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

by Anton Choi

장례식과 톡 쏘는 짜릿함

장례식과 톡 쏘는 짜릿함.

외할아버지는 장수하셨다. 외할아버지의 형님인 큰 외할아버지도 오래 사셨다. 큰 외할아버지는 마땅히 돌보아 줄 자식이 없었는지 외삼촌 댁에서 외할아버지와 함께 지내셨다. 외숙모 입장에서 시아버지를 두 분이나 모셔야 했으니 많이 힘드셨을 것이다. 게다가 두 분 모두 아흔을 넘겨 돌아가셨으니 그 세월이 얼마나 고되었을지 짐작이 간다. 큰 외할아버지와의 기억은 극히 짧고 단편적이다.


어머니는 당신의 본가에서 불과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결혼 생활을 시작했다. 외삼촌 댁, 즉 외갓집은 우리 집과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집안의 막내였던 어머니는 아주 어린 시절, 가난과 굶주림 속에서 외할머니를 떠나보냈다.


어머니가 태어난 시기는 중일전쟁이 끝나고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였다. 전쟁 물자로 쓰일 수 있는 모든 것을 일제가 수탈해 가던 시기였다. 그때 어머니는 태어났고, 특별히 빼앗길 것도 없을 만큼 가난한 집안에서 외할머니마저 잃었다. 이후 어머니는 어린 시절을 여순사건과 한국 전쟁을 겪으며 자랐다. 밤과 낮으로 번갈아 가며 마을의 주인이 바뀌는 광경을 목격했고, 좌익 색출을 위해 동구 밖에 집합해 트럭에 실려 끌려가던 청년들과 외삼촌의 모습도 보았을 것이다. 그중에는 그 길이 삶의 마지막 길이 되어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읍내로 끌려간 외삼촌이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이미 총살당했으리라 생각하고, 십 리 길 읍내 소화다리 밑 둔치에 가지런히 놓인 시신들 속에서 외삼촌을 찾아 헤맸다고 한다. 다행히 시신들 속에서 외삼촌을 발견하지 못했고, 두 사람은 오가는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했을 뿐 외삼촌은 그날 늦은 저녁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좌익 색출을 위해 동네 청년을 끌고 가는 모습]

그 무렵, 인근 마을에서 방앗간을 운영하던 아버지네는 아들 여섯에 딸 둘을 둔 대가족이었다. 남원 파출소에서 순경으로 근무하시던 다섯째 큰아버지가 한밤중 파출소를 습격한 빨치산과의 교전 중 사망한 일을 제외하면, 가족 가운데 태평양전쟁과 한국 전쟁을 겪는 동안 일본군에 징집되거나 전쟁으로 변을 당한 이는 없었다.


외가가 지척이었던 나는 어릴 적 외가를 하루도 빠짐없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우리 집과 외가는 거의 한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물론 그것은 철없는 나만의 생각이었을지도 모른다. 외숙모 입장에서 손아래 시누이라 해도 편했을 리 없었고, 어머니 또한 친정아버지와 큰아버지를 함께 모시며 어린 조카 둘을 남겨 두고 젊어서 세상을 떠난 첫 번째 새언니 다음으로 들어와 고생하던 두 번째 새언니에게 시누이 노릇을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아버지와 외삼촌의 관계 역시 두 분의 무뚝뚝한 성격 탓에 허물없는 형님·동생 사이는 아니었다. 두 집의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하는 말은 ‘노동 공동체’였다. 모내기, 벼 베기, 탈곡, 농약 치기처럼 일손이 많이 필요한 일은 늘 두 집이 함께했다. 그중 농약 줄을 잡는 일은 어린 나도 거들 수 있었는데, 우리 집 농약만 하면 반나절이면 끝날 일을 외가 농약까지 도와야 했으니 시간이 두배로 걸렸고, 놀기 좋아했던 나에게는 정말 하기 싫은 일 중 하나였다. 그래도 농약을 다 치고 나면 외숙모가 삶아 주시던 냉국수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내 기억 속 외할아버지는 겨울이면 외가 뒷방 아랫목에 앉아 주황색 호박단추가 달린 누비옷을 입고 화투짝으로 사주를 보시던 모습, 뻐끔뻐끔 긴 담뱃대로 담배를 피우시던 모습으로 남아 있다. 방 안 가득 밴 담배 냄새, 여름이면 까끌한 모시옷을 입고 구부러진 허리를 지팡이에 의지해 마당을 거닐던 모습도 함께 떠오른다. 유난히 추웠던 어느 겨울, 큰 외할아버지와 방을 함께 쓰시던 외할아버지가 동작이 느린 형님이 방문을 늦게 닫는다며 “아이고 추운데 문 좀 빨리 닫고 들어와요”라고 당신 형님을 구박하시던 장면이 기억난다.

큰 외할아버지가 아흔 중반에 돌아가시고, 3~4년 뒤 외할아버지가 그 뒤를 이었다. 두 분 모두 아흔을 넘겨 편히 돌아가셨다. 이런 죽음을 사람들은 호상이라 부른다.


외가에서 상을 치렀다. 마당에는 커다란 차일 서너 개가 설치되고 바닥에는 멍석이 깔렸다. 형편이 넉넉지 않은 이들은 쌀이나 일손으로 부의를 대신했다. 장례는 마을 전체가 함께 치르는 공동 행사였다. 수육과 찌개용으로 커다란 돼지가 잡히고, 마당 한편에는 임시 아궁이에 커다란 가마솥이 걸렸다. 장례 음식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큼직하게 깍둑 썬 돼지고기와 두부, 콩나물이 수북이 들어간 돼지고기 김칫국이었다.


상주는 누런 빛이 도는 거친 삼베옷에 두건을 쓰고 짚신을 신은 채 지팡이를 짚고 손님을 맞았다. 비라도 내리면 질퍽해진 황토 마당 위로 볏짚이 깔렸다. 갑작스러운 사고사가 아니라면 상가는 대개 북적이고 시끌벅적했다. 오랜만에 모인 사람들은 술기운에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고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기도 했다. 밤새 상가를 지키는 지루함과 피로를 잊기 위해 윷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장례식은 모두가 농사일을 잠시 내려놓고 망자의 명복과 유가족을 위로하는 자리이기도 했으나, 모처럼 동네 사람들이 모두 모여 북적대는, 사람 냄새 가득한 잔칫날이기도 했다.


외할아버지 장례식 날, 외갓집 수돗가에서 나는 누군가 내민 검은 액체를 처음 맛보았다. 어린아이는 마시면 안 되는, 그래서 더 비밀스럽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무언가였다. 기껏해야 소주병밖에 모르던 내 눈앞에는 모양도 낯선 병 하나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어둡게 빛나는 액체가 담겨 있었다. 한 모금을 삼키자 묵직한 것이 목을 태울 듯 내려갔고 이내 강렬한 기운이 코를 타고 분출되었다. 정신이 번쩍 들며 무언가가 번개처럼 내 몸을 스치고 지나간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 ‘톡 쏜다’는 말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그 첫 경험을 더 복잡한 말로 설명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렇게 내 기억 속 외할아버지의 장례식은 슬픔과 이별의 풍경이 아니라, 겨울 공기처럼 선명하게 각인된 코카콜라의 첫맛으로 남아 있다.