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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martobject Jul 28. 2021

제한적인 것

감각

“엄마는 나한테 결국 레고를 사주지 않았어.”


 그 때의 기억으로는 우리집이 가난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난 한 평생 뚱뚱하거나 통통 또는 다부지게 살아온 것으로 봤을 땐 여느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찢어질 정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자라진 않았다. 그래도 그런 드라마를 볼 때면 일부 공감되는 몇 가지 상황들이 있는데, 어린 시절에 가지고 싶던 것들을 손에 넣기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오래된 슈퍼 위에 무지개 빛으로 날 유혹했던 미국산 (그것이 정말 미국산인지, 유럽산인지는 알 수 없다) 젤리 한 봉지나 전철 앞 커플이 먹던 버터링 같은 음식을 사달라 했지만 엄마는 거절을 했다. 흐릿하지만 텔레비전 속에서 묘사되는 가난한 환경에 미안한 어머니의 얼굴보단 조금 더 강하고 담백한 식이었고 그럴때면 큰 반항 없이 금방 수긍했었던 것 같다. 


 열 살 무렵에 나는 ‘레고'를 가지고싶었다. 가족들이 이야기해주는 어린 나는 얌전하고 조용한 아이었는데 레고를 사달라고 여러번 말했던 것 보면 많이 간절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나의 인생에서 레고란 대학 과제 때문에 사야했던 오 십 피스 안팎의 레고 한 세트가 전부였다. 같은 나이 다른 시대를 살고있는 조카 장난감 상자에는 레고가 가득히 담겨있지만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나는 바라보며 군침만 흘릴 뿐이다. 


 조카는 마치 재벌가의 자식 만큼 원하는 장난감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 에잇 포켓의 시대라고 했던가, 굳이 요구하지 않아도 요즈음 어린이들이 선호하는 장난감을 기꺼이 조사해 사다주는 이모들과 삼촌들이 있다. 그 플라스틱 동산을 보고있노라면 많은 감정이 든다. 경이로움, 금전적 안타까움, 부러움. 부러움을 만드는 것 중 절반 정도가 레고라는 것이다. 나에게 시간과 에너지가 조금 더 남는다면 자리를 잡고 저 블럭들로 내 집을, 차를, 건물을 잇는 다리를 만들었을 것이다. 물론 조카와 놀아준다는 빌미로 몇 차례 놀아주긴 했었지만 무언가 현타가 와버리는게 문제다. 지금은 중학생이 되어 레고에 관심이 없어져버렸으니 변명거리도 없다. 방문이라도 잠그고 놀아야할 판이다. 


 그래도 조카가 초등학교 저학년이던 시절 함께 놀아주면서 레고로 바스티온(게임 오버워치에 나오는 캐릭터)이라는 로봇을 만들어 주었다. 사실 제법 심취해버렸고 결과물도 백 퍼센트는 아니여도 내 눈엔 충분히 그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조카에게 보여주자 ‘오'라는 말과 함께 ‘삼촌 가져.'라 말하며 형식적인 감탄사와 어느 정도의 데미지를 주었다. 착하기도 하지. 몇 개월 후 레고에서 바스티온 모델의 정식 제품이 나와버려 나의 바스티온은 더 처참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다시 나의 어린 시절. 레고 만큼이나 소망했던 장난감. ‘후레쉬맨', ‘파워레인저' 같은 피규어 장난감 또한 쉽게 가질 수 없었다. 빨강, 초록, 파랑, 노랑, 분홍. 멋진 팔등신의 피규어들이 빌런들과 싸우고 동료들과 일궈내는 드라마. 관절이 유연하게 꺾여서 좋아하던 그린 후레쉬의 포즈를 셋팅하는 그런 장난감이었다면 좋았겠지만 그 소망은 생각 보다 일찍 정리되었다. 나에겐 색연필이 있었으니까. 빨간색의 색연필이 레드 후레쉬가 파란색의 색연필이 블루 후레쉬가 되었다. 각종 색연필 끼리 싸움을 붙이고 관계를 만들고 문제를 해결하면서 많은 명장면을 만들어냈다. 


 그 시절 당신들 각자의 다섯 레인저(또는 후레쉬. 나는 후레쉬) 이야기들이 있겠지만, 나는 다섯 명의 레인저 외의 보라, 검정, 갈색 등 일곱 레인저 정도 더 있었고 풍성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었다. 12색 지구본이 그려진 색연필을 시작으로 그 시절 엄청난 사치인 금색, 은색의 24색 색연필을 ‘준비물'이라는 핑계로 획득한 나는 꽤나 행복했더랬다. 

 열 살 아이의 시련. 그러니까 소유하고 싶었지만 가지지 못해 다른 길을 택했던 것이. 겉으론 색만 다른 긴 원기둥 사물이었지만 머릿속 상상에서 색연필의 팔 다리가 움직이고, 찡그린 표정이 보이고,  레인저들의 목소리가 들리게 성장한 것 같다. 단연 과거의 나와 현재의 조카는 마찬가지로 그저 즐거운 하루 하루였을 것이다. 단지 손에 쥐고 흔든 장난감의 모습이 직관적인가 추상적인가 차이일 뿐이었으니까. 




 유학미술 학원에서 강사로 일했을 때의 이야기다. 원장님은 그 때는 감사한 귀인이었지만 현재는 먼저 연락을 하지 않는다. 내가 보고 배워야할 사람인지 반면교사로 알아두어야할 사람인지 아직도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래도 매번 학생에게 이야기해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강렬하게 다가왔었다. 


 그랬기 때문일까. 어김없이 원장님 크리틱을 받고있던 학생 한명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나는 강의내용을 점검하고 있었고 당사자가 아닌 학생들은 각자 작업을 하고 있었지만 모든이의 시선을 제외한 모든 감각이 그 테이블로 향해있었다. 대중적으로 정신이 탈탈 털리던 학생이 울먹거리며 원장님께 갖고있던 불만을 뱉어냈다.


“이것도, 저것도 안된다. 너무 힘들어요. 제한이 많아요.”


 미쳤네. 나 포함 모두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 유럽 대학에 포트폴리오 제출할 날짜가 얼마 안남았는데 학생들의 포트폴리오는 반정도 밖에 마무리되지 않았다. 대부분 군말없이 작품을 만들어내야했다. 논쟁이 생겨도 각자의 게으름과 우유부단함에 모든 잘못은 학생들의 것이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 학생 의견에 대해서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작품의 컨셉을 들고 원장님께 컨펌을 받으면 거절되는 경우가 많았으니까. ‘이미지가 위협적이다.’, ‘의미가 전달되지 않는다.’, ‘뒤집어.’ 등. 마치 컨펌을 내주고 싶지 않은 것 처럼 빈번히 거절당했다.


 마치 사고가 자유로운 넓은 들판 가운데에 생뚱맞게 동그란 울타리를 쳐버리는 느낌이었다. 유명한 해외 디자인 학교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에게 알맞지 않은 ‘창작'과는 먼 교육이라고 생각도 했다. 무거워진 분위기 속에서 원장님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어조. 다행히도 질타가 시작되는 것이 아닌 무언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제한을 둔다는 건, 너가 정답을 찾을 범위가 더 줄어드는거야. 더 정확해지고…’. 사실 학생이 혼나는 그 순간은 나의 일도 아니었고 미안하지만 흥미로운 광경이었다. 몇 일 지나지 않아 그 학생은 정답에 가까운 작품을 가져왔고 포트폴리오 한 자리를 채웠다. 


 역시 원장님 말이 맞았구나하며 넘어가고 먼 시간이 지난 지금. 웃기게도 실무를 진행하면서 명확히 쳐져있는 울타리 안에 있는 것이 마음이 평안하다. ‘이쁜 옷을 디자인 할거야.’라는 것과 ‘너무 선정적이지 않으면서 절제된 옷을 디자인 할거야’라는 것의 차이 처럼 제한은 그 어휘가 가진 느낌 보다 훨씬 이로운 것이었다. 


 마치 디자인 툴을 다 배우고 나서. 그러니까 뭐든 창조할 장비를 갖고 있으면서 ‘이제 뭘 만들어 볼까!’라며 프로젝트를 해보자 다짐하고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못하겠는 것과 같다. 또는 높은 상금의 공모전이 주최되는데 공모전 내용이 고작 스무 자 정도라서 기획 단계에서나 완성 단계에서 확신이 안서는 그런 상황. 이럴 때 바로 ‘제한’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같은 이유에서 클라이언트가 디자이너님을 믿으니 알아서 잘 해달라는 상황이 있다. 그 믿는 마음은 굉장히 감사하지만 결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한번에 전달할 수 없다. 오히려 ‘쨍한 핑크색으로 해주세요.’나 ‘경쟁사 제품과 비슷하게 해주세요.’라는 요구를 받고 암호 해독하여 그 제한적인 범주 안에서 ‘촌스럽지 않은 핑크’, ‘카피가 아닌 스타일’로 풀어내는 것이 명료하다. 


 단순히 작품의 목적이나 컨셉 키워드를 분명히하자는 것이 아닌 제한을 말하는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이탈해버리거나 정신차리면 밟고 서있는 마지노선같은. 결국 ‘제한’이라는 어휘가 가진 부정적인 느낌 만큼 스트레스를 주지만 여러번 겪고 울면서 극복해낸다면 분명한 득과 성장이 있다. 그 울타리 안에서 최대한 많이 뛰어 놀아봐야 다른 울타리 또는 더 큰 울타리에서도 정확한 답을 찾을 수 있고 스스로 울타리도 칠 수 있게되는 것이다.  

 나의 어린 시절 레고 블럭을 마음껏 가질 수 있었다면 지금과 같이 디자이너로 살아가고 있을까. 어렸을 적 적당한 제한적인 환경에 대해 감사함을 느낀다. 창작에 대한 일만이 아니더라도 삶 자체에서 다가오는 여러 형태의 ‘제한'은 항상 스트레스를 주지만 이내 성장통이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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