇 번을 보아도 참 굉장한 '구라'라는 것이다.


대체 어떤 인생을 살면 이런 '구라'를 쓸 수 있는 거지.


김언수는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어렸을 적 엄마와 먹었던 짜장면에 대해 회상한다. 너무나 맛있었던 짜장면보다 가치 있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는 김언수. 그는 글을 쓰다 지칠 때 스스로에게 짜장면보다 나은 소설을 쓰고 있느냐 자문해왔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자신이 짜장면은커녕 단무지만도 못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짜장면 한 그릇보다 나은 소설인 <캐비닛>은 분명 맛있고 풍요롭다. 한번 읽으며 배가 두둑이 부르고, 가끔은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더부룩하기도 하다. 그리고 분명 짜장만 한 그릇보다도 적어도 나에게는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예전, 이사를 자주 다니다 지쳐서 중고서점에다가 가지고 있었던 전공서적이나 이런저런 잡다한 책들을 판 적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나는 이 <캐비닛>만큼은 중고서점에 넘기지 않았다. 계속해서 가지고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 후 소설을 좋아한다는 이들이 만들면, 선물로 <캐비닛>을 주곤 했다. 덕분에 <캐비닛>은 내가 가장 자주, 그리고 많이 구매한 소설이 됐다. 문득 내가 캐비닛을 선물했던 이들이 과연 읽어봤을까란 궁금증이 들긴 한다.


어쨌든 권 박사의 마지막 말과 같이 인생이란 시간을 잠시 담아두는 캐비닛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인생이 정말 그저 캐비닛에 불과하다면, 나 또한 잠시 캐비닛에 머물다 폐기되는 문서와도 같이 빽빽하게 무언가 쓰이고, 사용되었다가 때가 되면 폐기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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